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살포시 아는 집 / 강미정

톰소여와허크 2024. 8. 27. 08:09

살포시 아는 집 / 강미정

 

살얼음이 붙잡은 징검돌을 건너야 갈 수 있는 집이 있었다

살포시 아는 집이었는데

추운 뜰에서 종일 기다려도 섭섭지 않았다

집 안으로 들려면 울타리인 탱자나무 가시를 건너야 했다

가시 사이 쭈글쭈글 말라서 단단해진 탱자 열매의 고신한 적막도 건너야 했다

하루를 묵으면 빛 들지 않은 묵은내가 저 기억 끝에서부터 몰려왔다

추운 생각들로 온몸을 떨어야 했다

밤새도록 쪼그리고 앉아 조는 어린 나의 몸을 건너야 했다

우린 살포시 아는 사이야,

수십 년을 건넌 안면인 내게 처음 했던 말을

살포시 하곤 했다

벽이 흐려지고 문풍지 떠는 소리가 선명해지기도 했다

나에게서 벽이었던 사람조차도

때론 나를 견디게 한 힘이었음을,

나에게서조차 나는 살포시 아는 사이였음을 왜 몰랐을까,

혼자 엎드려 젖은 발을 감싸고 있는

살포시 아는 집의 목소리를 건너면

외길에 놓인 나의 낙막한 발걸음이 보이기도 했다

 

-『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 문학의전당, 2019.

 

감상 - “당신은 움푹해서 좋아, 나 거기 들앉아 움푹한 세월이 어찌 갔는지 몰랐네 당신은 움푹해서 좋아, 나 거기 들앉아 움푹한 세상이 어찌 생겼는지 몰랐네 깜깜절벽 움푹한 당신의 집에 담긴 내 가슴이 움푹움푹하네”(움푹한 당신)

강미정 시인의 시집 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를 읽으며 움푹한 당신에 오래 머물렀지만 정작 감상 흔적은 살포시 아는 집에 대해 남기고 있다. ‘움푹한 당신의 집에 폭 싸여 있어도 충분히 좋았겠지만 살포시 아는 집으로 한 걸음 딛는 설렘도 괜찮다.

살포시 아는 집이 내 집인지 네 집인지 알 수 없어도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집이다. 그 추억은 밤새도록 쪼그리고 앉아 조는유년의 추운기억을 부른다. 하지만 수십 년을 격하여 찾은 공간은 이제 옛 기억을 뒤로하고 새로운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흐르는 시간은 를 세상의 격랑으로 보내고 그 속에서 한결 성숙해진 자아는 나에게서 벽이었던 사람조차도/ 때론 나를 견디게 한 힘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어지는 그다음 시구는 단연 눈에 띈다.

나에게서조차 나는 살포시 아는 사이였음을 왜 몰랐을까

감탄 혹은 의문의 형태를 빌렸지만 시인의 아포리즘을 대하는 기분이다. 잘 안다는 것과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텐데 흔히 둘을 착각하고 지내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있다. 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성찰이 결여된 일체화는 아슬아슬하다. 지나친 자신감, 지나친 자기비하로 관계의 불편을 초래하는 일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나에게서조차 나는 살포시 아는 사이는 결국, ‘와의 거리 두기를 통해 비로소 를 객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도 세상과 마찬가지로 평생 알아가야 할 대상으로 인정할 것 같으면 살포시 알고, 좀 아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살포시 아는 집을 나온 시인의 발걸음은 다시 움푹한 집으로 향할 것이다. 낙막한 발걸음이 만든 시를 움푹움푹 떠먹고 조금 더 쓸쓸해져도 좋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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