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1926- , 경북 안동)
아래는 김강태의 글을 줄인 것입니다.
[편찮다는 소식도 접한 뒤라, 간단한 인터뷰를 생각한 터에 당신의 낯빛을 살피느라고 우리 가슴은 조마조마했다. 위궤양이 재발하여, 부인의 담석 수술 직후 곧바로 입퇴원을 하신 모습으로는 의외로 원만해보였다. 진해의 <김달진 문학제> 세미나에 참여한 뒤 토혈·토사를 하면서 김해 공항에서 급거 귀경, 입원하기까지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는 선생의 말씀은 아직도 다소 떨렸다. 구석진 음식점에서 편치않게 먹은 음식 탓이었다고. 그 좋아하는 담배도 끊은 선생은 두 사람의 손님을 반갑게 빈객으로 흔쾌히 맞아주셨다. 나는 따뜻한 분위기의 응접실에서 김종길 시인의 따뜻한 시 <성탄제>를 떠올린다.
(전략)/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흐르는 까닭일까.
이 작품의 일부, 예를 들면 ‘산수유 붉은 알알’은 어린 시절 시인의 생체험이다. 성탄제와 산수유, 그리고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은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걸까. 왜 이 제목이 작품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 싶은 <성탄제>일까. 새삼 설명이 필요치 않겠지만, 실제로 사그라드는 어린 핏줄의 목숨을 위해 뜨거운 부성애를 보인 아버지의 모습은 성스러움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 시는 조용히 음독할수록 ‘서러운 서른 살’, 아니 마흔의 나이에도 불현듯 모든 이들의 아버지의 서느런(=뜨거운) 옷자락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여기서 시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보자. 시인은 1926년 음 4월 5일, 경북 안동군 임동면에서 부친 김문대 씨와 모친 이영희 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작가 이문열의 동네이기도 한 부촌인 석보면 원리동에서 자랐다. 그는 어린 5세 때부터 증조부에게 한문을 배운다. 한학에 밝은 증조부는 종길이 한학에 젖기를 원했으나, 외가는 신교육을 베풀어 종길은 양자를 다 접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종길이 만 2.5세 때 조그만 발진같은 종기가 화근이 되어 황망히 돌아가셨다. 외가에서 ‘너, 커서 뭐할래?’ 하고 물으면 ‘소설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진보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수재들만 모인다는 대구사범학교 심상과를 입학한다. 청년 종길은 혼자서 글짓기·독서·동서양 시, 그 중에서도 폴 발레리를 특히 공부한다. 무척 난해했지만, 일역본 발레리 전집을 독파하기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눈을 뜬 것이다.
졸업한 뒤 안동 서부초등학교와 대구공업고등학교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이한 그 해 11월, 현 동국대학교인 혜화전문 문과에 입학한다. 그 곳에서 양주동, 이하윤, 김광섭, 변영로 선생 등, 당대 최고인 학자들에게 배운다. 양주동 선생은 강의 도중, 온통 백묵가루를 뒤집어 쓴 모습으로 열강하셨고, 한문과 영문학 담당인 변영로 선생은 인상 착의가 유별나셨다. 모시 두루마기 차림의 전형적인 촌로로 맨발에 대님을 맨 채 구두를 신었으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고.
김종길은 해방 직후, 외가에서 서정주의 《화사집》·유치환의 《청마시초》·《문장》지 등을 읽는 호기를 갖는다. 불어·독일어도 배우고, 시인 보들레르·투르게니에프의 영역본에도 흥미를 느낀 해였다. 이듬해 시인의 삶에 중요한 반려인 윤석중 선생과 그 곳(을유문화사)에서 교정 보던 박두진·조지훈 시인을 만나다. 6년 연상인 동탁 지훈과는 허교許交(관습상 7년까지 인정했다)하는 사이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지훈을 좋아하는 이유는 시의 훌륭함도 있겠지만, 선생이 선비의 길을 밝힌 <지조론>에 입각힌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어서 '47년 1월, 드디어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문>이 차석 입선, 등단하면서 당시 경향신문 주필인 정지용 시인을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일제 말 휘문중학 조선어 교사였던 정지용. 왜놈들의 우리말 말살 정책 탓으로 영어를 가르쳤지만 뜻모를 웃음 지으며 늘 시상에 젖었던 그는 진정 부드럽기 그지없는 호인이었다고 한다.
혜화전문이 동국대학으로 정식 개명이 되면서 1년을 수학한 젊은 종길은 영문학에 흥미를 느껴 영시·시론에 밝다는 선생을 찾아 고려대로 편입한다. 수험생 20명 중, 입학자는 그 혼자였다. 거기서 만난 분이 이인수 교수였다.
김종길은 1948년 2월에 지금의 부인 강신향과 결혼하다. 그리고 11월, 훗날 영국 유학길에 인생의 중요한 만남을 가질 엘리어트의 《황무지》를 이인수 교수의 지시로 번역한다. 불교 성향의 <연모>·<노을>과 기독교 경향의 <성탄제>를 연상하면서, 그의 종교관에 대해 질문해보았다. 종교는 굳이 갖고 있지 않아요, 유가 쪽으로 기울어 있지요. 신앙은 없지만 다만 인간의 내면적 종교 성향은 존중해요.
1950년, 영문과를 졸업하면서 대학원에 입학한다. 민족의 비극 6·25가 터지고 공부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뒤 통역과 피난 중에 강사·교사를 겸임하다가 '1954년 경북대 영문과 전임강사가 되고 나서 <이십세기 영시선>을 번역한다. 이때 청마 유치환을 만난 것. 청마와는 한 학기 동안 함께 근무했다. 현 영남대인 청구대학에도 재직했으나 1958년 고대 영문과로 적을 옮기게 되어 서울로 이주하고 다음 해에 <세계서정시선>을 간행한다.
1960년은 김종길 시인에게 중요한 한 해였다. 영국 문화원 시험을 통과한 그는 셰필드 대학으로 유학 가서 오랜 동반자 윌리엄 엠프슨(William Empson) 교수를 만난다. 김 시인은 엠프슨의 소개장을 통해 엘리어트를 만나기도 한다.
몇 군데를 여행한 뒤 돌아온 김 시인은 1965년에 《시론》을 간행한다. 번역본 《폭풍의 언덕》을 발간하고 드디어 1969년에 시집 《성탄제》를 상재하는 기쁨에 젖는다. 이후 《진실과 언어》, 《하회에서》, 《황사현상》등의 시집을 출간한다. 1992는 고려대에서 정년 퇴임한다.
1989년 위궤양으로 고대 부속병원에 입원하면서 그는 건강의 이상 징후를 처음으로 느낀다. 피로와 담배 때문이었다.
시인은 작가들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어떤 기록이라도 절대로 버리지 말고 소중히 간직하라고. 한 예로, 버트란트 러셀은 어느 여인에게 띄우는 편지를 7천여통을 남겼다고 한다. 김 시인은 쪽지·낙서·잡기 등, 아무 것이나 시인의 기록물은 남기자는 것. 그는 아쉽게도 일제 때의 자기 기록(서간집)이 없음을 매우 서럽게 생각한다.
그는 모든 면에서 적당주의를 경멸하고 거짓에 대한 결벽증을 갖고 있다. 솔직하고 겸허하게 모지람을 수용하여 채워나가자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아마 진정한 선비로, 어떤 때에도 직언을 서슴치 않았지만 반면에 신중하고 관대했던 동탁 조지훈을 닮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한편, 미당에 푹 빠진 오탁번 시인은 학부 시절의 은사인 김종길 시인에 대해 이렇게 품평한다. 시작품의 비의(秘義)를 정확무비하게 꿰뚫어보는 비평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김종길 시인을 든다. 내가 영문과 학생이었을 때의 잊을 수 없는 스승이기도 한 그분은 옆사람이 주눅들 정도로 언제나 시작품이 숨기고 있는 오묘한 비밀, 그 작품을 쓴 시인마저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시적 의미를 정확한 유추와 직감으로 밝혀내곤 하였다.(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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