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숙, 『흉터의 꽃』, 새움, 2017.
- 1945년 사흘 간격으로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인해 히로시마에서 14만 명, 나가사키에서 7만 명의 사망자가 있었고, 그 중에 4만 명 가까이는 조선인으로 파악된다. 또 사망자의 몇 배나 되는 부상자와 방사능 피폭자가 있었고, 이 소설은 그 중에서도 조선인 피폭자의 삶을 다루고 있다.
조선인 피폭자 중 상당수는 경남 합천 사람이다. 피폭의 대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 피폭 2세들의 상황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이는 김형률(1970-2005)이다. 김형률의 부모가 합천 사람으로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하고 돌아왔다. 희귀한 폐 질환을 갖고 있던 김형률은 자신과 비슷한 피폭 2세의 사례를 수집하고 공유하면서 피폭의 유전성을 증언하며 비핵평화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 되었고, 합천 사람 김옥숙 작가의 이번 소설에도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이들 피폭 가족의 고통과 환후에도 불구하고, 2세 또 그다음으로의 피폭 유전성은 정부로부터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다.
소설 『흉터의 꽃』은 원폭으로 인한 참혹한 고통을 직접 겪은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원폭이 2세, 3세의 삶을 어떻게 지배했는가를 보여준다. 특히, 두 여자의 인생 서사는 피폭과 피폭을 부른 전쟁의 고통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해준다.
소설 속 강분희는 히로시마 원폭 때 온몸에 화상을 입고 얼굴이 흉하게 되었고, 귀국 후에도 화상 흉터로 인해 무시당하다가 결혼한 남자로부터 수시로 폭언과 손찌검을 당한다. 뱃속의 아이가 죽고 나서는 더욱 그렇다. 자신의 흉터에 꽃을 얹어주는 옛 연인(그도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다)을 만나 다시 가정을 이루고 딸, 아들 놓고 잠시 행복했지만 막내가 영문을 모를 고열로 죽자 다정했던 남편 또한 술을 먹고 술을 먹으면 손찌검까지 하게 된다.
박인옥은 강분희의 첫째 딸이다. 뼈가 약하고 다리 통증에 시달린다. 공장에 다니다가 남자를 만났지만 알뜰한 사람이 아니다. 첫째 아이가 뇌성마비로 태어나자 폭언과 폭행이 시작된다. 건강한 둘째가 태어났지만 남편은 바깥으로 돈다. 이후 재혼한 남자 또한 박인옥에게 빚만 남겨준다. 박인옥의 병명은 대퇴부무혈성괴사증이다. 피폭된 어머니로부터 나쁜 병이 유전되고 그걸 아들에게도 물려준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이 주도한 전쟁이 없었더라면, 미군이 투하한 원폭이 없었더라면 강분희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고, 그녀의 딸과 딸의 자녀 또한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또 한편 원폭과 별도로 두 모녀의 고통스런 삶의 여정엔 주변 사람들의 몰인정과 가정폭력도 존재한다. 전쟁의 비극과 함께 인간 행동의 부조리함을 깊이 파고들면서도 서사의 흥미를 놓치지 않는 것은 작가의 능력일 것이다.
작가는 애초의 소설 제목을 ‘검은 강’으로 잡았다고 한다. “상처 가득한 몸으로 돌아온 합천 사람들은 저 황강을 지켜보았다.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을 품고 황강은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합천 사람들의 눈물을 싣고 울음을 싣고 흐르는 강을 인옥은 오래오래 바라보았다”고 했으니, 황강 함벽루에 가면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도 누군가의 검은 눈물도 섞여 있으려니 생각할 것 같다.
소설 속 박인옥은 김형률의 뒤를 이어 원폭2세 환우회 모임의 주도적 인물이 된다. 박인옥의 목소리를 빌려 작가는 핵의 고통이 사라진 평화로운 세상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 씨를 뿌리고 누군가 거름이 되어야 할 텐데 이 소설도 그런 소임을 다하고 있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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