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어섬에서/ 신현락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0:23

어섬에서/ 신현락


나이가 들수록 버리기가 힘들어진다 헌 구두의 뒷굽을 보면 힘겹게 걷던 날들이 생각나서 버릴 수가 없다 마음의 후미진 구석에는 그렇듯이 닳아빠진 사연으로 가득 찬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언젠가는 버려야지 하면서


버리지 못하는 인연이 난마처럼 얽히어 한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용서해야 하고 한 사람을 증오하면 모든 것이 증오의 대상이 되어버릴 때가 있다 그 한 사람을 보내기 위해 이미 지도에도 없는 과거의 섬을 찾아간다 지방도로 306번 이정표가 가리키는 어섬 가는 길 한 해의 마지막 날 해가 저무는


어섬 육지 속의 섬 더 이상 침식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섬 리아스식 해안에 벼랑으로 서서 이마에 푸른 솔 정정한 소나무를 자랑스럽게 기르지 못하는 섬 폐경기의 섬 어부들이 무엇보다 물고기들과 갈매기들이 떠나버린 섬 갯벌이 바지락을 기르지 못하는 섬 이름뿐이 섬 어섬


밀물과 썰물의 시간을 잊어버린 섬 죽은 바다 해와 달이 물이랑에 부서지며 푸른 울음 아프게 반짝일 때 바다를 닮은 사람들 바다를 잃고 지금은 무엇을 할까 아아 견뎌야 할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슬픔이라도 견뎌야 할 몫이 있어야 삶은 바람을 가득 안은 돛처럼 팽팽해지는 것 상처도 생생해지는 것 바다로 난 벼랑에 죽을 목숨 하나 건지는 것이다


한 생각을 흔들면 다른 생각이 흔들린다 한 바람에 수많은 갈대들이 흔들리듯이 거미줄 한 올을 흔들면 전체가 흔들리듯이 일파만파로 번진다 저녁 하늘로 노을이 번진다 노을의 색깔은 여러 가지지만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불린다 노을 그 하나의 이름으로 한 사람을 보내기 위해 찾아온 어섬에서 나는 견뎌야 할 나의 슬픔으로 그대를 받아들인다

- 『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수록


* 어섬, 한때는 이름처럼 물 반 고기 반의 섬이었을 것이다. 육지와 이어지면서 이름뿐인 섬이 되었다. 바다로 출항하던 시절이 어부에겐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만선으로 돌아올 때는 벼랑의 소나무처럼 자존감을 높이며 위풍당당하게 부둣가를 누볐고, 배를 띄우지 못해 공치는 날에도 바다가 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문제는 삶의 바탕 혹은 삶 그 자체인 바다가 사라졌을 때 어부는 더 이상 어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부딪칠 대상이 사라져버려 절망도 없는 그 삶이 바로 절망이 된다.

  시적 화자는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아니면 스스로를 용서하기 위해 어섬을 찾았다. 상실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어부와 시적 화자는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어부의 상실감은 치유될 수 없는 것으로 무력하게만 느껴지고 화자의 상실감은 마음속으로 고투 중인 현재형으로 비춰진다. 세월의 더께가 얹혀졌지만 여전히 생생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사랑하는 마음은 당연히 삶의 에너지를 주는 것이겠지만, 미워하는 마음도 어쩌면 열렬한 생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스스로 사랑을 확인하고 돌아보듯이 미움도 밖에 세워 두고 응시해야 마땅한 것일까. 미움과 슬픔을 솔직하게 대면할 때 바람은 멈추지 않을 것이나, 그 덕에 “돛처럼 팽팽해지는” 삶이 자신을 건강한 일상으로 돌려세울 것이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