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1913-1995, 경북 경주)
김동리(金東里)는 1913년, 경주군 경주면 성건리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성건리는 경주성 밖의 서천(西川-형산강)을 끼고 있는 농촌이었다. 동리가 태어날 때 어머니의 나이가 마흔 두 살로 노산(老産)한 탓에 젖이 모자라고 밭일이 바빠 동리는 형수의 품 속에서 암죽으로 키워진다. 어머니의 품이 그립고 암죽도 제 대로 받아먹지 못하던 그는 두 살 때부터 어버지가 남긴 술찌끼를 빨아먹기 시작한다. 술찌끼를 먹는 버릇은 점점 심해져 세 살 무렵에는 취한 나머지 비틀거리며 마당을 걷고 넘어지고 했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비틀거리는 동리는 어느새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술을 먹고 비틀거릴 때 이 모습을 보려고 모여든 아이들이 있었는데 동리는 자신이 구경거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단순히 모여선 마을 친구들과 사귀고 싶다는 생각에 뜨거운 눈으로 아이들 쪽으로 달려가면 어린애들은 무서워서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때 도망가지 못하고 붙잡힌 애가 대부분 이웃집 키 작은 옥선이었는데 이때 동리는 옥선이를 잘 깨물었다고 한다. 심리학적으로 깨무는 행위는 본능적인 사랑의 표시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아기, 게다가 술까지 취해서 올라오는 감정적 황홀 상태에서 가슴속에 일어나는 뜨거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있었던 당시의 동리가 그저 친구가 좋아서 했던 깨무는 행위는 곧 사랑의 감정이었다고 훗날 수필「첫사랑」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 옥선이는 죽게 되고 동리는 자신의 문학의 동기가 선이의 죽음 때문이었다는 말을 많은 곳에서 드러냈다고 한다.
그의 집은 농사를 짓는 한편, 부친은 성 안에 과일, 명태, 백지 따위를 파는 건어물전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의 집 재산은 백석지기 정도 되는 규모였고, 부친의 가게가 성세를 이루어 성내에 건어물전 외에도 집 두 채를 남에게 세 줄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넉넉한 가운데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리 부친은 배포가 유다르고 인심도 좋았다고 전해진다. 흠이 있다면 술을 좋아하고 그에 못지 않게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술주정과 행패에 대한 반발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다. 동리도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나가게 된다. 그에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만 수학하게 된다.
그가 8세 때 입학한 소학교도 경주 제일교회 소속의 계남소학교라는 곳이었고, 14세 때 진학한 중학교도 기독교 계통인 대구의 계성중학교였으며, 16세 때 서울로 올라가 3학년으로 편입한 경신중학교 역시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다. 그가 경신중학교로 전학을 하게 된 것은, 그는 중학을 마치면 집안의 뜻에 따라 의학 전문학교로 진학할 계획이었는데 계성중학교는 당국의 지정을 받지 못해 전문학교 응시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신학교 3학년에 보결 시험을 치고 들어갔으나 1년 뒤에 중퇴함으로써 학업을 중단하고 만다. 1926년에 부친이 별세한 후 집안의 살림을 책임져 오던 둘째형의 사업이 기울어 더 이상 김동리의 학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된 탓이었다.
이때부터 1934년 「조선일보」에 시 『백로』가, 1935년 「중앙일보」에 소설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기까지 4-5년간 독서와 습작에 몰두하게 된다.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원고 청탁이 오지 않자 사천의 다솔사와 합천의 해인사 등을 오가며 다시 『산화』를 써서 1936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응모, 또 한 차례의 당선을 따낸다. 이렇게 되자 비로소 여러 잡지들에서 청탁이 오기 시작한다. 여기에 응하여 『무녀도』, 『바위 』등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김동리는 그 시대의 가장 주목받는 신진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면서 한동안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하기도 하고 또 서정주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1937년에는 다시 낙향, 다솔사에서 소학교에 가지 못한 인근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설립한 광명학원의 교사가 된다. 그 후 1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광명학원이 폐쇄당할 때까지 김동리는 이 학원의 교사 노릇에 정열을 기울이며 또 한편으로 꾸준히 소설을 발표하는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신세대 작가들의 대표자라는 지위가 그에게 주어진다.
중학교 4학년 중퇴라는 최종학력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세계문학전집과 동서의 철학 및 사상·종교서적 등을 섭렵한 그는 나름의 뚜렷한 문학관을 수립해 자신의 창작을 뒷받침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창작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사회 전체의 혼란과 대립이 문학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던 해방공간에 그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그는 해방 직후 좌익계 문인들이 발빠르게 결성한 문학가동맹에 맞서 1946년 서정주,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등과 함께 반공문학단체인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한다. 이 단체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뒤인 1949년 12월 이념적 색깔이 비슷한 문필가협회와 합해 한국문학가협회로 발전하며 동리는 이 단체의 소설 분과위원장에 피선된다.
동리 자신이 대한민국 정부와 `정신적 내지 역사적 성격'을 공유한다고 밝힌 바 있는 한국문학가협회는 지금의 한국문인협회의 전신으로 이후 이 땅의 제도권 문학을 대표하게 된다. 동리는 나중에 두번에 걸쳐 한국문인협회의 이사장으로 뽑히기도 했다.
동리는 자신과 문학적 대척점에 놓인 작가·평론가들과의 논쟁 과정에서 끊임없이 문제적 평론을 발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찍이 30년대 말의 선배 작가 유진오와 벌인 논전에서 시작해 해방 공간에는 좌익계 소장 평론가인 김동석·김병규와, 50년대 말에는 당시의 젊은 평론가 김우종·이어령 등을 상대로 펼친 불꽃 튀는 논쟁에서 동리가 이룩하고 지켜낸 문학적 화두는 `구경(究境)적 삶의 형식'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구경적 삶의 형식'이란 달리 말하면 인간의 원형적 조건 또는 운명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일제 말기인 30년대 후반과 해방공간, 그리고 민족적 분단의 세월을 통과하면서 많은 수의 동료 문인들이 문학과 현실의 불가분의 관련성을 강조할 때에도 동리는 역사와 현실이 휘발해 버린 어떤 민족의 원형적 공간을 상정하고 그 안에서 운명이라는 이름의 알 수 없는 힘에 맞서고자 했다. 그 대결의식은 `역마' '사반의 십자가' `등신불'과 같은 기념비적 작품으로 구현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 중의 문총구국대 부대장, 5·16민족문화상, 국정 자문위원 등으로 미끄러지기도 했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서 많은 후배들을 키우기도 한 동리는 두 번째 부인이었던 작가 손소희가 먼저 세상을 뜬 뒤 30년 연하의 작가 서영은씨와 결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다음은 계성 중학교 시절의 연애담이다. [대구 계성 중학교에 다녔던 김동리는 기차 안에서 마주친 한 여학생에게 반했다. 그러나 그 여학생이 경주에서 소문난 부잣집 딸이라 말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차마 용기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한 친구가 짝사랑의 열병으로 끙끙 앓고 있는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친구는 바로 훗날 시인이 되는 박목월이다. 박목월은 김동리 보다 나이는 세 살 많았지만 말을 트고 지낼 정도로 친했다. 목월은 그 여학생의 오빠와 자기 형이 친구 사이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동리에게 닦달했다.
“얼른 편지 한 장 써서 줘봐. 내가 우표가 돼줄 테니.”
그렇게 목월은 동리의 러브레터를 그 여학생에게 배달해주었다. 그러나 기차 안에서 날마다 마주치면서도 여학생은 답장을 주지 않았다. 상심한 동리는 풋풋한 짝사랑의 마음을 접고 말았다.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김동리는 경주에서 열린 백일장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다가 장원 당선자의 할머니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할머니는 동리가 그토록 답장을 기다렸던 여학생이었던 것이다.
“왜 그때 답장을 주지 않았습니까?”
김동리는 아주 예전에 하고 싶었던 말을 뒤늦게 물었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남자가 왜 그리 적극적이지 못했습니까?”하고 반문했다. 1976년 김동리는 이 에피소드를 단편소설<선도산>으로 발표했다.
동리를 낳고 키운 서라벌 천년 고도. 그 곳에서 동리는 이십 대 초반까지 도스토예프스키에 심취하여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장발을 휘날리며 선술집, 요릿집, 목로집을 나름대로의 설움에 취하여 돌아다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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