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ㄱ-ㅁ)

김수영(1921-1968, 서울)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3:34

김수영(1921-1968, 서울)

 

 김수영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 시인이다. 김수영은 1921년 김태욱의 셋째 아들로 종로 6가에서 태어난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폐렴과 뇌막염을 앓았다. 더구나 위로 두 자식이 사망한 뒤 태어난 아들이었기에 부모의 걱정 속에서 자랐다. 그가 남긴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한 번도 그의 몸집에 살이 오르거나 건강하게 보이는 일이 없다. 다만 그의 크게 뜬 눈 만이 형형할 뿐이다. 그는 겁이 많고 외로운 아이로 자라났다. 어느 식구나 친구와도 다정하게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선린상고 야간부를 졸업한 김수영은 동경 유학길에 오른다. 1944년 2월 김수영은 일본의 징용을 피해 귀국했다. 그는 한때 연극에 심취하여 명동 부근에 박상진이 설립한 청포도 극단을 찾아갔다가 종로 2가에 마리서사란 헌 책방을 내고 있는 박인환을 만나게 된다. 연희전문 영문과에 들어갔다가 3,4 개월 만에 자퇴를 한 김수영은 마리서사를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가 거기서 조우한 사람들은 김광균, 김기림, 이시우, 이한직, 양병식 등 당시 모더니스트들이었다. 김수영은 이들과 어울리며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썼다.

 해방 공간을 명동에서 지낸 김수영은 이데올로기 문제엔 무관심해 보인다. 그는 우리 문단에도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이 없던, 몽마르뜨르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 해 보고 싶었다고 스스로 전하고 있을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를 즐겼다.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6·25가 발발하고 김수영은 곧 의용군에 징집되었으나 그는 탈출하여 순천으로 도망치다가 붙잡혔고 패잔병이라고 둘러대어 다시 북한군에 편입된다. 그러나 미군이 공격해오자 평복을 입고 손들고 나가 스스로 자유인이 된다. 그러나 미군을 따라 서울에 돌아온 그는 다시 경찰에 체포된다. 그는 빨갱이라는 죄목으로 거제도로 압송된다. 거제도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김수영은 영어를 잘 구사한다는 이유로 포로 수용소 병원 외과원장의 통역으로 복무하면서 비교적 편한 포로생활을 한다.

 그는 아마 전쟁 기간의 경험 중에 가장 쓰라린 체험을 남한 쪽 서울 경찰에서의 체포, 고문에서 겪었던 듯하다. 그는 일생동안 자신이 누군가의 매카시즘에 의해 희생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혹시 자신이 가진 비판적 시각이 공산주의로 매도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 콤플렉스는 일생동안 그를 지배해서 그는 산문과 시 곳곳에서 그것을 노출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잠시 신문사에 있기도 했고, 영고교사, 간판 그리는 일, 미군부대 통역, 영어 번역일 등 생활인으로서 어떻게든 직업을 가지고 가장(두 아이의 아버지) 노릇을 하려고 노력한다. 얼마 있다가 김수영은 양계를 시작한다. 출판사나 신문사, 통역 등의 일보다 닭을 키우는 일이 김수영에게는 아주 큰 기쁨을 주었던 것 같다. 그는 닭을 기르면서 <눈> <폭포> <꽃> <봄밤> <초봄의 뜰 안에> <비> <밤> 등의 시를 발표했다.

 1957년엔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간행했다. 이 기간(6·25직후)의 김수영 시의 가장 큰 특징은 관념적·추상적 세계 인식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전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초기의 난해한 어투는 많이 사라지고 구체적 일상이 시의 소재로 등장한다. 이 시기에 김수영 시에는 생활이 중요한 소재로 채택되고 있다. 그는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현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이 뒤떨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인의 태도이다."라는 인식에 도달해서 자신의 시와 함께 동시대 시인의 시도 바라보게 된다.

 그의 시에서의 일상어 채택은 5,60년대 시단에서 가히 혁명적인 형식 실험이었다고 부를 수 있다. 그 당시로서 시에 일상어와 비속어를 동원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하고도 새로운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일상어와 함께 시시콜콜한 신변잡사들이 시의 소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자 했다.

 4. 19는 김수영에게 시에 대해 일대 전환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개인적 삶에서 비롯되던 비극적 세계 인식이 사회·역사적 세계 인식으로 바뀌었다. 자유의지가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4. 19를 "하늘과 땅 사이의 통일로 느끼면서 동시에 남도 북도 없고 미국도 소련도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읍디다. 하늘과 땅 사이가 온통 자유 독립 그것 뿐입디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읍디다."라고 흥분했다.  그는 민중의 힘이 승리한 것에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을 맛보았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환호작약한 시기였다.

 4. 19 직후인 이 시기에 김수영은 자유와 혁명을 동의어로 본다. 4. 19를 통하여 문학적 자유, 문학적 혁명, 문학의 궁극 목적을 재정립했고 그것의 이념을 자기화해 낸다. 만약 김수영에게 참여 시인이란 칭호를 부친다면 이 시기에 쓰여진 몇몇의 시들에게 그런 칭호를 붙일 수 있다.

 4.19 후 6개월간 김수영은 혁명이 가져다 주는 흥분의 도가니에서 자신을 채찍질하고 시적 자유를 자기화할 수 있는 크나큰 틀을 마련했지만 10월 3일 <그 방을 생각하며>라는 시를 쓰면서 정치적 혁명의 실패를 자인한다. 그는 4·19가 혁명은 안되고 방만 바꾸어 버린 것이아니냐, 혁명의 뜨거움은 남았지만 사람들만 바뀐 결과가 되어 버리지 않았느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제2공화국 정부는 김수영에게 또 하나의 좌절감을 맛보게 한다. 그 결과 나온 시들이 <중용에 대하여> <그 방을 생각하며> 등이다. 이 시들을 통하여 김수영 시의 어조는 한탄과 실의의 어조로 바뀐다. 그리고 "제2공화국! 너는 나의 적이다. 나의 완전한 휴식이다. 영광이여, 명성이여, 위선이여, 잘 있거라"라고 쓴다.

 5. 16을 통해서 혁명의 실패를 맛본 김수영의 시는 내적으로 더욱 치열해진다. 5·16이 일어나자 김수영은 5,6일간 잠적했다가 머리를 빡빡 깎고 돌아와 아주 비극적이고도 자학적인 <모르지, 이놈이 무엇이지?>같은 시를 쓴다. 혁명의 실패는 그를 다시 소시민적 의식을 갖는 시인으로 변모시키며 그의 시 세계를 내면 깊숙이 침잠시킨다. 그는 가사와 육아 문제로 시선을 돌려 가족과의 문제를 통해 현실, 사회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세계로 나아간다.

 아래는 최하림의 글이다..

 [김수영은 반공포로로 거제수용소에 있다가 1953년 4월말경 풀려났다. 그 해 피난지 부산에 눈이 많이 내렸다. 김수영은 조병옥의 돈을 받아 간행하는 [자유세계] 편집실에 거의 매일 들락거렸다. [자유세계]의 주간은 평론가 임긍재였고, 편집장은 소설가 박연희였다. 저녁이면 그들은 남포동의 바닷가 주점으로 가 낙동강을 마셨다. 낙동강은 소주 이름이었다. 화제는 임긍재가 독차지했다. 참가 인원 중의 한 사람인 안수길은 영도다리를 건너올 때부터 옆구리에 끼고 있던 검은 가방을 두 다리 위에 얹고 술을 마셨다. 그들은 낙동강을 마시며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김수영은 김중희의 하숙집에 얹혀 지내면서 날마다 임긍재의 술을 마시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은 날엔 김중희의 술을 마셨다. 어느 날은 술을 마시다가 의치를 주전자에 둔 채로 나왔다. 그는 술을 마실 때면 거의 언제나 의치를 빼어 주전자에 넣었다. 김중희는 의치가 든 주전자의 물을 여러 번 마시고 싸우기도 했다. 그의 의치는 포로수용소 시절 미군의들이 해준 것이었다.

  1960년대 초입에 김수영이 요즘 젊은 시인들이 술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고 곧잘 개탄했다. 한번은 부산으로 펜클럽이 주최하는 문학강연을 갔다.

 "시를 쓰는 일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정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라고 열변을 토한 김수영은 강연이 끝난 뒤 양병식과 만나 바닷가 소주집으로 갔다. 김수영은 양병식의 아내를 부르자고 했다. 양병식 아내는 서울의전에 다닐 때 양병식, 김수영, 이봉구들과 어울려 예술활동을 했던 바 있다. 김수영은 그녀에게 거북살스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김수영이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그녀는 수용소 내 병원의사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김수영은 기쁨에 겨워 소리치며 달려갔다. 그러나 덩치가 큰 양병식 아내는 "이 빨갱이 새끼, 달려 오긴…."하고 길을 막았다. 전화를 하러 갔던 양병식이 잠시 후 돌아왔다. "안 오겠대. 더 마음이 가라앉은 다음에 만나자더군."

 김수영과 양병식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조용히 잔을 주고받았다. 얼른 술이 취하지 않는 듯했다. 다음 날 펜크럽 강연회팀과 귀로 길에 경주로 가 청마시비를 찾았을 때도, 김수영은 감정이 끓어오르는지 시비에 술을 부으며 울기 시작했다. 예사 울음이 아니었다. 모윤숙과 이헌구가 달래도 듣지않고 계속 시비를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흐느꼈다. 뒤에 안수길은 "그날 그는 이후에 제 운명이 될 교통사고를 예감이라도 하는 듯했다."고 적었다.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아래 이야기는 소설가 강홍규가 적은 내용이다.

[1968년 6월 15일 아침, 김수영은 아내로부터 돈 재촉을 받았다. 김수영이 평생 부자유스럽게 느꼈던 것 하나가 돈이었다. 김수영은 시인 신동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고는 다 끝나지 않았지만 미리 가불을 해달라는 전화였다. 당시 김수영은 신구문화사의 번역원고를 맡아 오랜만에 짭짤하게 술값깨나 벌고 있었다. 신동문은 김수영에게 5만원을 주었다. 김수영은 2만원을 먼저 챙기고 나머지 3만원을 찾아온 부인에게 건넸다. 그리고 김수영은 신동문에게 술먹으로 가자고 졸랐다. 5시가 되어서 소설가 이병주와 한국일보 정달영 기자와 함께 청진동 어느 집으로 들어가 소주를 마셨다. 김수영은 취했다. 그리고 평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이병주에게 욕을 해댄 뒤 먼저 술집을 나왔다. 그것이 9시 경이었다. 그리고 김수영은 미대사관 근처에 있었던 술집 발렌타인을 혼자 찾았다. 전날 여기서 술을 마시고 여주인에게 술값이 비싸게 나왔다고 싫은 소리를 했기 때문에 사과하는 뜻에서 이곳을 들른 것이다. 여기서 나와 집 근처에 도착한 것이 밤 11시 30분 경이었다. 버스 두 대가 엇갈려 양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중 한 대가 인도로 뛰어들어 걸어가던 김수영을 뒤에서 덮친 것이다.]

 아래는『뿌리깊은 나무』 1977년 12월호에 게재되었던 염무웅의 글이다. 김수영과 신동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한 10년 조금 넘은 지난날의 일이다. 그게 어느 철이었는지 분명히 기억되지는 않으나, 그다지 춥지 않은 철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때 문단에 나온 지 얼마 안된 올챙이 평론가였던 나는 역시 내 또래 올챙이 한둘과 시인 고은씨랑 어울려 시내에서 소주를 마셨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하던 터라, 아직 초저녁인데도 더 마실 돈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고은씨의 자신있는 인솔을 받으며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몰려가게 되었다.

 당도한 곳은 마포 종점이 가까운 서강이란 데였다. 거기 가서야 나는 우리의 목표가 김수영씨임을 알았다. 우리는 김수영씨집 허술한 대문 바깥에 서 있고 고은씨 혼자서 교섭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우리가 한참이나 기다렸는 데도 그처럼 장담하고 들어간 고은씨는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시끌덤벙한 소리가 들려온다. 사태가 우리에게 이롭도록 전개되지 않고 있음을 대뜸 짐작할 수 있었다. 김수영씨가 안 계시니까 혹시 부인한테 술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건 아닌가 해서, "김선생님도 안계신데 그냥 돌아갑시다"하고 말할 작정으로 우리는 주뼛주뼛 안으로 들어갔다. 집이 대문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어서 사랑채를 돌아 들어가야 안마당이 있었다.

 우리가 거기서 본 광경은 예상했던 바와 전혀 딴판이었다. 고은씨는 안방으로 올라가는 댓돌 앞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고, 방 안에서는 고은씨를 꾸짖는 소리가 거침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그제서야 주인은 느닷없는 방문객이 고은 한 사람뿐이 아님을 알고는 촉수 낮은 전등을 켠 뒤에 우리를 들어오게 했다. 주인 김수영씨는 우리가 방에 들어앉은 다음에도 고은씨를 향해서 맹렬한 질타를 퍼부어댔다.

 고은씨가 무슨 욕먹을 짓을 했는지 몰라도 결코 유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찾아온 손님을 이처럼 야박하게 대접할 수 있는가? 나는 김수영씨의 말에 틈이 나면 단단히 항의를 하려고 은근히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열변에는 남이 끼어들 틈이 좀체 나지 않았다. 아마 거의 한 시간쯤이나 계속되었을까? 끝내 나는 항변을 하지 못하고 말았는데 그 까닭은 처음에는 말할 틈이 나지 않아서였고, 다음에는 차츰 그의 말에 감복되어서였다. 마침내 나는 술 먹은 것도 잊고 술 먹을 것도 잊은채 김수영씨의 준열한 달변에 혼곤히 도취되고 말았다.

 물론 그의 이야기는 자세한 내용은 잊어 버린지 오래다. 대체로 우리 문단의 썩어 빠진 상태를 격렬히 규탄하는 내용이 아니었던가 싶다. 나는 일찍이 문학과 문단의 세속적인 통념들에 그토록 거침없이 강타를 퍼붓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 사람의 문인이 돼서 신문이나 잡지에 자기 이름 석자가 오르는 것을 기막힌 영광으로 알았던 나에게 김수영씨와의 극적인 만남은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강한 충격이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나는 김수영씨를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으며 급속히 그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가정과 학교에서 가르친 고정관념들을 조금만 벗어나도 무슨 큰 변이 날 것처럼 생각하던 소심하고 고지식했던 나 같은 사람이 그때 보기에 김수영씨는 상상할 수 없이 광활하고 그지없이 신선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뜨겁고 싱싱한 활기가 흘러 넘쳐, 곁에만 가도 곧 모든 세속적인 구속과 억압들이 풀어져 나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그를 한 번씩 만날 때마다 내게 묻은 기성관념의 때가 한꺼풀씩 벗겨지고 그만큼 내 정신이 성장한다고 느꼈다. 그의 화제는 대체로 문학과 문단에 깊이 연루된 것들이었으나 그의 화법에서 내가 배운 것은 넓고 자유롭게 세상을 보는 법이었다. 작고하기 전 두세해 동안 그를 가까이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 주어진 가장 큰 행운의 하나였으며, 나는 지금도 그 행운에 대해서 감사한다.

 김수영씨를 좋아하기 시작할 같은 무렵에 신동엽씨를 알 게 되었다. 그때 나는 어느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문학전집의 편집 실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 일로 청진동에 있는 어느 낡고 허술한 다방(이런 정다운 다방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에서 신동엽씨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몸집이 작고 가무잡잡하며 옷차림이 매우 검소했으나, 쏘는 듯한 날카로운 안광으로 하여 만만치 않은 인상을 주었다. 간간이 부드럽게 띠는 선량한 미소가 안광의 날카로움을 상쇄하여, 싸늘하면서도 따뜻한 상쾌함을 풍겼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필요한 사무적인 말 이외에, 다른 사람은 그 전집에 몇 편이나 수록되느냐든가 이런 시인은 이래서 좋고 저런 시인은 저래서 나쁘다든가 하는 따위의 너절한 군소리를 일절 늘어 놓지 않음으로써, 과묵하고 강직한 선비의 품격을 보여 주었다.

 그 뒤로도 나는 드문드문 신동엽씨를 만났다. 언제나 그는 말 수가 적었다. 그러나 어쩌다 던지는 몇 마디 말에도 가시처럼 예리한 데가 있었다. 헌책방에서 『오랑캐꽃』이란 시집을 구해서, 이런 시집 읽어 본 적 있느냐니까, 몹시 반가워하며 빌려 달라고 했다. 며칠 후 그는 딱딱한 내용의 번역판 한 권을 대신 나에게 빌려 주었다. 그러고 그는 영영 나타날 줄 몰랐다. 내가 소시민의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동안 이 고결한 시인의 몸뚱이는 몹쓸 병마에 침식되어 이미 기동할 수 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빌린 책들을 서로 돌려 받지 못한 채 그와 나의 금생의 인연은 끝나고 말았다.

  작년 봄이던가, 시인 신경림씨, 소설가 황석영씨와 함께 역시 시인인 조재훈씨의 안내로 부여를 찾은 적이 있다. 낙화암 근처에서 거룻배를 빌려 타고 구룡리까지 내려가, 거기서 부여 읍내로 나 있는 긴 다리를 건넜다. 오른쪽으로 듬성듬성한 노송들이 서 있고, 그 한가운데에 우리의 시인 신동엽씨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여기저기 소들이 매어져 있고 헐벗은 코흘리개들이 무심히 놀고 있었다. 듣자 하니, 원래 시비를 부소산에 세울 계획이었으나 부여의 이른바 유지들 중 일부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신동엽씨의 소년 시절 행적 가운데 불투명한 점이 있다 하여 반대하는 바람에 이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고 한다. 하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쫓겨났던 왜놈들이 다시 양복을 입고 카메라를 메고 관광이랍시고 몰려들어 제 집에라도 온 듯이 활개치는 꼴을 보기보다, 태어난 마을 가까운 금강 기슭에 누워 바로 그 자신이 자라던 때 그대로의 말씨와 옷차림을 한 고향 사람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더 흐뭇하겠는가.

  김수영씨는 1921년 서울에서도 한복판인 관철동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효제국민학교와 선린상업학교를 다녔다.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대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학병징집을 피해 귀국했고, 1944년에 한해 앞서 이주한 가족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영문학과 연극에 몰두했다. 해방과 더불어 돌아온 그는 연극을 집어치우고 혼자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예술부락』이란 해방 후 최초의 문학 동인지를 주관하던 조연현에게 20편 가까운 시작을 주었는데, 그 중 「묘정의 노래」한 편이 뽑혀서 실렸다. 이 무렵 작고한 시인 박인환이 종로에다 <말리서사>란 책가게를 내자, 김수영씨는 헌 책을 팔려고 자주 이 가게에 들르게 되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 가게에 드나들던 김기림, 김광균, 오장환, 김병욱, 임호권 같은 당대의 일류 모더니스트들을 알 게 되었다. 당시 김수영씨 집은 충무로 4가에서 <유명옥>이란 빈대떡집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치질 수술을 하고 가게 뒷방에 중환자처럼 누워 지내며 벽지 위에다 「아메리칸 타임지」라는 일본말 시를 써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자주 찾아오던 김병욱이 이 작품을 격찬하여 김수영씨는 "눈물이 날 지경으로 감격했다"고 한다.

 말리서사가 없어진 얼마 후 김수영씨는 박인환과 김경린이 주동이 되어 발간한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서민들의 합창』(1949년 4월)에 두편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젊은 모더니스트의 일원으로 본격적인 문단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어느 수필에서 "인환의 모더니즘을 벌써부터 불신하고"있었고 그래서 그 자신도 이 사화지에서 빠지려고 하다가 황당무계한 내용에 제목만 「아메리칸 타임지」라고 붙여서 내게 되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박인환의 이름이 나오는 모든 문장들에서 김수영씨는 이 유명한 모던보이에 대한 기탄없는 경멸을 표하고 있거니와, 당시의 김수영씨로서는 요란스러운 현대 용어들이 마구 나열되어 있는 박인환의 <난해시>에 열등감과 반발을 이울러 느꼈던 것 같다. 어떻든 우리는 김수영씨의 문학적인 출발이 30년대의 김기림에게서 흘러 내려온 모더니즘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그가 박인환, 김경린 등의 모더니즘이 가짜가 아닌가 내심으로 불신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 아무런 이론적이고 시적인 대안을 갖고 있지 않았음은 틀림없는 듯하다.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수록된 그의 두 작품이 전형적인 모더니즘 계열의 난해시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의 문학생애 전체가 말하자면 자신의 안과밖에 있는 모더니즘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확증해 준다고 하겠다.

  김기림, 이상의 30년대적인 모더니즘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거쳐 피난 수도 부산에서 김경린, 조향이 주도한 <후반기> 동인의 활동을 통해 50년대의 모더니즘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김수영씨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혹심한 고생을 겪고 있었다.1953년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었을 때에는 거의 걸음을 옮길 수 없을 만큼 육체적으로 피폐해 있었고, 다쳐서 싸맨 무릎에서는 구더기가 기어 나왔다고 한다. 부산에서 미8군 통역, 대구에서 교통부 임시직원,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서 잠시 기자생활, 이렇게 전전하다가 1956년에 마포구 구수동에 정착하여 값싼 번역으로 고달픈 생계를 이어나가면서 작고하기까지 십수년 동안 해마다 10편 안팎의 시들을 발표했다.

 위에서 간단히 살펴본 경력에서도 드러나듯이 김수영씨는 철저한 도시생활자이며, 그의 감성과 세계관도 이러한 도시적인 경험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일생동안 김소월이나 김영랑 또는 서정주와 같은 개념에서의 서정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자연을 자연 자체로서 완상하는 시를 쓰지 않은 극히 드문 한국 시인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이런 뜻에서도 그는 완강한 반전통주의자이다. 물론 그는 구름, 눈, 비, 반달, 등나무, 싸리꽃, 토끼, 풍뎅이, 거미, 파리, 같은 소재들을 시로써 다루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언제나 <김수영 인간학>의 개진을 위한 소도구 또는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풍경화나 정물화를 그리는 데에 그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으며, 사람들이 모여들어 아귀다툼하는 이 도시환경 속에서 어떻게 올바로 살 것이냐 또는 어떻게 올바로 살지 못하고 있느냐 하는 것만이 문제였다.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 「비」 제1연 )

 

  "비가 오고 있다"는 자연 현상, 서정시의 가장 오래고 흔한 주제의 하나인 이 자연 현상은, 남편 또는 아내가 상대방을 부르는 가장 익숙한 호칭인 "여보"라는 어휘에 매개됨으로써 생활현실의 문제로 전환된다. 그러나 이 시는 "비애"라는 단어에도 불구하고 "비"를 "움직이는 비애"로 보는 신선한 위트에 의해서 매우 경쾌한 가락을 띤다.

  50년대의 김수영씨를 사로잡은 것은 이처럼 소시민적인 생활로부터의 중압과 그 중압 밑에서도 시를 쓰고 있다는 자의식 사이의 도덕적인 갈등이었다. 그 갈등이 문학적인 꾸밈이나 겉치레가 아니고 진정으로 내면적인 근거가 있는 것임을 우리는 믿을 수 있다. 그의 시가 소시민의 일상 생활이라는 제한 속에 갇혀 있었음에 불구하고 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도덕적인 갈등의 이러한 진정성에 연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긴장이라고 하는 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법이다. 김수영씨의 개인생활 내부에서만 맴돌던 도덕적인 갈등이 더 확장된 공간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리하여 4·19혁명은 김수영씨의 문학적인 생애에 하나의 분수령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진실한 내면적인 계기로서 맞이함으로써 그의 문학은 이제 단연코 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삶의 구체적인 터전으로서의 정치· 사회적인 상황에 의해 특징지어지게 되었다. 그 뒤로 김수영씨는 시와 시론들의 활발한 발표를 통해 우리 시단의 낙후성과 몽매성을 공격하고 시인의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한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6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에 이르는 한국시의 한 시대를 개막하였다.

  신동엽씨는 살아온 과정이나 문학적인 경향이 모두 김수영씨와 매우 대조적이다. 김수영씨가 도시적인 경험의 소유자이고 도시적인 감수성으로 시를 썼다면, 신동엽씨는 말하자면 농촌적인 경험의 소유자이고 농촌 공동체적인 세계를 이상향으로 그리워했다. 그는 1930년에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거기서 국민학교를 다니고 전주에 가서 사범학교를 다녔다. 6·25가 났을 때에는 그 역시 동족상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1953년 단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했고, 잠시 시골 농업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1959년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입선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신춘문예 시부 예선을 시인 박봉우씨가 보았는데, 천편이 넘는 작품들을 훑어보던 중에 기막히게 좋은 작품을 발견했다. 그래서 흥분한 박씨는 "좋은 장시가 들어왔다"고 좋아하며 문화부로 원고를 넘겼다. 바로 신동엽씨의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그것이었다. 이 작품은 심사위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일으킨 끝에 당선 아닌 가작으로 입선되어, 그나마 여러 구절이 깎인 상태로 활자화되었다. 시상식은 조선일보 사장집에서 있었는데, 신동엽씨는 한복에 조끼를 받쳐 입은 촌사람 그대로의 모습으로 참석했다. 박봉우씨는 이 차림새에 더욱이나 홀딱 반해서 "너같은 놈은 여관에서 잘 사람이 아니다"하고는 자기 하숙방으로 끌고 가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다.

  이 일화에서 보여지듯이 신동엽씨는 처음부터 문단의 굳어진 관습 따위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가 시를 발표하기 시작할 무렵의 문단, 김수영씨처럼 양식있는 시인조차 깊숙이 얽혀 들어 있던 문단이라고 하는 곳은 불안이니 허무니 실존이니 하는 50년대 특유의 허황한 낱말들이 여전히 판을 치고 있었다. 한마디로 국적불명의 외래 사조가 창궐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극히 소박한 서정시에 불과한 듯한 신동엽씨의 문학은 따라서 크게 주목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4·19 혁명 이후로 민족의 현실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고조됨에 따라 그의 시는 일부에서나마 예리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쉽고 단조로운 어휘로 표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그때까지 어떤 시인들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민족의 역사에 대한 뜨겁고 원대한 비젼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산에 언덕에」제1,2연 )

 

  소박한 사랑의 노래 같다. 과연 이 시는 사라진 사람을 찾는 간절한 그리움의 노래다. 그러나 사라진 사람의 얼굴과 숨결이 아주 없어지지 않고 산에 언덕에, 들에 숲속에 다시 살아남을 믿고 소망하는 심정은 단순한 세속적인 애정의 차원을 벗어난, 진정한 존재에 대한 갈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는 마치 김소월의 언어로 한용운의 정신을 읊은 듯한 높은 격조와 강인한 역사의식을 보여 준다.

 

  눈동자를 보아라 향아 회올리는 무지개빛 허울의 눈부심에 넋 빼앗기지 말고

  철따라 푸짐히 두레를 먹던 정자나무 마을로 돌아가자 미끈덩한 기생충의 생리와 허식에 인이 배기기 전으로 눈빛 아침처럼 빛나던 우리들의 고향 병들지 않은 젊음으로 찾아가자꾸나

 

  향아 허물어질까 두렵노라 얼굴 생김새 맞지 않는 발돋움의 흉낼랑 그만 내자

  들국화처럼 소박한 목숨을 가꾸기 위하여 맨발을 벗고 콩바심하던 차라리 그 미개지에로 가자 달이 뜨는 명절밤 비단치마를 나부끼며 떼지어 춤추던 전설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내ㅅ물 구비치는 싱싱한 마음밭으로 돌아가자.( 「香아」 제4,5연 )

 

  1920년대 초의 젊은 이상화는 이름도 낯선 마돈나를 부르며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처럼 "나의 침실"로 가자고 했다. 신동엽씨는 40년 전의 그 이상화의 목청을 그대로 이어 받으면서 그러나 '빛나던 우리들의 고향", "병들지 않은 젊음", "싱싱한 마음밭"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한다. 작품 「향아」가 발표된 1959년에만 해도 그의 호소는 메아리 없는 부르짖음이었다. 그러나 4·19를 경험한 1960년대의 역사는 "얼굴 생김새 맞지 않는 발돋움의 흉낼랑 그만 내자"는 자각이 보편화되는 과정이었고, 이 과정에서 신동엽씨의 전진적인 역사의식은 보배처럼 귀하고 샛별처럼 빛났다.

  1950년대의 전 기간 동안 김수영씨는 자기의 시적인 출발점으로서의 모더니즘과 피투성이의 가열한 싸움을 치뤘고, 그리하여 60년대에는 날카로운 시회의식으로 온갖 문단적인 관료주의와 문학적인 몽매성에 대한 세찬 도전을 감행했다. 50년대 끝무렵에 한 사람의 <촌놈> 시인으로 나타난 신동엽씨는 외래 사조에 휩쓸려 제 정신을 못 차리는 이 사회의 비주체성을 통렬히 공박했다. 이렇게 이 두 시인은 성장의 환경이 다르고 시적인 출발이 달랐으나 60년대의 중반에 이르러 마침내 일종의 정신적인 연합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그것은 민중문학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고은, 신경림, 조태일, 김지하, 그밖의 많은 젊은 시인들이 오늘 이 시대가 부과한 문학적인 사명을 이만큼이나마 수행하게 된 것은 오직 이 두 시인들의 이러한 선구적인 작업 위에서 가능하다.

  두 시인을 생각할 때면 가끔 신동엽씨의 수필 「금강잡기」가 떠오른다. 거기 보면 여러해 전 부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은 새벽 잠을 깼다. 그런데 이 뇌성은 10분도 못가서 잠잠해지고 다시 하늘은 맑게 개었다. 이날 아침 마을과 읍내에는 놀라운 소문이 퍼졌다. 아까 그 천둥, 번개가 있기 조금 전에 세 사람의 여승이 조약돌을 가득 담은 바랑을 허리와 어깨에 졸라매고 한 줄로 서서 조용히 강의 중심을 향해 걸어들어가 그대로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때마침 건너 마을 사공이 날씨를 살피러 바깥에 나왔다가 어스름 속에서 물소리를 내며 강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상한 세 그림자를 발견하고 놀라서 이웃 청년들을 소리쳐 불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며 뇌성벽력이 쳤다고 한다. 소나기와 천둥이 잠잠해진 다음에야 부락민들과 절의 승려들이 배를 동원하여 낚시와 삿대로 강속을 더듬었으나 두어 시간 만에 가장 나이어린 여승의 시체를 건졌을 뿐, 끝내 나머지 두 사람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 신동엽씨는 초여름의 투명한 햇빛이 영롱하게 비추는 호밀밭 사이를 지나 강변에 이르렀다. 그리고 둘러서 있는 사람들 틈에 끼어, 축축한 모래밭에 거적대기를 깔고 그 위에 눕혀 놓은 여승의 시체를 보았다. 신동엽씨는 그날의 감동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그곳을 빠져 나와 강 기슭을 거슬러 한없이 걸었다. 언젠가 버리고 온 내 가슴에 낡은 담장이 자취없이 무너져 내리고, 그 무너져 내린 담장의 자리 위에서 조그만 꽃씨 하나가 말없이 떡잎을 갈라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승 저켠 피안의 세계에 무엇을 보았길래 그들은 세 사람이 동시에 서쪽 하늘을 향해 합장하고 행렬지어 한 가닥 미련없이 점점 깊어지는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멀고 먼 그 겨냥을 향해 아무 잡티 없이 달려가는 빠른 화살이 되게 했을까."

  이 글에는 몇해 뒤에 찾아올 김수영과 신동엽 자기들의 죽음에 대한 예감이 섬광처럼 번뜩이고 있는 듯하다. "멀고 먼 겨냥을 향해 아무 잡티 없이 달려가는 빠른 화살"이란 표현이야말로  그 자신들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도 간결한 묘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수영씨와 신동엽씨가 한 해를 사이에 두고 잇달아 세상을 떠난 데 대해 "서로 닮은 형제가 한 끈에 끌려 어디엔가로 떠나 버린 것 같은 감을 준다"고 구중서씨가 말했을 때, 그것은 바랑에 조약돌을 가득 담고서 조용히 강물을 향해 걸어 들어간 젊은 여승들의 행렬에서 신동엽씨가 느꼈던 것과 꼭 같은, 다음 시대의 위대한 성취를 위해 앞 시대의 모든 죄업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몸바쳐 희생으로 사라지려는 순교자의 장렬함, 그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지 어언 10년이 가까워지는 오늘, 그들의 노래가 점점 더 우렁차게 울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 김수영, 「풀」 제2연 )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일어서는 달.( 신동엽, 「4월은 갈아엎는 달」 마지막 연 )]

 

  김수영에 대한 신동엽의 평이 그럴싸하다.

  " 김수영은 말장난을 미워했다. 말장난은 부패한 소비성 문화 위에 기생하는 기생벌레라고 생각했다. 창조만이 문화의 본질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육성으로 아랫배에서부터 울려나오는 그 거칠고 육중한 육성으로 피와 살을 내갈렸다. 그의 육성이 물어 떨어지는 곳에 사상의 꽃이 피었다. 정말로 민족적인 것, 정말로 순수한 것, 정말로 인간적인 것 등을 부정하는 코카콜라 상품주의의 촉수들이 그이를 미워하고 공격했다. 우리들이 하고 앞으로 해나갈 문학과 관련해 그 어떤 주의니 유파니 하는 것들의 노예가 될 수 없는 일이라고 늘 말했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김수영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한시도 같이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의 시가 그랬고 생활도 그랬다. 혹시라도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여러 사람 앞에서도 욕을 해댈 정도였다. 특히 술을 마시면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는 왠지 깔끔하게 정리된 사람을 싫어했다. 빈틈이 없어 보이는 완벽주의자도 싫어했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그만큼 솔직하게 시를 쓰는 김수영은 참으로 인간적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