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ㄱ-ㅁ)

김지하(1941- , 전남 목포)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4:05

김지하(1941- , 전남 목포)

 

 1970년에 젊은이 김지하가 발표한 '오적(五賊)'이라는 시는 한 때 세상을 발끈 뒤집퍼 놓은 시이다.  김지하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다섯 놈들을 5적이라 했다.

지하(芝河)라는 필명으로 5적을 발표한 김영일은 5적 서두에 매를 맞지 않아 볼기짝이 근질거리고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써야겠다는 말을 한다. 아마도 이 시구가 5적 발표 후 8년 여 장기 영어(囹圄) 생활을 하게한 어떤 영감이었는지 모른다.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다시 쳐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김지하, `1974년 1월' 앞부분).

윗시 `1974년 1월'은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의 발동과 더불어 잠적한 시인이 강릉에 도망가 있으면서 구상한 것이다.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겁먹은 얼굴/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설악산 백담사 근처 암자를 거쳐 강릉으로 내려온 시인은 옥천동 오거리의 `경북집'이라는 옥호를 단 집에서 오징어회에 소주를 마셨다. 방광이 부풀어 변소에 다녀오던 시인은 문득 벽에 걸린 깨진 거울을 들여다본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눈에는 핏발이 선 초췌한 몰골의 사내가 마주 보았다. 섬뜩했다. 거울에 비친 시인의 모습은 양면적이다. 그는 시대와 대결하는 투사인 동시에 지치고 나약한 여느 필부(匹夫)의 면모도 내비친다. `불퇴진의 민주투사 김지하'의 신화는 시인 자신에 의해 벗겨진다. “겁이 없어서 목숨을 내놓고 싸운 것은 아니었다. 겁내는 자신을 채찍질하고 추스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 것”이라는 시인의 말은 그의 싸움을 오히려 더욱 숭고하고 값진 것으로 만든다.

시대와 불화한 데 따른 시인의 수난과 그에 대한 문학적 대응은 대체로 박정희의 통치기와 겹친다. 그는 64년 6월3일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에 가담해 처음으로 4개월 간의 감옥 체험을 한 이래 60, 70년대를 거치면서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한 싸움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70년대란 박정희와 김지하의 대결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물론, 70년대가유독 문인들의 참여와 행동이 두드러진 시대이긴 했지만, 지하는 단연 그 뜨거운 상징이었다.

장남의 출생도 지켜보지 못하고 도피행각을 벌이던 시인은 대흑산도에서 체포되고, 민청학련사건 관련 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 내가 요구하고 내가 쟁취하려고 싸우는 것은 철저한 민주주의, 철저한 말의 자유-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이다. 내가 카톨릭 신자이며, 억압받는 한국 민중의 하나이며, 특권, 부패, 독재, 권력을 철저히 증오하는 한 젊은이라는 사실 이외에 나 자신을 굳이 무슨 주의자로 규정하려고 한다면, 나는 이 대답밖에 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백성을 사랑하는 위정자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피와 시민의 칼을 두려워하는 권력을 바란다."

 김지하의 옥중 양심선언의 일부이다. 또“현 정권은 무너지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재판정에서의 진술이었다.

김지하씨는 여전히 옥 안에 있으면서 박정희의 암살 소식을 듣는다. 그 날은 옥 안에서 시작한 참선이 꼭 1백일째를 맞은 날이었다.

“참선 덕분에 퍽 가라앉은 상태에서 방송을 들었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무상하다는 것이었다. 저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잘 가시오. 나도 뒤따라 가리다.'”

`투사 김지하'가 `생명사상가'로 변신한 것이 박정희의 죽음을 전후한 무렵이었다. 옥방 창틀에 싹을 틔운 민들레를 보고서 생명의 신비와 소중함에 눈을 떴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시인 자신은 단절적이지 않고 연속적인 흐름이라고 설명하지만, 투사 김지하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이들에게 그같은 변모는 당혹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쓴 홍세화 씨는 김지하 씨를 이렇게 기억한다.

[어쩌다 우리들의 주머니 사정이 허라하면 명륜동 쪽의 허름한 술집도 찾았다. 김지하 선배는 주로 소주를 마셨고 안주는 사과뿐이었다. …우리는 술을 마셨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 허탈감과 울분을 삭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래도 모자라 우리는 드디어 찢어지기를 거부하고 한데 어울려 밤을 함께 보냈다. 그렇게 보냈던 밤이었다. 나는 '새벽을 밝히는 시혼(詩魂)을 보았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새벽을 밝히는 시혼을

 그날 우리는 늦게까지 마시며,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야"라며 연습(박정희 정권을 풍자한 연극 공연을 연습하다가 좌절됨)으로 끝난 것에 서운해하지 말자고 서로 위로하며 떠들었다. 그리고 한 방에서 모두 함께 동숙하였다. 술이 약한 나는 금방 나가떨어지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하나씩 누워 잠들기 시작하여 밤이 이슥했을 때는 모두 잠에 떨어졌다. 얼마나 잤을까, 나는 소변이 보고 싶어 부스스 일어났다. 그 때였다. 누군가가 한쪽 구석의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새벽의 희미한 빛을 받아 무언가 쓰고 있는 사람은 김지하 선배였다.  나는 감히 아무 말도 못 붙이고 슬그머니 화장실에 다녀왔고 또 슬그머니 잠 드는 척했다. 그가 두세 시간밖에 잠을 못 잔 것인지 아니면 전혀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채였다. 그후 내가 그의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를 접했을 때, 그 때의 모습이 그대로 다가왔다. 바로 그 때 쓴 시였을 것 같다는 강한 느낌과 함께.]

 아래는 시인이 <동아일보>에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이 바다로'라는 제목으로 1990년 10월 21일자에 게재한 내용이다.

 [우리 민족의 성스러운 흰머리 백두에서 시작한 산맥이 태백, 소백, 차령들로 굽이치면서 한반도의 꽁무니 목포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우뚝 유달산이 솟고 그 맥이 바다로 스며들기 직전에 뭉툭 웬 험상궂은 바위덩이로 솟아난 것이 바로 목포대, 그러니까 한반도의 똥구멍, 그 상스러운 자리에서 나는 태어났다. 1941년 생이다.

 내가 제일 무서워한 것이 '야경 똑딱'이었다 한다. 통금 뒤에 딱딱이를 치며 거리를 순찰하던 일제 때 야경, 의미심장하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이 옛날 이야기였다. 역시 팔자다.

 내가 나를 돌이켜봐도 나는 어리숙하고 말이 없고 서투른 아이였다. 찍하면 얻어터지기 일쑤고 빽하면 울기 일쑤였다. 대학에 가서까지도 그 모양이어서 말할 수 없이 깊은 상처를 받았다.

 연극을 하고 학생운동을 하면서부터 어느덧 말 잘하고 머리회전 빠르고 똑똑한 사람처럼 되었다. 그러나 그 뒤부터는 내가 도리어 남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무슨 이치일까.

 내가 지난날 그처럼 질기게 박정희와 그 정권에 대들었던 것은 물론 민주주의 민족통일 사회개혁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동기가 있다. 복수다, 그들은 내 아버지를 수차에 걸쳐 전기고문하여 고혈압으로 반병신되게 만들었고 어머니 머리끄덩이를 감고 잡아 제쳐 몇 차례나 졸도하게 만들었다. 숨어서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내가 다짐한 것은 내 목숨을 걸고 박정희를 쓰러뜨리겠다는 복수의 맹세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1979년 늦가을 어느 날 정오에 서대문감옥에서 박정희가 죽었다는 방송을 들었다. 그 순간 내 마음에 일어났던 일, 무상했다. 인생무상 권력무상. 나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잘 가시오, 나도 뒤따라가리다."

 참선 텃이었던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해골처럼 되어 백일째 참선을 하고 있었는데 사정은 이렇다. 1975년초 재구속되어 4년이 되도록 그 엄혹한 특수 격리 상태에서도 매일 매시간 퍽 낙천적으로 살았다. 그런데 4년이 지나면서부터 밤에 자리에 누우면 천장이 내려오고 벽이 다가들어오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소리지르고 싶어 못 견디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소리를 친다면 좋아할 사람은 박정희와 정보부뿐, 소리를 막으려고 손가락도 무던히 깨물었다. 그러니까 벽면증 같은 것인데 하여튼 위기를 느꼈다. 이런 상태에서는 장기적으로 못 버틴다. 못 버티면 참혹한 패배가 있을 뿐!

 그 무렵 철창 아래쪽 콘크리트와 철창 사이 작은 홈 파인 곳에 흙먼지가 쌓이고 거기에 풀씨가 날아와 빗방울을 빨아들여 싹이 돋고 잎이 나는 것을 보았다. 신기했다. 봄날 민들레 꽃씨가 철창 사이로 하얗게 날아 들어와 감방 안에 하늘하늘 나는 것도 보았다. 아름다웠다. 운동을 나갔다가 교도소 붉은 담벼락 위에 이름 모를 꽃들이 점점이 피어 작은 꽃망울까지 달고 있는 것도 보았다.

 그것을 본 날 감방에 돌아와 얼마나 울었던지, 생명! 이 말 한마디가 왜 그처럼 신선하고 힘있게 다가왔던지. 무궁 광대한 우주에 가득 찬 하나의 큰 생명, 처음도 끝도 없이 물결치는 한 흐름의 생명, 그것 앞에 담과 벽이 있을 리 없고, 죽음과 소멸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작아지고 좁쌀이 되고 협심증이 되고 분열증에 빠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이 생명의 큰 이치를 마음과 몸에 익힐 수 있을까.

 그날부터 참선에 관한 책들을 들여와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좌정했다. 참선을 하면서 나는 사람의 마음속이 얼마나 복잡하고 끔찍하고 추악한 것인가, 육욕과 미움에 가득 찬 것인가를 놀라움 속에서 알게 되었다. 삶과 죽음, 빛과 어둠, 긍정과 부정이 한 사태 속에 동시에, 그리고 혹은 극에서 극으로 끊임없이 반복 왕래한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죽으면 태어나고 죽고, 상처를 받으면 주게 되고 받게 되는 이치도 함께. 뭣인가 마음을 알게 되니까 마음이 가라앉았다. 선불교는 참으로 위대했다.

 긴 세월 내가 폐결핵과 가난으로 괴로워하면서 간직한 또 하나의 숙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넋과 밥, 성스러운 것과 상스러운 것, 개인과 사회, 인간과 우주자연 사이의 통일의 꿈이다. 감옥에서 만난 수운과 해월의 동학은 여기에 답을 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체 삼라만상이 다 신령한 생명이니 공경하라는 것이다. 동학과 불교 그리고 기독교, 이것은 생명의 세계관이다. 생명! 이것은 나의 '열쇠말'이다. 이 열쇠로 나는 저 드넓은 우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이 열쇠로 이제는 이 뻑뻑한 역사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상놈 민초가 '한울이 되고 부처가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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