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교, 『동해 하얀 파도를 따라』, 창조문예사, 2006.
- 이성교 시인(1932-2021)은 강원도 삼척 출신이며 강릉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하숙집을 시골집을 얻으면서 그곳의 주인인 왕산골 어머니를 수양어머니로 여기며 평생 따르고 인사하는 인간미를 육명심 사진작가가 『문인의 초상』에 언급한 바 있다. 그때 육명심 작가가 읽은 책이 『동해 하얀 파도를 따라』다.
수필집에 따르면, 이성교 시인은 중학생 신분으로 6.25를 겪는다. 방위군으로 징집되었다가 시인은 장질부사에 걸리고 식구들에게 차례로 옮긴 병마는 어머니 목숨마저 앗아간다. 그때 피난 가던 길에 집에 얹혀살던 처녀 복순이는 어머니 병간호로 살아남아 아랫집 남자와 결혼해서 살면서 시인을 만나 옛 추억에 잠길 때도 있다. 시인은 고향 월천 바닷가에 가면 이런 상념에 젖는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왕산골 어머니가 일부나만 대신했을 것이다.
이성교에게 각별한 시인은 문단 데뷔를 도와 준 미당 서정주다. 서정주 자택은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면 늘 손님이 붐볐다 하니 서정주 시인의 당시 위상과 함께 손님을 대하는 정성도 짐작해 볼 수는 있겠다. 하지만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친일 부역자로 서정주의 이름이 올라갔으며, 미당 사후 2001년부터 17회 이어온 ‘미당문학상’도 2018년 폐지되었다. 2017년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송경동 시인은 친일 부역자를 상으로 기리는 것은 맞지 않다며 수상 후보에서 스스로 물러나기도 했다. 고창의 ‘미당 시문학관’에서도 그의 친일 경력을 함께 조명하고 있고 이마저 문학관 이름을 바꾸어야 하지 않냐는 여론도 있다.
서정주의 집을 가장 많이 출입한 것으로 알려진 고은 시인은 생전에 서정주와 거리를 두기 시작해서 서정주 조문 후에는 고인이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이라며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이처럼 서정주 시인이 작고한 2000년부터 2024년 지금까지 서정주의 친일 경력과 독재 정권 찬양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는 중에도 이성교 시인은 일관되게 서정주 편에 남는다.
“나는 늘 티없이 마음이 곱고 밝고 좋은 시만 쓰시는, 우리 문학사에서 최고의 시인을 내 은사로 모시고 사는 것이 항상 자랑스러웠다. 이제 스승은 이 세상에 안 계신다. 때로는 고독하지만, 그 어른이 남겨 놓으신 많은 시와 사랑의 그림자로 가끔 위안을 받는다”고 했다. 고인과의 특별한 인간관계나 실제 시 작품에 대한 영향 관계로 말미암아 서정주를 보는 다른 시각을 애써 부정하지 않았을까 싶다.
박재삼 시인도 서정주 시인과 특별한 인연으로 서정주에 대한 태도가 이성교와 다르지 않을 텐데 서정주보다 일찍 병마로 세상을 등졌기에 훗날의 사정을 알지 못하겠다. 이성교는 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소개하면서 굳이 낡은 시, 새로운 시 따지지 않더라도 충분히 좋았다고 말한다. 이성교는 “날마다의 생활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존재가 시인이라고 했다.
이성교는 수필집에서 1950년대 중반 무렵의 문단 풍경도 간략하게나마 소개한다. 당시 문인들이 자주 출입하던 다방으로 명동의 ‘문예싸롱’, ‘갈채’, ‘동방싸롱’ 등이 있었다며, 그중 문예싸롱과 갈채엔 김동리, 조연현을 비롯해서 박화성, 최정희, 손소희, 서정주, 황순원, 박목월, 조지훈, 김윤성, 이종환 등 한국문학가협회 사람이 모였고, 동방싸롱엔 모윤숙, 백철, 이헌구, 김광섭, 이무영, 김송, 노천명, 정비석, 김용호 등 자유문협 사람과 예술인이 모였다고 한다.
동방싸롱을 출입하던 노천명 시인의 기질을 알 수 있는 일화도 있다. 신인이었던 이성교 시인이 우연찮게 노천명과 마주앉아 있다가 노천명이 특별한 말이 없기에 신문을 펴들고 읽으려고 하자 노천명이 큰 목소리로 꾸짖는데 요지는 남 얘기하는 데 신문은 왜 보느냐는 거다. 이성교로선 당혹스러웠겠지만 당시 노천명의 건강 상태와 관련 있어 보인다.
동갑내기 이형기 시인은 술만 취하면 시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느냐 말하곤 했단다. 그의 대표작인 「낙화」는 낙화(落花)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지만 원래 제목은 모란을 의미하는 낙화(洛花)가 분명하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중적 의미를 잘 살려 쓴 시로 기억될 것이다. 이형기든, 이성교든 박재삼이든 누구든 낙화는 피할 수 없겠지만 그 결실은 조금씩 다른 거란 생각도 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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