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1933-, 전북 군산)
고려의 이규보나 조선조 김시습, 아니면 <대한민국 시인> 김관식이 이 정도의 광풍이었을까? 사방팔방으로 미쳐서 속수무책으로 펄럭여대는 바람이면서도 끝내 잠들지 않고 깨어나 백수십 권의 책을 내고 앞으로도 그 이상의 책을 쓰겠다고 장담하는 사람. 시인 고은.
후배 시인 김승희의 표현대로라면 그는<우리당대에 가장 이름 붙이기 어려운, 이름붙일 수 없는, 명명불가한 에너지의 한 현상. 1960연대 그 밑도 끝도 없는 소문 속의 허무주의의 괴수,그로테스크한 악마주의자, 연이은 자살 미수자, 유미주의자, 청진동의 음산하고도 현란한 스캔들의 극치, 그런 것에서 꽃 피어난 귀면<鬼面> 아니던가.
그의 말은 거침없었고 급격했고, 때로는 간단없이 논리를 초월했으며 슬며시 신비주의로 채색하는 황홀이 있었다.
'내가 낸 책이 몇 년 전에 백 권을 넘었다. 이젠 몇 권째인지 세는 것도 그만둔 상태다. 요즘은 힘을 절약하기 위하여 하루에 원고지 50장씩만 쓰는데, 맘껏 쓴다면 하루에 200장도 더 쓸 수 있다. 카프카나 이용악 같은 과작만이 작가의 운명은 아닐 터이고, 과작에 대한 상대성으로 나에게 다작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나로서는 응당 그렇게 써야만 하는 것인데, 앞으로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버리고 철이 들기 전에 새로운 것들을 쓰려고 한다. 하얗게 비어 있는 원고지는나를 줄창 설레게 한다.'
우리 시대 문장가들 중에서 고은을 수식하는 한마디 말을 내어놓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고은의 시를<누이 콤플렉스>로 설명했다가 십수 년 후에 고은에게는 누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홀딱 속았던 김현은 그를 <전설>이라 표현했고 정현종은 <환희의 폭발>이라 했으며 이문구는 <집대성>이라 한술 떴다. 1960년대 여대생들에게 는 <성(聖)고은>이었고 한국 문단사에 가장 방창했던 시절로 기록되는 청진동 시대에는 <공부 김우창, 감성 고은>이라는 아포리즘이 인정되었으며, 남도 여기저기에 가짜 고은이 출몰했던 신드롬의 사나이.
그는 시인으로의 데뷔부터가 하나의 거대한 허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웃에 사는 머슴에게서 글자 몇 개를 배워 책을 읽어버림으로써 근방에서 5세 신동으로 뜨르르했던 고은은 월반을 거쳐 군산중학에 수석입학을 하여 화가 꿈을 키우다가 한하운의 시집을 읽고 <문둥이 시인이 되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꿔먹었다.
그때 한국 전쟁이 터졌고 한 마을 사람들이 좌와 우로 나뉘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을 보았다. 마을 청년들의 지시로 생매장했던 시체들을 짊어지게 되면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을을 정처없이 쏘다니는 그를 본 어른들은<신동이 아깝게 됐다>고 한마디씩이다. 어느 날에는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가 살아 돌아왔고 엿장수나 거지가 되어 살기도 했으며 중학교 중퇴 자격의 신분으로 중학교 교사에 특채되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개체의 극명한 실존과 정신의 극점에서 서성거려 본 자에게 일상은 하릴없는 것. 남도 어디에서 땡추를 만나 따라 나섰다가 출가로 이어졌으며 52년 법명 일초(一超)를 얻었다. 10여년을 수도생활을 하던 중 6천도로 부글부글 끓는 신열을 이기지 못하여 산을 내려왔다.
그 시절 결핵을 앓고 있던 친구를 위하여 <폐결핵>이라는 시를 한 수 만들어 주니, 이 친구가 시인도 모르게 한국 시인협회에 투고를 하여 조지훈의 천거로 고은은 문단에 데뷔한다. <폐결핵>, <작별> 등 그의 초기 시를 관통하던 누이. 동생을 간병하다 폐결핵에 전염돼 세상을 떠났고, 동생은 그 유골을 품에 지니고 다니다가 어느 날 다도해 앞바다에 뿌렸다는 전설의 누이. 그러나 고은은 그 십수년 후에 <내게 누이가 없었다>고 고백함으로써 평론가들을 실로 당황하게 만든다.
'당시 외삼촌에게 들었던 낭만의 벌판 만주와 함께 누이는 나를 지탱시켜 주는 허구였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산야 위의 삶과 죽음마저도 신성한 것이 되지 못하고 있었을 때, 이런 산야를 떠도는 내게 있어 허구는 하나의 실존이었다.'
자살 계획을 세워 목포발 제주도행 배를 탔지만 뜻대로 되지 않음으로써 공동 묘지에서 나날을 보낸 4년의 제주도 시절과 그 이후 파괴주의와 허무주의로 광란의 나날을 보냈던 청진동 시절. 이때를 김승희는 <표현할 길 없는 공포와 황홀감에 사로잡힌 디오니소스의 신자들이 원시라고 하는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는 창조력을 해방시킨 허무와 환희의 축제 비슷한 장면들> 이라고 기록한다.
기습적인 키스공세, 관란의 원맨쇼, 시도 때도 없는 자살 소동, 무자비한 취중 구타, 발가벗고 춤추기 등 <또라이 짓거리>의 모든 것. 일찍이 한국 문학사에서 사례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독창적이게 광란 추태이면서도 <세노야>등 한번 썼다 하면 남들의 기를 팍팍 죽이는, 그야말로 <흐르는 강물도 멈춰 세우는> 언어의 마력. 그날도 역시 청진동 술청 에서 늘어지게 잤다. 지난밤에 있었던 광란의 카니발을 증명하듯 뒹굴고 있는 술병들. 구겨진 신문지의 끄트머리에는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자결 소식이 살짝 실려 있었다. 자살 소동을 밥먹듯이 벌여온 룸펜 인텔리겐치아에게 한 노동자의 분신은 일대 충격이었다. 그 순간 그의 몸은 벌떡 일어서졌다. 내달았다. 허무와 퇴폐와의 절연한 결별이었다. 빼앗기고 절단나고 피흘리고 묶인 내 역사와의 찬란한 만남이었다.
<시가 국가보다 높은 것이기 위하여 나는 시를 쓴다.> 유신 독재와 함께 시작된 그의 투쟁은 축적된 광란의 경험에 힘입어 또한 그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유실천문인협회의회 초대 간사, 민주회복 국민회의 문인대표,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부회장, 국가보안법 위반의 단골 손님, <김대중 내란사건> 주모자,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상임공동대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의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 그리고 지금은 무감투. <김대중사건>으로 사형이 구형됐던 그는 1982년 8.15일 특사로 풀려 나왔고 다음해 5월 안병무 박사댁에서 중앙대 이상화교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문영 고려대 교수가 어느날 <고은 선생 살라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장소를 내가 지금 보고왔다>는 말이 멋져 즉석에서 응낙하고 지금의 안성 집으로 살러 왔다.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였다. 이곳에서 저 유명한 <만인보>와<백두산>이 터져나왔다.
마정리 벌판에서 그는 자신을 농부에 비유했다. <나는대지를 가지고 있다. 내 마음 속에는 우주와 통하는 천문대가 있다.>
이상의 내용을 작서한 원기록자는 알 수 없군요. 아래는 <나의 시가 걸어온 길>이라는 제목으로 고은 시인이 문예진흥원에서 이야기한 내용 중 일부입니다.
[저는 시를 쓰지 않을 때에는 폐인에 가까운 존재가 됩니다. 때때로 세상에 대해 판단 정지 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또 아주 멍청해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시 한 편이 나오면 눈이 번쩍거리고 뭔가 살아야겠다는 용솟음 같은 게 차오르곤 하죠. 시를 쓴 뒤에는 뭔가 멍해져서, 마음 속의 지평선을 막막하게 바라보곤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시는 물론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너무 많은 이론의 밀림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그런 이론을 필요로 합니다. 좀더 올바른 길을 가고 올바른 시야를 획득하기 위해서, 이론에서 여러 가지를 얻어 와야 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삶이나 문화, 혹은 시에서, 이론은 모종의 장애가 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시와 이야기하고 시와 더불어서 세상을 좀더 엿볼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아무쪼록 이론보다는 여러분 가슴속의 시의 친구, 시의 연인, 시와 함께 오래 있어온 동행자들을 불러내 보기를 권합니다.
(략) 이런 울음이 나한테는 오랫동안 있었어요. 지금도 조금씩은 있지만 울음이 10년씩 가다가 그 다음에는 불면증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껄껄걸 웃으면서 얘기하곤 하는데, 전에는 전혀 이런 걸 용납하지 못했어요. 웃음은 위선자 아니면 생을 거짓으로 살고 있는 자들의 소유물이고, 사람들이 행복해 하고 웃고 하는 것은 속물들이나 하는 짓거리로 여겨져 이해를 안 했어요. 불면증이 10년이나 갔어요. 잠이 안 오니까 밤 12시쯤 되면 막소주를 김치를 안주 삼아 마시곤 했지요. 그 때 술이 취해 있으면 이 세상에 내가 최고의 시를 쓴 것 같았는데, 다음날 낮 2시쯤 깨어서 보면 가장 졸렬한 시였어요. 밤에 술에 취해서 과장이 되었다가, 다음날 낮이 되어 과장이 다 꺼지고 나면 처참한 패잔병처럼 남아 있는 게 내 작품인 걸 많이 겪었죠.
이렇게 10년쯤의 세월을 보내다가 1970년의 어느 날 한 노동자의 죽음을 신문 기사에서 봤어요. 지금은 서울 무교동 골목의 낙지집들이 거의 없어졌지만, 그 때는 시뻘건 낙지에 곁들인 소주, 아주 맵고 짜고 독하고 이런 것만이 위안이 됐을 때지요. 통행 금지가 있을 때니까 술자리가 길어지면 술 탁자에서 자다가, 떨어지면 시멘트 바닥에 뻗어서 자곤 했습니다. 나중에 70년대, 80년대 들어 민주화 운동으로 조사 받으러 다니고 잡혀가서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재우고 할 때 그런 데서 훈련받은 게 도움이 되었어요. 좋은 침대에서만 잤더라면 7, 80년대를 겪어내는 데 좀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 데서 인생을 막 굴렸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요.
70년대 한 노동자가 청계천에서 '일꾼들도 사람이다'는 말을 하면서 기름을 붓고 태워서 죽었는데, 그 때 나는 늘 내 죽음만 생각했어요.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나, 나 같은 게 이 세상에 쓸모없이 태어났나, 나는 빨리 이 세상에서 끝나야 할 존재다'라는 둥 늘 죽음을 생각하고 실천하다가 실패하곤 했었죠. 그랬는데 그 때 이 노동자의 죽음이 신문에 났어요. 이 자가 죽었는데 뭐냐 하며, 내 죽음하고 견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슬슬 그 사람의 죽음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그 죽음의 환경이 되어 있는 우리 현실이 확 나한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불면증이 없어졌어요. 잘 자고 코도 잘 골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는 등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60년대 초반 제주도에서 3년을 산 적이 있는데, 원래 그 때는 살러 간 게 아니고 제주도 바다에 빠져죽으러 갔다가 너무 취해서 죽는 걸 잊어 버렸어요. 가방 속의 큰돌에 로프를 묶어가지고 내 허리에 묶어서 저 깊이 심해로 들어가, 안 떠오르도록 하려 마음먹었지요. 제주해협이 그때처럼 호수처럼 거울처럼 된 적이 없었습니다. 파도가 부드러워진 걸 젠틀 웨이브(신사 파도)라고 하는데, 그보다 더 거울 같았습니다. 때마침 달은 비치고 미칠 것 같았습니다. 배 안의 매점에서 파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아무 명징한 이성만이 발달했습니다. 내가 죽음의 앞에 있으니까 술조차도 거절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바다의 공기가 좋아서 그렇게 취하지 않았다더군요. 계속 마셔댔는데 취하지 않고 결국 쓰러져 버렸지요. 부우 하는 뱃고동 소리에 깨어나 보니까 항구였습니다. 그래서 돌을 매고 죽는 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리며 제주에 살게 되었지요.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다음에 읽어드릴 시의 배경의 일단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70년대를 지나면서 옛날의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해 8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90년대에 들어서 그 두 가지 다른 방법을 종합해서 다른 시세계를 지향하려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그 동안 여러 세상을 다니기도 하고 여러 유혹도 있었습니다만, 나는 내 조국의 기호로서 살고 있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모국어는 참으로 심란스러운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는 주장에 이어, 심지어는 우리말을 없애 버리고 영어만을 쓰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저러면 저런 주장들이 나왔겠는가 이해를 하는 편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계가 열려진 상태일수록 우리 민족의 실체를 유지해준 우리 모국어는 꼭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더라도 우리 모국어를 지키는 한 전사가 될 생각입니다.
우리말 없이는 세상과 만날 수 없습니다. 세계화는 결코 단일한 구조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세계를 하나로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만,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의 것을 가져야 됩니다. 세상은 여러 민족, 다른 성, 다른 얼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다(多)'라고 하는 것은 하나하나가 살아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도 다문화 정책을 쓰지 않습니까. 이런 때 우리 것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면, 민족 이하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맙니다.
졸시 '폐결핵'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시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던 화가 친구에게 준 것입니다. 이십대에 이미 조선일보사의 현대작가 초대전에도 초대받은 친군데, 그가 막 출범한 현대시인협회에 보낸 것입니다.
"누님이 와서 이마맡에 앉고,/외로운 파스 하이드라짓드 병 속에/들어 있는 정서(情緖)를 보고 있다./뜨락의 목련이 쪼개어지고 있다/한번의 긴 호흡이 창의 하늘로 삭아 가버린다./오늘 하루의 이 오후에/늑골(肋骨)에서 두근거리는 체온의 되풀이/머나먼 곳으로 간다/지금은 틀거울에 담긴 기도와/소름 끼는 아래얼굴,/모든 것은 이렇게 두려웁고나./기침은 누님의 간음(姦淫),/언제나 실크빛 연애나/나의 시달리는 홑이불의 일요일(日曜日)을/누님이 보고 있다/누님이 치마 끝을 매만지며/화장(化粧) 얼굴의 땀을 닦아 내린다"
이 시는 현실과 허구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말하자면 현실과 허구가 서로 섞여 버린 것이죠.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화가 저도 모르게 역사로 돌아오고 역사인가 하면 다시 신화의 세계로 가는 걸 봅니다. 다른 나라의 상고사를 보면 어느 날은 전설이었다가, 다시 역사로 오고 하는 걸 봅니다. 현실과 허구가 분화되지 않은 어떤 미칠 듯한 애매몽롱한 아주 불확실한 상태죠.
우리가 세상살이를 해나갈 때는 대체로 이분화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허구는 따로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지금 진행되고 있고 이렇죠. 이 시는 허구이자 또 하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저는 폐결핵에 걸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60년대까지만 해도 폐결핵이라면 민법상 장가 가고 시집갈 자격도 없는 병이었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민법상의 질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기침하는 소리가 좋았습니다.
평론가들 사이에 '고은의 누이 콤플렉스'라는 말이 오갔습니다만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십이 넘어서 건강 진단을 해보았는데, 그때 비로소 한쪽 폐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떠돌고 술만 먹고 하는 사이에 폐결핵이 찾아왔다가 떠나 버린 거지요. 그런 걸 보면 내가 염원하던 허구, 그것이 나중에 현실로 된 것입니다. 한 시인의 꿈이 냉엄한 현실로 진행된 거지요. 이것이 곧 문학을 이해하는 비밀이라고 생각합니다.
(략)저는 돌아보면 폐허의 자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존적인 허무가 좋아서 60년대적인 허무를 간직하고 살다가 70년 벽두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것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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