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1945- , 함남 흥원)
1945년 함남 흥원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에서 성장했다. 연세대학교 영문과 및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재직하고 있다.
1968년 '사상계'신인 문학상에 '순례자의 집'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주요 시집으로는 '허무집'(1971), '풀잎'(1974), '빈자 일기'(1977), '소리집'(1982), '붉은 강'(1984), '우리가 물이 되어'(1986), '바람 노래'(1987),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1989), '벽 속의 편지'(1992)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는 '붉은 강'(1984), '누가 풀잎으로 다시 눈뜨랴'(1984) 등이 있다.
신경림이 말하기를,
"강은교, 그는 마력의 시인이요 주술의 시인이다. 강은교에게 있어 허무는 윤회사상으로 발전하고, 윤회사상에 바탕한 그의 시는 어느새 주술적 가락을 따게 된다. 구체적 삶의 형상화 속에 문득 죽음의 예감을 삽입시키기도 하고, 죽음의 음각 위에 사랑의 환희를 영사(映寫)시키기도 한다.
이 주술적 가락 속에서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언어들, 예컨대 뼈 살 물 모래 등은 해체된 삶의 무의미한 모습, 삶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허무의 실상, 의지와는 무관하게 형성진행되는 인간의 운명 등을 각각 상징함으로써 그의 시 자체를 영매적, 주술적인 것으로까지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강은교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시는 아무래도 ‘집중’이다. 김수영이 말한 ‘집중의 동물’이 시이다. 내가 동물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명사를 붙이는 이유는 잘된 시의 대상은 항상 꿈틀거리는, 살아 있음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지 않음은, 꿈틀거리며 살아 있지 않음은 우리를 끌어당기지 못한다. 잘된 시 속에서 한 마리 게는 살아서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으며, 한 마리 개미도 살아서 땀을 뻘뻘 흘리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김씨도 그 순한 얼굴로 한숨 쉬며 살아 있으며, 한 송이 꽃도 이슬을 튕기며 살아 있는 까닭이다. 당신의 시작 공간은 늘 살아 있다. 살아 있어야 한다. 살아서 움짓움짓 변형되어야 한다.
그렇다. 시는 동물이다. 그건 살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적당한 언어를 거기에 붙여주기 전에는 모래알에 불과한 살아 있음이다." 라고 했다.
아래는 김강태의 글을 줄인 것이다.
[ 그녀는 나와의 대화에서 ‘투약’의 고통을 토로한 바 있다. 너무 심한 고통스러움에서 진정 벗어나고 싶었고 또 지금도 벗어나고 싶다고. 이 약은 현재까지 그녀에게, 하늘이 내린 원초적 형벌(=天刑)을 다스리는 섬뜩한 독극물이자 효험있는 유일한 생명선(!)이다.
그녀는 외롭지만 그래도 혼자 산다. 시인이자 정치 지망생인 ‘남자’와는 연전에 헤어졌고 딸이 서울 H대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근황과 심경이 더욱 알고 싶어졌다. 조바심쳐진 것이다. 그녀에게 삶의 빛이 있을까. 있다면 얼만큼?
"(스물 일곱 해를 맞은) 1972년 2월 21일 아침, 나는 이상한 초조와 불안으로 집안을 서성대고 있었다. 빨래통에는 지난 일요일 했어야 할 빨래들이 지저분한 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씻어 주기를 기다리는 아침 식기들, 옷가지들이 흩어져 있는 방, 아파트 전체를 흔드는 소음, 건너집의 세수하는 소리, 문 닫는 소리, 또 아침 햇빛에 더욱 들끓어보이는 먼지들……. 게다가 임신 6개월이 넘은 내 몸은 꼭 오뚜기 인형 같았다. (…중략…) 어느 일부터 해치울 것인가를 망설이다가 우선 빨래부터 하기로 했다. 빨래는 가끔 신경안정제의 구실을 한다고 어느 심리학자가 말했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사실이다. 수도꼭지를 틀고 가득 차 있는 물 속에서 옷들을 뒤흔드는 쾌감, 나는 10시에 출근하려는 작정으로 일을 서둘렀다. 그런데 마지막 빨래를 헹구고 나서 세수를 하려고 급히 세면대의 물을 트는 순간, 나의 머릿속에서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사고였다. 뇌동맥이 끊어진 것이다. (…중략…) 의사는 확정된 나의 병명을 부드럽게 말해 주지 않았던가? <A. V. Malformation>.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선천성 뇌동맥 정맥 기형畸形>.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살아온 것이 기적이다. 언젠가는 터질 핏줄이었으니까.(…중략…) 나의 아기들, 그 아기 중의 하나가 나와 살기 시작한 지 일곱 달이 되는 지난 1972년 12월에 떠나갔다.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그이와 나는 우리의 남은 가난한 재산을 다 바쳤지만 구할 수 없었다. 그 아이의 불확실한 목숨은 이미 우리의 권한 밖에 있었다. 지난 1972년 11월부터 떠나기까지 두 번에 걸친 그 아이의 입원은 나에게 또 한번 투병의 아픔을 안겨 주었다./세상에 나서 인큐베이터 속에서 3달을, 나머지 짧은 시간을 우리와 함께 산 그 아이의 목숨, 산소호흡기로 호흡했고, 사물의 이름 하나도 발음해보지 못한 채 갔다."《누가 풀잎으로 다시 눈뜨랴》, 문학세계사, 1984, 251∼265쪽 발췌.
A. V. Malformation. 선천성 뇌동맥 정맥 기형. 응급수술을 했으나 머릿속 터진 핏줄 하나는 도저히 봉합할 수 없어 다시 닫았다. 한 개는 현재도 약으로 다스리고 있지만 언제 또 터질지 모른다. ‘뚝’ 소리, 그 소리가 절대 울려나오지 말아야 한다! 그녀가 20대에 삶의 큰 파고(波高)를 넘어 부산에서 대학 선생으로 있기까지, 그녀를 버티게 한 건 문학과 혈육인 외딸이리라. 그러나 어쩐지 그녀의 눈에서 불안감이 보인다, 전율이 언뜻. ‘전율戰慄’에 대해서 음미할 글이 있다. 그녀는 매주 수요일마다 연재하는 글에서 ‘예술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힘’을 <전율>이라고 표현한다. 전율을 느꼈다는 것은 ‘정신의 피(血)적 스파크를 일으킨 것’이라고. 끈적끈적. 시의 시작은 중학 시절 박두진의 <해>라는 ‘시의 리듬과 리듬이 주는 시의 긴장’을 통해서 비롯했고, 일종의 경련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전율:긴장↔경련, 그들끼리의 요란한 충돌, 마지막 단계인 소외 의식. 이 선상에서 시인은 말한다. ‘모든 예술은 소외의 힘에서 창조된다’고. 내게는 진실로 외롭고 고독해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이처럼 극한의 단계에서 누적된 혈액이 불특정하게 튀었으니 뇌동맥·정맥이란 실핏줄이 운명적(선천성)으로 터질 수밖에. 고감도 전율의 여성 강은교.
은교는 말을 잇는다. 카프카처럼 한 시대를 꿰뚫는 눈을 가진 내면적인 작가가 되고 싶다. 카프카는 이 시대에 가장 사랑받는 작가가 아니던가. 그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했지만 한편으로 대단한 리얼리즘을 추구하지 않았던가, 열변하는 은교 시인의 눈이 나의 한쪽을 직시한다. 곧 부끄러워진 나는 옷깃을 여민다. 질 들뢰즈는 당대의 카프카를 ‘매우 정치적인 작가’로 취급했다 한다. (실상 카프카는 당대를 가장 치열하게 부딪치며 산 작가가 아닐까.) 실제로 그녀는 초기에 삶과 죽음의 문제로 고독과 허무의 줄기를 온몸에 칭칭 감으며 살았다. 1970년대는 관념적인 허무를 사랑하기도. 뭇시인들은 그래서 은교를 허무와 민중 사이에서 고독을 은밀히 즐겨온 시인으로 읽곤 한다. 어느 모로는 양면성을 띠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녀는 홀로 있기를 좋아한다. 나다니는 경우가 거의 없다. 피곤해 부산역 너머로 가기조차 싫어한다. 교통난은 이곳도 서울만큼이나 엄청나다. 가끔 대학원생의 안내로 등산을 한다. 지난 해 정월 초하루는 토함산으로 해돋이를 보러갔었다. 새벽 4시 출발, 경주 톨게이트 앞에서 떠오르는 맑은 해를 보았다, 박동이 컸다, 경이로움이었다. 올해도 남해 바닷가로 일출을 보러갔지만 날이 흐려서 아쉬웠다. 수술 이후부터 신경안정제인 딜란틴·바리움을 복용했다. 후유증 탓이다. 그러다가 또 대경련에 빠져 얼마 전에 테그레톨이란 약으로 바꿨다. 이 극약(?)들은 너무도 독해 그녀로 하여금 몇번이고 자살을 시도하게 만든다.
아기 때부터 그녀는 지나치게 똑똑했다. 그게 흠이었다. 1945년 12월 13일,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나 100일 만에 어머니 등에 업혀 서울로 월남할 때, 러시아 병사의 총이 겨눠진 틈을 비집고 빠지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가만히 말한다. 울지 말아라. 아기 은교는 무서웠지만 울음을 꾹 참는다. 그래서 온 가족이 무사할 수 있었다. 경기여고 시절, 그녀는 안타까울 정도로 공부벌레였다. 수영 시험이 있었는데 공부 때문에 별로 연습치 않았지만 독하게 헤엄쳐 점수를 받는다. 요새도 수영장을 간헐적으로 다니는 중. ‘옷을 벗는다는 기쁨’(?) 때문이란다. 이 무한한 자유에의 갈망! 스케이트 시험도 있었지만 잘 타지 못했기에 기어가서 라인을 통과(시험도 통과)한 지독한 여고생이었다. 영문과에 들어가 엘리어트·딜런 토마스·버지니아 울프·김수영 등에게 곧 빠진다. 김수영은 그러나 너무나 빠른 한계를 인식시켜주어, ‘너무나 사랑했기에’ 금방 그의 곁을 떠난다.
그러다가 연세문화상 수상(1967)·월간 <사상계>로 등단(1968)·<샘터>에 입사(1970), 김형영·정희성 시인 등과 <七十年代> 동인을 만들어 활동하는 중에 동인회에서 첫시집 《虛無集》(1971)을 발간한다. 그들은 겁 없었다. 당시 잘 나가는 《현대시》와 《신춘시》를 예리하게 비판하고 틀에 박힌 시로부터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인다. 칼릴 지브란K. Gibran의 《예언자》를 문예출판사에서 출판(1975)하고, 에밀리 디킨슨E. Dickinson 시선을 번역(1976), 민음사에서 냈다. 그리고 동아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1983)되면서 긴 여정을 끝내고 부산에서 삶의 닻을 내린다. 그 해에 인도를 처음으로 여행. 오랜 동안 칩거한 탓인지 수상은 적은 편으로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1975)과 제37회 현대문학상(1992)을 받았다.
그녀는 이제 토마스 만의 역사소설도 가치를 상실했다고 생각해서, 이상(李箱)을 다시 읽게 된 기쁨을 누리고 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단어 하나 줍기를 갈망, 집착하기도 하고 ‘현재가 나를 만진다. 나는 현재를 만진다’는 해법을 깨닫고 ‘현재’를 진실로 사랑키로 했다. 다음 시는 낯선 현재들 아래 놓여 있는 연민의 대상을 그리고 있다. 차암 따뜻하다.
거기/ 눈썹이 검은 아들과/ 가슴이 두꺼운 어머니와/ 깊은 어깨의 아버지/ 그리고 목이 긴, 붉은 딸이/ 있을 것이다/ 그림자 하나씩/ 따뜻이/ 메고 있을 것이다
― <불빛> 전문
그리고 이름 없는 꽃이거나 틈도 좋아한다. ‘허공의 방’에 안주하기를 원한다. 산문집 《허무수첩》엔 ‘허무, 그 출렁이는 뼈에게 바침’이란 구절이 나를 사로잡는다. 허무를 출렁이는 뼈라니. 뼈가 출렁인다니. 그녀의 허무주의에 대해 평론가 이영섭(경원대)은 말한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억압된 외부적인 사회 현실의 상황 속에 젊은 시절 그의 허무주의는 올바른 삶을 지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현실 대응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허무주의는 삶이 위기에 처했을 때, 과도기적인 대응 의식으로서의 존재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현실을 벗어나 관념적인 미망에 빠질 때 위험천만하지만 강은교 시에 그런 위험은 없다는 전제도 함께. 그럴지도 모른다. 김형영도 《소리집》 해설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은교는 허무를 두려워한다. 그는 허무라는 공간 속에서 홀로 견딜 수 없는 시인이다. 무언가와의 만남, 화해, 그리고 출발해야겠다는 것에 은교의 진실이 있다’고. <불빛>과 같은 온기(溫氣)를 그녀가 갖고 있음에랴.
아버지는 이승만 정권 시절 정부 각료를 지낼 정도로 한때 집안이 쟁쟁했다. 그전에는 조선일보 기자직에도 있었다. 春山 강인택. 《개벽》지 운영에도 관여했다고 한다. 기억에, 당신의 도교사상이나 정치철학을 연재하기도. 아버지가 바로 자신의 문학 선생이었다고 실토하는 그녀. 은교는 1968년 코스모스 졸업 시 단 두 명이었는데, 30년 전의 그 동창을 우연히 만나 차를 나누는 자리에서 흥미로운 이야길 듣는다. 여대생일 때 그 친구와 마주한 술자리에서 ‘난 꼭 시인이 될 거야’라고 외쳤다는데 자신은 전혀 기억이 없다고. 그렇지, 취하면 필름이 끊기니까. 대학 재학 시 교사가 되고 싶어 교직을 들었으나 F학점을 받게 될 처지. 학점을 따고 싶어 담당교수에게 가서 당돌히 ‘신춘문예에 투고할 시를 쓰느라고 공부를 못했어요’라고 했더니 ‘그럼 그만 두라’고 냉정히(당연하지!) 말해서 그 길로 수강을 그만두었다는 姜고집.]
부산에서 가진 문학토론회에서
▲최영철=20년간의 부산 생활이 강 시인의 시세계에 어떤 변화를 주었나.
▲강은교=서울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를 쓴 적이 있다. 물론 그것은 관념의 바다였다. 부산에서의 삶은 구체적인 것이고 자연히 나의 시도 구체화됐다.
▲최영철=강 시인의 최근 작품은 사회이슈에서 비켜나 있는 것 같다. 시인이생각하는 시와 현실의 거리는.
▲강은교=솔직히 말하면 나는 현실이 생살로 드러나는 것을 피한다. 나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합일을 꿈꾸고 있다.
▲김경복=강 시인의 시론 제1장이라면 ‘시는 전율이다’가 아닌가. 시인의 초기 시는 마치 접신상태, 물아합일 상태에서 터져나오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 요즘은 따뜻하나 감동은 덜한 것 같다.
▲강은교=잘 보았다. 그것은 아마 초기 시절보다 살기 편해져서 그런 것 같다. 새삼 ‘결핍이 없으면 문학도 예술도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이런 점에서 내가 아직 뇌수술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조금만 약먹기를 게을리하면 경련이 일어난다. 경련이 나의 시에 전율을 불어넣길 기대한다.
▲최영철=우리 시는 음악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다. 강 시인은 시의 음악성 회복을 위해 어떻게 하나.
▲강은교=낭송해 보고 원고지에 손으로 써 본다. 강영환 시인과 함께 매월시낭송회인 ‘시바다’ 행사를 열고 있는 것도 이런 차원이다.
▲김경복=강 시인의 여성성과 다른 페미니즘 작가·시인들의 그것과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강은교=내 시의 근간을 이루는 허무(虛無)는 초기 창조적 가치에서 요즘은 생명성을 지향하고 있다. 따뜻하게 보듬고 쓰다듬는 모성애적 여성성이다. 다른 페미니즘 작가들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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