감상글(책)

<소설> 빨강 머리 앤

톰소여와허크 2024. 1. 15. 20:58

 

루시 모드 몽고메리(박혜원 역), 빨강 머리 앤, 더모든, 2019.

 

 

- 작가 몽고메리(18741942)는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외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녀의 빨강 머리 앤1907년 출간되었다. 소설 속 앤은 부모를 잃고 다른 집을 옮겨 다니다가 고아원에 보내지고, 섬에 사는 매슈와 마릴라 남매에게 입양되어 자란다. 작가 몽고메리가 섬에 돌아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외할머니 일을 도왔듯이 소설 속 앤도 자신의 은인인 매슈가 죽은 후 마릴라 곁에 남기로 결정한다. 몽고메리의 자전적 경험이 소설 속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을 것이다.

소싯적 읽었던 기억만 희미하게 갖고 있던 빨강 머리 앤을 다시 읽으니 그냥 처음 읽는 느낌이다. 다른 책과 번갈아 보는 습관으로 인해 한 번에 읽지는 못했지만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흥이 전달되어 얼마간 책에 푹 빠져 지냈다. 앤에게 빠져 지낸 것이기도 하겠다. 상상력이 별나게 풍부한 앤은 그걸 입으로 재미나게 풀어놓는 재주를 가졌다. 글을 짓고 시를 낭송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한다.

타고난 그런 재주를 다들 사랑하는 건 아니라서 초록 지붕 집의 매슈와 마릴라를 만나기 전까지 앤은 행복보다 슬픔이 많았고 삶도 고생스러웠다. 아이 육아를 책임지던 경험이 이웃의 아이를 살리는 계기가 되자 앤은 자신이 돌봐야 애가 많다고 투덜거렸던 이전의 고생스런 시절이 사는 데 값진 경험으로 작용한 것을 고마워하기도 한다. 사건과 사건이 아이를 성숙하게 만드는 징검돌이라면, 빨강 머리 앤은 그러한 사건과 해프닝의 연속선상에서 때로 삐끗하면서도 결국 강을 건너가는 얘기다..

앤은 상상 속에서 슬픔을 견디기도 하지만 자신이 긍정의 에너지가 될 때가 더 많다. 자신의 태도 여하에 따라 자신과 불화했던 사람의 마음을 얻고 관계가 좋아지는 경험도 하면서 앤은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어려운 일이 아닌가 봐요.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돼서 정말 기뻐요.”라고 마릴라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한다.

 

마릴라는 앤이 자신 위주로 상상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할 때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좋아할지도 고민하라는 조언도 적절하게 하지만 이 소설이 아름다운 것은 앤이 바뀌어가는 데 있다기보다는 앤 주변의 사람들이 앤과의 만남을 통해서 조금씩 변해가는 데 있다. 자신을 표현할 줄 모르는 매슈는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되었고, 내적인 선량함이 외적인 엄격함 속에 묻혀 있던 마릴라도 조금씩 자신의 진심을 표현하고 앤으로 인해 사랑의 감정 속에 살게 된다. 이웃의 조세핀 배리 할머니도 앤과 함께 있음으로 인해 행복감을 맛보고 자신이 더 괜찮은 사람처럼 된다는 걸 인정한다. 빨강 머리 앤을 최고의 소설로 꼽는 요인 중의 하나가 이런 관계와 성장에 대해 많은 암시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초라했던, 하지만 상상력 속에 풍성했던 앤의 다락방이 점점 따듯한 공간으로 바뀌어갈 무렵 예기치 않은 이별의 시간도 다가온다. 상심에 빠졌어도 앤은 선택을 고민하지 않는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길을 가지 않고 자신과 주변이 함께 행복한 길에서 또 다른 자아실현을 꿈꾼다. 앤이 명명한 반짝이는 호수를 지나와 초록 지붕 집 그 언덕에서 지난 시간과 화해하며 우정과 사랑이 새로 싹트는 걸 예감케 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작가 몽고메리는 스스로에게 또는 세상의 앤과 앤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그 무엇도 타고난 앤의 상상력과 꿈이 가득한 이상 세계를 빼앗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었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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