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명(1900 - 1968, 강원도 강릉)
오늘날 가곡으로 많이 부르는 [파초], [수선화], [내마음]의 시인이다. 그는 1900년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 노동리에서 태어났다. 1915년 함흥으로 이사해 영생중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한 이듬해부터 그는 평안남도의 강서, 신의주, 함경남도의 원산, 안변 등지에서 교사생활을 한다.
1923년 김동명은 『개벽』 10월호에 시 [당신이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다. 그는 이 시를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에게 바친다고 했다.
1936년에 그의 문학적 입지를 다져준 시집 『파초』가 나온다. 『파초』는 남국의 식물인 파초가 겨울 뜨락에 외롭게 서 있는 것을 보며 조국을 잃어버린 비애를 되새기는 내용의 작품이다. 김동명의 대표작으로서 국정교과서에 실리면서 널리 알려진다.
그는 이재에 밝고 사업 수완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정치적 센스도 날카로운 편이었다. 1938년께 목상(木商)을 해서 큰 돈을 번 그는 양곡배급소를 경영하고 신탄 조합장으로 추대되기도 한다. 그는 일제 말기에 이미 일제가 패망하고 일본사람들이 떠날 것을 예상해 흥남 역전에 많은 땅을 사두기도 한다. 광복 뒤에는 흥남시 자취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활동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병을 핑계로 그 자리를 떠난다. 이어 그는 흥남중학교 교장직을 맡는데, 1946년 3월 13일에 함흥에서 일어난 학생시위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교화소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다.
1946년에는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에 입당해 함경남도 도당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는다. 그런데 북한의 실력자로 떠오른 김일성은 조선민주당의 당원이 10만명을 넘어서자 조만식을 비롯한 지도부에 대한 회유와 숙청을 시작한다. 동명은 1946년 12월에 출당 통고를 받고 집에 틀어박혀 시를 쓰며 지낸다.
1947년 4월 13일, 북한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신변의 위험을 감지한 그는 허름한 차림에 수건, 비누, 면도기 등을 신문지에 싼 간편한 행장으로 단신 월남한다. 1947년 단신 월남할 때 김동명은 시 원고를 갖고 내려오지 못한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시 원고를 옥양목 쪼가리에 베낀 뒤 생후 7개월째 되는 아이의 배에 감아 무사히 보존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이렇게 해서 빛을 보게 된 시집이 1953년에 나온 『진주만』이다.
그는 남녁으로 온 뒤 이화여대 교수를 지내며 여런 신문에 정치 평론을 기고하는 등 논객으로도 활동한다. 1947년에 펴낸 『하늘』과 1953년에 펴낸 『진주만』에 실린 시들은 『파초』에서 거둔 문학적 성취를 뛰어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1968년 1월21일, 김동환은 숙환으로 숨지고, 그의 장례는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다음은 '양승준, 양승국 공저 [한국현대시 400선-이해와 감상]'에 소개된 내용이다.
<김동명이 남긴 시 한편을 꼽으라면 제일 먼저 입에서 흥얼거려지는 작품이 [내 마음은]이다. 너무 순수하고 너무 아름답고 너무 완벽한 사랑의 시편이다.
이런 비단결 같은 시를 남긴 김동명이지만 그의 일생은 곡절이 너무 많고 가슴 아픈 참변도 여러 번 있었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그는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갔다. 강원도 명주군 노동리 산골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여장부 어머니 덕분에 신학문을 배울 수 있었고 순전히 남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할 수 있었다.
68세 되던 1968년 1월 그가 중풍으로 타계할 무렵, 그는 직업도 없고 원고료 수입도 없는 빨간 맨손이었다. 살던 집을 줄이고 줄여서 약값 대다가 마지막은 '서울의 시골 지역' 남가좌동 모래내의 다 허물어져가는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빈수래 빈수거(貧手來貧手去)라고나 할까.
김동명은 자기의 아호를 초허(超虛)라고 스스로 지었으나 한번도 써먹지 않았고 또 자기의 일생을 초허(超虛)스럽게 살지도 않았다. 일 욕심이 많은 그는 남이 하는 짓은 모두 해보려고 했다. 20대에는 시인으로 이름을 얻었고 30대에는 장사 수완을 발휘해서 목재상, 땔나무 장사, 양곡배급소까지 경영해서 큰돈을 만져 보았는데 심지어는 흥남 역전에 부동산 투기를 크게 하기도 했다. 통일이 되어서 요행히 원 소유권이 찾아지면 그 자녀들이 막대한 땅을 유산 받게 될 것이다.
40대부터 김동명은 흥남을 떠나 서울에서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어느 날 그는 신문지에 세면 도구를 싸서 들고 '어슬렁어슬렁' 동해안 금강산 산기슭을 걸어 그만 월남을 해 버렸다. 해방 후에 생긴 정당에 관여했다가 별재미를 못보고 흥남에서 여러모로 물을 먹은 그는 서울살이를 결심하고 가족들을 잇달아 불러들였다. 서울에는 김사익(金士翼), 김재준(金在俊), 송창근(宋昌根) 등 신학 계통의 선배들이 있어 큰 도움을 받게 되고 곧 이화 여대 교수직을 얻게 된다.
학자의 일을 하는 한편, 그는 정치가적 기질도 발휘해서 조선 민주당 정치부장도 하고 민주 국민당 문화부장도 한다. 흥남에 있을 때는 조선 민주당 흥남시 지부당 위원장까지 했는데 최용건(崔鏞健)에게 밟혀서 내쫓기고 절치 부심하다가 월남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결국 4.19 이후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60세 되던 해에 참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5.16으로 그 자리마저 잃은 후로는 정해진 수입 없이 정치 평론, 시, 수필 등 닥치는 대로 써서 생활을 꾸려 나갔다.
김동명의 일생이 이처럼 좌충우돌 뛰는 말 같은 것은 그가 꽁생원 아버지를 닮지 않고 이통이 시원시원 틘 어머니의 기질을 이어받은 탓이었다. 그는 수필 등에서 아버지 이야기는 별로 안하고 어머니 이야기를 열심히 썼다. 어릴 때 어머니는 수없이 많은 설화, 고담을 들려주었고 심청전이니 장화홍련전이니 하여간 그때 나온 이야기책은 모두 읽어 아들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결코 외아들을 과보호하지 않았는데 아들을 새삼스레 한참 바라보다가 "암만 봐도 너는 못생겼다." 이러기도 하고, 아들이 집에 편지 한 장이라도 보내면 꼭 흠을 잡아서 "아직 멀었다. 너 친구 아무개의 글보다는 못하다."하는 식으로 아들을 채찍질했다.
강원도 산골 가난한 살림살이 박차고 흥남 부둣가에서 생선 장수라도 하는 것이 낫다고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였다. 금강산 아랫자락 산골에서 금강산 윗동네 항구 도시로 이사간 그 일이 바로 김동명을 오늘의 김동명으로 만든 계기였다. 산골 가난한 농군으로 늙어 죽을 아들을 시인으로, 대학교수로, 사업가로, 정치가로 만든 것은 바로 여장부 어머니의 넓은 식견 덕분이었다.
사실상 김동명의 야단스럽고 요란한 인생도 자기의 뜻에 의한 인생이 아니고 어떤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살아진' 인생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학생 시절에는 어머니에 얹혀서 살아졌고, 사회인이 되어서는 선배 동료의 도움으로 혹은 능력 있는 아내들(그는 세 번 결혼했는데 모두 처복이 있었다)의 뒷바라지 덕에 적토마 같은 한평생을 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 [내 마음은]에는 청순 가련형의 '수동적 마음'만 나타나 있을 뿐이다. 호수, 촛불, 나그네, 낙엽 이 모두가 연약하고 피동적인 상징물들이다. 흰 그림자, 비단 옷자락, 피리, 뜰은 모두 여성의 상징물이다. 김동명에 있어서 여성은 어머니의 상징어이자 아내들의 상징어라 보아도 좋다.
그는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만큼 여성을 사랑했고 모든 여성적인 것에 대해 다소곳이 포용하는 마음 자세를 평생 지니고 살았다. 그런 그의 마음 상태가 [내 마음은]과 같은 절창(絶唱)을 낳게 했다고 보아서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지 주로 여학생들이 김동명의 시들을 줄줄 잘 외운다. 그는 어떤 글 속에서, "세상에 여자를 있게 해주신 신의 은총이 한량없이 가슴 벅차고 감격스럽다고 했으며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어느새 버릇으로 되었다"고 쓴 일도 있다.>
다음은 김동명이 쓴 수필로서 어머니를 회상한 내용이다.
<타박타박 타박녀야! 너 어디로 울며 가뉘?
내 나이 어렷을 제,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혹은 '코쿨' 앞에 마주 앉아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말하면, 달 속의 계수나무와 옥토끼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은하수 가의 견우 직녀 이야기, 천태산 마구[麻姑] 할멈 이야기, 구미호 이야기, 장사 이야기, 신선 이야기, 그리고 '유충렬전', '조웅전', '장화 홍련전', '심청전' 등 고담책(古談冊) 이야기며, 이 밖에도 이루 들 수 없도록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마는, 그 가운데서도 슬프기로는 타박녀의 이야기가 으뜸이었다.
영영 가버린 어머니를 찾아, 슬피 울며 타박타박 걸어가는 타박녀!
어디선가, 타박녀의 흐느끼는 울음소리 귓가에 들리는 듯하면, 타박타박 걸어가는 타박녀의 뒷모습이 눈앞에 선하여, 나는 이 슬픈 환상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아, 타박녀의 울음소리, 타박녀의 뒷모습!
이것은 바로 내 눈물의 옛 고향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도 어느 사이에 어머니를 잃은 '타박녀'가 되었구나. 더욱이 나는 어머니와 함께 눈물도 동심도 다 잃어버린, 세상에도 가엾은 고아가 되고 말았구나!
내 나이 어렸을 제, 우리들이 타관에 나와 단칸방 셋방살이로 돌아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어떤 날 나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내가 이다암에 커서 무엇이 되기를 바라나?"(나는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반말을 썼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다소의 과대망상증을 가진 나는 자못 자신만만하다는 듯이, 어머니의 소원을 물었다. 순간 어머니의 눈은 빛나셨다. 내 신념에 움직이신 듯-그리고 은근하신 어조로,
"강릉 군수가 되어 주렴."
이것은 어머니의 향수. 고향으로 돌아가시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시리라. 그러나 비단옷이 아니고는 돌아가시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슬픈 결심이기도 하다.
언젠가, 어머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쓸쓸히 웃으시며,
"암만해도 너는 좀 못생겼어."
이것은 내 어머니의 무서운 야심이신가. 또한, 그 냉엄하신 비평 정신의 편린이시기도 하리라.
나는 수염을 깎고 새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설 때면, 가끔 어머니의 말씀을 회상하고 고미소(苦微笑)를 흘리는 버릇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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