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내, 『싱글 오리진』, 연암서가, 2024.
- 오랫동안 연극배우로 살았던 사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이 아닐지라도 하기 싫은 일을 덜 하고 살았으면 하는 사람, 수영을 배우며 물에 뜨는 것이 어려웠지만 끝내 그 단계를 넘어섰을 사람,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희망란에 ‘작가’를 썼다가 선생의 권고로 다른 것을 적어야 했던 사람. 이 모든 것을 재미나게 풀어내면서 송시내란 사람은 작가가 되었다.
책을 받아 들고 처음 든 생각이 제목에 대한 의문이었던 만큼 그 대목을 먼저 찾아본다. ‘싱글 오리진’은 하나의 원산지에서 생산된 커피이고 반면에 특징이 다른 여러 가지를 섞어 새로운 맛과 향을 내는 커피를 ‘블렌디드’라 한다. 커피숍에서 작가는 싱글 오리진을 선택하고 딸은 블렌디드를 선택하다. 울산이란 지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작가에 비해 딸은 열다섯 나이에 홀로 해외로 가는 비행기를 탔고 낯선 곳에서 공부를 하고 친구를 사귄다. 작가도 딸도 다른 선택지를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지만 결국, 스스로의 선택을 존중해준다.
또 한 명의 딸은 대학에 합격하고도 중도에 다른 선택을 하며 작가를 혼란스럽게 한다. 경주 남산 도깨비바위에 오른 작가는 낮도깨비 같은 딸의 행적을 이해하는 시간을 갖는다. 도깨비바위를 내려갈 때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어쩌면 내 소원은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딸아이가 달라지길 원했던 게 아니라 스스로의 길을 잘 개척해 나가길 바란 것”이니까 말이다.
가족 관계도 그러하지만 크고 작은 상처를 나누어 갖는 쪽은 대개 가까운 사이다. 사람 사이 신뢰가 깨지고 실망스런 마음이 클 때 작가는 잠깐의 증발을 꿈꾸며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곳의 눈 오는 풍경에도 오르골 소리에도 작가는 자신의 마음이 이전과 다르게 반응하는 걸 느낀다. “문제의 중심에서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니 정수리에서부터 차가운 물을 들이부은 듯 선명해졌다. 나는 상대의 입장을 제대로 헤아린 것일까.”라며 남을 탓하는 마음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마음으로 옮겨 간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쯤 해서 작가는 과거의 시간에 집착하기보다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더 잘 보낼까를 궁리하는 사람이 된다.
관계에 대한 작가의 탐구는 진지하면서 깊고, 아프면서도 따스하다. “시간과 정성에 반비례하는 결과가 주는 상실감이 두려워 타인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꺼렸다”는 말에 같이 아픈 마음이 되었다가, “따뜻한 이의 말 한마디, 천진한 아이의 시선과 나이든 이들의 유연한 태도”에서 위로받는다는 말에 다시 공감하게 된다.
이상에서 보듯 책 제목인 싱글 오리진은 하나의 상징이다. 자신의 취향과 정체성을 갖고 살되 가까운 이의 또 다른 개성과 선택을 존중해주는 일이다. 갈등과 대립이 한순간에 무마되는 일이야 있을까 마는 싱글 오리진 혹은 블렌디드,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어긋나고 삐뚤어진 관계를 얼마간 돌려놓을 것이란 기대를 품게 한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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