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상상동물 이야기 12 / 권혁웅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0:11

상상동물 이야기 12

- 구비키레우마 / 권혁웅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는 목 잘린 말 이름이 구비키레우마다


술 취한 자신을 태운 말이 발길 끊은 정인(情人)의 집에 도착하자, 김유신은 주저 없이 말의 목을 쳤다 술에 절어 옛 사람의 집 번호를 누르는 이들이 가끔 있다 그 사람을 이어 준 게 말이 아니라 손가락이었다면 김유신은 손가락을 잘랐을까?


구비키레우마는 네거리에서 자주 목격 된다

도무지, 어디로, 어떻게든,

갈 데가 없는 것이다 짐작하시겠지만

이 말은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다


-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수록



- 핑계 없는 무덤 없듯이 목 잘린 말도 다 사연이 있을 법한데 공통점은 스스로 자르지 않고 누군가에게 의해 날카롭게 베어졌다는 것이다.

  김유신의 명민한 말은 술 취한 주인의 속마음을 알기에 사랑하는 여인 곁으로 주인을 인도했다. 그 대가로 목이 잘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이 출세하는 데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미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 없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 상대였다. 칼을 잡은 김유신의 마음이 편하기야 하겠는가마는 사랑을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눈물 한 방울 남기는 일이었다.

  혼자 남겨진 여인은 말의 목이 날아간 순간, 자기 목을 확인했을 것이다. 김유신이 벤 것이 그녀 자신인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울음도 제대로 놓지 못하고 방안에서 무너지고 천지사방 헤매는 여인은 구비키레우마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여인에게 자신을 데려간 것이 말이 아니라 자기 손가락이면 과연 ‘손가락을 잘랐을까?’ 화자는 묻고 있다. 아마 자르지 못했을 거다. 그 남자는 자기를 사랑하므로. 이 세상에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중의 상당수는 자기애의 변형에 불과한지 모른다.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사랑한다는 자기 마음을 사랑한다. 물론, 자기애 역시 건강한 사람의 지표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는 남을 사랑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지나친 자기애와 욕망으로 말미암아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 그런 상대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리고 그 상처를 통해서 많이 깨닫는다. 그 깨달음의 일부를 시인은 우의적으로 읊고 있다. 상처나 고통이 자신을 가두기도 하고 더 성장하게도 하겠지만 칼날 앞에 서거나 그 칼날이 지나는 몸을 느끼는 건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

  ‘구비키레우마는 네거리에서 자주 목격 된다’고 한다. 칼날에 베인, 불에 덴 듯한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속으로 깊게 파고든 상흔일수록 바깥으로 내놓고 아물게 하는 게 상책이다. 세상은 목 없는 사람끼리도 서로 비비고 살게끔 되어 있다.(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섭이국(攝耳國)/ 나병춘   (0) 2010.08.30
설마雪馬/ 홍해리   (0) 2010.08.30
산을 그리며/ 임보   (0) 2010.08.30
바람벽/ 이사랑  (0) 2010.08.30
마늘촛불/ 복효근   (0) 2010.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