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니그(윤선아 역), 『조르주 루오』, 분도출판사, 2012.
발터 니그는 책의 서문에서 뜻밖에 공자를 끌어들인다. 공자를 부른 이유는 현대 예술의 혼란과 관련이 있다. 현대 예술은 “무엇이든 흥미진진하고 신식이어야 한다는 병적 욕망이 근저에 깔려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뒤섞이고 있다. 상하좌우의 구분도 없다. 예술과 관련된 법칙은 모조리 그 효력을 상실했으며 실존 전체가 혼란스러워졌다. 인간은 이제 붙박이별을 기준으로 나아갈 바를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미끄러지고 있다. 감정의 혼란과 정신의 혼미는 불행하게도 일상적 현상이 되었으며 판단의 잣대는 제거되고 말았다”고 발터 니그는 말한다.
이런 현실에서 2500년 전, 혼돈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공자가 『춘추』에서 꺼낸 말은 개념을 바로잡는 것이란다. 공자의 말인즉, “개념이 올바르지 않으면 말이 옳지 않고, 말이 옳지 않으면 글이 나오지 않는다. 글이 쓰이지 않으면 도덕과 예술이 번성하지 않는다. 고결한 사람은 자신의 말에 무질서가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법이다”라고 했다.
발터 니그는 추상예술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추상예술 창시자들이 단순하고 원초적인 요소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그 유행이 지나쳐서 화가 자신들만 자기 그림을 이해할 수 있을 뿐 감상자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꼬집으며 개념을 바로잡는 일의 필요를 다시 말한다. 발터 니그의 말에 공감되는 면이 크지만 애초에 무질서와 혼란으로 치부되던 것이 세월이 지나 역작으로 평가되는 면도 함께 고려해야 되지 싶다.
발터 니그는 그림과 감상자의 상호 관계를 말하며, 그림을 오래 쳐다보기를 주문한다. “진정한 그림은 그 그림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만 치유 능력을 드러내며 그를 원초적 형상으로 이끈다”는 말은 당연하면서도 그림을 대하는 감상자의 자세를 생각하게 해준다. 발터 니그는 감상자로서 조르주 루오의 그림에서 아름다움과 치유의 감정을 느껴 이 책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조르주 루오(1871〜1958)는 파리 변두리에서 태어났다. 루오의 아버지는 가구 세공사였다. 루오는 열네 살 때 스테인드글라스 직공이었던 할아버지의 도제로 들어갔고 이때의 경험이 그의 그림에 크게 영향을 준다. 스무 살 때 에콜 데 보자르(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해 스승인 귀스타프 모로를 배우며(그림 스타일은 닮지 않았지만) 서로 지지하는 사제관계가 된다. 모로 사후 모로의 집을 개조한 미술관의 관장으로 일하기도 한다.
조르주 루오는 “나는 순종하는 사람이다. 반항이야 누구든 할 수 있다. 그러나 침묵 가운데서 내면의 부름에 귀 기울이고 조급해하지 않으며 살아 있는 동안 알맞은 표현 수단을 찾는 일은 반항보다 어렵다”는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여기서, 반항이야 누구든 할 수 있다는 말도 반항적으로 들리는 측면이 있다. 불안과 무감각을 견디던 서른 살 즈음의 루오는 우연찮게 섬광 혹은 은총의 빛줄기를 맞이하여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는 진술도 한다.
신비체험 이후 루오는 잔다르크를 그리던 손으로 뒷골목의 창녀를 그린다. 발터 니그는 이를 이렇게 이해한다. “창녀들은 시민사회의 짓밟힌 자들이다. 고귀한 삶은 이 여자들에게서 거짓과 조소, 물욕 아래 파묻혀 버렸다. 루오는 멸시받고 모욕당한 자들 편에 섰다”는 것이다. 시련당하는 인간, 매 맞는 인간을 편드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적이라는 점에서 발터 니그는 루오의 진정성을 평가한다.
조르주 루오는 어릿광대도 많이 그렸다. 발터 니그가 보기에 어릿광대는 늘 지는 사람이다. 약삭빠르고 꾀 많은 사람이지만 잠시의 행운 뒤에 결국 “사람들에게 속은 인간, 무력한 인간, 뒷전으로 밀려나나는 인간”이 되고 만다. 조르주 루오도 자신의 어릿광대에 대해서 “그들의 웃음은 웃음 뒤에 감추어진 눈물의 광기와 같다. 그들의 눈물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웃음은 쓰디쓴 체념과도 같다”고 했다.
조르주 루오는 살아서 명성을 크게 누리지는 못했다. 화상인 볼라르에게 얼마간의 돈을 받고 자신의 전 작품을 넘기는 조건으로 계약을 하고, 볼라르 사후, 미완성의 뜻으로 사인하지 않은 작품 300여 점을 소송 끝에 돌려받게 된다. 조르주 루오는 돌려받은 그 그림을 전량 다 태웠다. 이때 소개된 조르주 루오의 말에서 그가 예술가로 존중받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소송 과정에서 돈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실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내게는 나의 예술이 무엇보다 소중하기에 미완성작을 어떤 일이 있어도 세상에 내놓고 싶지 않았다. 나의 예술가적 양심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작품들은 없어지는 편이 낫다”는 말이 울림 있게 다가온다.
발터 니그는 루오의 역작인 《미제레레》(58점의 판화 연작)에서 한 점을 뽑아 벽에 걸고 그 앞에 작은 촛불을 켜 두기를 권하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어렵게 퐁피두센터 소장 그림을 찾아 A4 용지로 한 점 출력해보니 액자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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