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범모, 『시인과 화가』, 다ᄒᆞᆯ미디어, 2021.
- 저자는 미술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역임한 미술평론가다. 저자는 시가 곧 그림이고 그림이 곧 시라는 말을 인용하며 문학과 미술이 상호 영향을 주며 새로운 창작의 세계가 열리는 경우가 잦다고 했다. 저자가 소개하는 시인과 화가의 만남을 따라가면서 김병기 편과 이상화 편의 몇 장면을 발췌해본다.
100세 넘어서도 화가로 활동했던 김병기(1916-2022)는 저자에게 시인 이상과 백석에 대해서 증언해준 사람이기도 하다. 이상은 일본에 와서 김병기의 하숙방에서 하룻밤 자고 간다. 그때 이미 이상은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빗소리 때문에 잠을 청하지 못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고 얼마 뒤 그의 부음을 듣는다.
김병기는 평양에서 어릴 적부터 동갑내기 친구인 문학수, 이중섭과 어울려 지내고, 도쿄 문화학원도 같이 다닌다. 문학수의 여동생 피아니스트 문경옥은 후에 백석과 결혼(1942년)하지만 이듬해 이혼한다.
김병기의 아버지는 김찬영이다. 김찬영은 고희동, 김관호 뒤를 잇는 유화가다. 평양 출신 김관호와 김찬영은 도쿄미술학교 일 년 선후배다. 두 사람은 1925년 결성된 서양미술 연구소 <삭성회(朔星會)> 활동의 주역이다.
저자는 이러한 평양 화단과 쌍벽을 이루는 미술 거점 도시로 대구 화단을 꼽는다. 대구 서양화의 흐름은 이상화 시인의 형인 이상정(1897-1947)으로부터 서동진, 이인성 등으로 이어진다. 1923년 서양화 연구소 <벽동사(碧瞳社)>가 이상정 주도로 설립되었고, 같은 해 대구미술전에 이상정은 <지나 사원> 외 13점, 이여성(이쾌대 형)은 17점을 냈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원화는 남아있지 않다.
또 대구 미술계의 대표적 그룹으로 저자는 <영과회>와 <향토회>를 주목한다. <영과회(零科會)>는 당시 스무 살 동갑내기 이상춘, 이갑기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1927년에 이은 1928년 2회 <영과회>전 참여자를 보면 대구를 미술 거점 도시로 꼽은 이유가 짐작된다. 이하 내용을 인용하면,
“제2회(1928, 4) 전시는 조양회관에서 개최한 바, 역시 양화부와 동요부로 나누어 다채롭게 꾸몄다. 화가의 경우, 이갑기, 이상춘, 김용준, 서동진, 박명조, 최화수, 배명학, 이인성 등 21명이 참여했다. 반면 동요부는 이원수, 윤석중, 방정환(찬조), 신고송, 윤복진 등 26명의 43점을 출품했다. 시가부는 이원조(이육사 동생) 이외 찬조출품으로 이상화, 김용준, 최화수 등 6명의 11점을 출품했다. 근원 김용준의 참여는 눈길을 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옹호했다가 이내 예술의 순수성을 옹호한 1930년대의 미술이론가이자 화가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상화라는 이름이다. 지역 문화 예술계의 단체 활동에 이상화 역시 새로운 문화운동에 동참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런 토대 하에 1930〜40년대 이쾌대와 이인성이라는 유화계 대표 화가가 나올 수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두 화가는 수창초등학교 동기이기도 하다.
공초 오상순과 교류했던 화가 하인두의 편에선 하인두가 쓴 책에 기대어 오상순과 하인두의 부산 시절, 대구 시절이 언급되어 있다. 오상순은 세수할 때도 담배를 끄지 않았다고 했으며, 대구 시절 덕산동 초가 두 칸에 대구 보살(부산 여자)의 식객이 되어 있던 곳을 상록암이라고 이름하며 한시절을 지나왔다고 한다.
시인과 화가의 숨은 이야기는 꺼내보는 재미가 있다. 그런 중에 <영과회>의 몇몇 멤버처럼 까마득히 잊히어 가는 이름 앞에서 기억하고 기록하고 호명하는 작업들이 소중해 보인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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