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밭을 기억한다/ 정이랑
고구마 푸른 줄기처럼 뻗어가는 매미 울음소리
오동나무 싱그런 겨드랑이에 끼워 넣고
아버지의 꽁무니 붙어 몰래 찾아든 텃밭
아무렇게나 떠다니는 고추잠자리 날개 위에 얹혀가면
잃어버린 나를 만날 수 있을까
땅 위 내려앉은 둥근 알들 줍고 계시는
아버지, 애벌레같이 꿈틀대던 눈물의 그림자여
보았던가, 한 가지 생각 품고 살아온 대추 속의 붉은 씨앗
그의 무르팍 휘어잡고 기어오르는
나팔꽃은 어제의 자화상일까
멀대같은 허수아비 되어 서있는 나
무어라 무어라 꾸짖는 바람의 몸짓
모쪼록 비어있는 손바닥일 때
천근의 마음까지 헹구어 하늘을 본다
기름 바른 듯 윤나는 풋풋한 별들
어쩌면 아버지의 둥근 알이었을까, 나는
입 속에 한 알 밀어 넣으며 순간
한그루 나무되는 꿈을 꾼다
-『떡갈나무 잎들이 길을 흔들고』 수록
- 객지 생활을 하던 화자가 시골 고향에 내려왔나 보다. 각박한 도심의 생활로부터 얻은 천근의 마음도 같이 따라왔다.
대추밭에 이르러 걱정 없던 유년이 떠오르면서 화자는 조금씩 마음을 추스른다. 대추나무에서 대추를 줍던 아버지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자신이 곧 나무를 칭칭 감고 오르는 나팔꽃 같은 존재였음을 안다. 그렇다고 이 시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화자의 부채의식을 말하는 건 아니다.
대추나무가 단단히 품었던 씨앗처럼, 아버지가 올곧게 품었던 자신을 느끼는 순간, 이전에 뿌리 없이 흔들렸던 화자의 무거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보라. 천근의 마음을 헹구고 새로 부푸는 마음이 된 것이다. 세상이 모서리를 들이댈수록, 자신이 씨를 품은 나무의 꿈이었음을 떠올려보면 좋겠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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