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ㄱ-ㅁ)

김소월(1902-1934,평북 정주)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3:32

김소월(1902-1934,평북 정주)

 

  1902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한 소월은 부농 집안의 장손으로서 조부와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소월이 두 살 되던 해, 명주 저고리를 입고 음식을 장만해서 처가 나들이을 가던 아버지(김성수)가 철도 공사를 하는 일인 목도꾼에게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음식을 빼앗으러 덤벼드는  목도꾼과 시비를 붙은 끝에 무수히 폭행을 당하게 되었고, 의식을 잃은 채 말 잔등에 거꾸로 매달려 집으로 들어왔다. 한 달만에 깨어나긴 했으나 정신 건강은 회복하지 못한 채 일생동안 폐인으로 지내게 된다. 그의 정신병은 대인 관계를 일체 끊고 홀로 앉아서 중얼거리는 식으로 나타났다.

  종가집 살림을 맡은 어머니 장씨는 활달한 성격으로 소월을 깊이 사랑했고, 숙모 계희영 역시 큰조카를 사랑했다. 계희영은 남편이 거의 버리다시피 외지로만 나돌았기 때문에 고독했다. 언문을 깨친 그녀는 고대소설과 설화를 탐독했고 그것을 소월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접동새>와 <물마름>은 그때 들은 설화를 소재로 한 시이다.

  막내 외숙부는 일본에서 신교육을 받고 돌아온 후 신여성과 결혼해 딴 살림을 차리면서 외숙모는 버림받는다. 소월의 <진달래꽃>은 이를 소재로 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막내 고모 여경은 부자집 후처로 시집가게 되었는데 이 일은 <후살이>라는 시로 남겨졌다.

  이처럼 소월 주변의 여성들은 한결 같이 불행했다.

  소월은 1915년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오산학교에 진학했다. 이승훈 선생과 조만식 선생의 가르침에 큰 감화를 받았다.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 선생은 뒷날 <제이 엠 에쓰>라는 시의 모델이 되는 인물이라고 오산학교 10년 후배인 백석이 밝혔다. 이 시에서 소월은 '술과 계집과 利慾에 헝클어져 십오년을 허구한 나'로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다. 하지만 백석은 소월을 지칭하여 '不世出의 天才'라고 했다.

  오산 시절에 스승인 안서 김억을 만난 것은 소월의 행운이었다. 소월이 [創造]에 <浪人의 봄>이라는 시로 데뷔하게 한 것도 김억이었다. 하지만 시인으로서의 김억보다 소월의 스승으로 더 알려지게 된 일이 썩 유쾌한 일인지는 알 수 없다.

  오산학교 2학년, 그 나이 16살일 때  홍단실이라는 세 살 연상의 여자와 소월은 결혼을 했다. 소월의 자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조부의 강권에 의해서였다. 홍단실은 소월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순박한 시골 처녀였다. 키가 크고 얼굴이 예쁘지 않은 것이 소월의 불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월은 처를 끝까지 아껴주었는데, 이는  소월이 주위에 버림받은 여자를 많이 보고 성장했던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사교적이고 비사회적인 소월은 학창시절이나 문단 생활 속에서도 친구를 깊이 사귀지 못했다. 남산학교 시절의 김상섭 정도가 소월과 친했는데, 그는 소월이 15살 되던 해 장질부사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소월 시 중 절창으로 알려진 <招魂>이 바로 김상섭의 죽음을 시화한 것이다고 숙모 계희영은 말했다.

  소월 시에 숱하게 등장하는 님이 누군지, 실재 존재하는 인물이었는지, 왜 그렇게 서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했는지 시인이 없는 지금 알 길이 없다. 오 숙이라는 7살 연상의 여인을 사랑했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오 숙은 17살에 출가했다.

  소월이 詩作 배경을 밝히고 발표한 <팔베개 노래>라는 작품이 있다. 그 시의 화자는 21살된 기녀 채란이다. 채란의 아버지는 정신병자였고, 어머니는 자신의 후살이 밑천으로 딸을 기루에 팔았다. <팔베개 노래>의 채란처럼 기구한 운명에 놓인 기녀를 사랑했을 법도 하다.

  오산학교의 폐교조치로 서울인 배재고보에 편입하여 2년 후(1923년) 졸업했다. 이 때 소월의 성적은 44명 중 4등이었다. 특히 국어 과목은 100점이었다. 그 해 일본 동경 상대에 들어갔던 소월은 관동대지진 후 바로 귀국했다.

   소월은 1924년 소월은 유교적 규범에 엄격했던 조부와 불화하고 처가가 있는 龜城으로 이사했다. 이 무렵 소월의 생활은 외부와 단절된 지극히 폐쇄적인 삶이었다. 1926년부터 2년간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면서 생계 수단으로 삼았지만 결국 문을 닫았다. 이후 고리대금업에도 나섰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 때의 심경을 소월의 스승인 김억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만나는 사람들은 무엇이나 하여 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건드리면 구정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더라도 가라앉고 말기는 할 것입니다.' 또 구성의 나날을 읊조리기를 '산촌에 와서 10년 있는 동안 산천은 별로 변함이 없어 보여도 人事는 아주 글러진 듯하옵니다. 世紀는 저를 버리고 혼자 앞서서 달아나는 것 같사옵니다.'

  생활인으로 실패한 소월은 점점 술에 빠져든다. 혼자서도 마시고, 아내와 함께도 마셨다. 취하면 독백하고, 조소했다. 경제적 몰락에 이은 정신적 피폐도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어느날 성묘를 다녀온 소월은 장에서 아편을 구했다. 그날 밤 아내와 늦게까지 술을 마신 후 취해서 곯아 떨어졌다. 다음날 아내가 일어났을 때 소월은 시체로 변해 있었다. 음독자살이었다.

  소월의 죽음은 문중에서 부끄럽고 끔찍하다 하여 함구하고 말았다. 그래서 소월의 정확한 사인이나 그 후의 자세한 이야기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1934년 12월 24일 32세의 나이로 소월은 세상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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