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우(1934-1990, 전남 광주)
내(신경림) 머릿속에는 박봉우 시인이 몇 개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첫째는 파고다공원이다. 그는 1965년 가을 파고다 공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스승인 김현승 시인이 주례를 섰다. 70년대 말 박봉우 시인에게 들렀을 때, 술 두어 잔에 금방 취해 "나라의 온갖 것들을 쓸어내고 파고다 공원에서 민족 파고다 회담을 열자"고 주장하던 그의 격앙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또 하나는 활화산의 이미지다. 50년대 중엽 [휴전선]이 조선일보에 당선한 후 그는 곧장 상경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박성룡, 강태열, 정현웅 등 광주의 시문학도들의 모임인 '영도'동인들과 특별히 가까웠기 때문에 자연히 그 동인인 박봉우 시인과도 명동 등에서 잘 어울렸다. 박봉우 시인의 첫인상은 무골호인이었다. 수염자국이 검은 길쭉한 얼굴에 늘 웃음을 띠고 있었고 허허대고 웃기를 좋아했으며 누가 술을 사겠다면 턱없이 좋아하면서 "참 좋은 사람이여" 소리를 연발했다. 그러다 취기가 오르면(그는 술이 별로 세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일어나 큰 소리로 자작시를 암송하기도 하고, 정연하지 못한 말씨로 사회정의 같은 것을 외치기도 했다. 나는 그가 불같이 흥분해서 밖으로 달려나가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무언가 마땅치 않으면 그랬다. 공연히 길가 건물 층계를 달려 올라가기도 하고 파출소로 달려 들어가 순경을 혼내기도 했다. 이 때의 그의 모습은 활화산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그를 또 세상사에 대범한 사람으로도 기억하고 있다. 60년대 말 오랜만에 그를 만났을 때 그는 호구지책으로 백시걸이라는 무명시인 밑에서 전사(戰史) 편찬 일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백시걸과 이웃해 사는 탓으로 함께 술자리를 벌이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백시걸은 박봉우 시인이 일에 서투르고 무심한 것을 화제로 올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문장이 서투르다고 흉을 봐도 허허 웃고 교정이 영 돼먹지 않았다고 핀잔을 해도 웃기만 했다. 변명도 하지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를 비판하던 목소리는 그래서 맥이 빠졌고, 술자리는 번번이 예의 그 들뜨고 흥분된 박봉우 분위기에 지배당하게 되었다.
난지도 쓰레기장의 퀴퀴한 악취가 바람에 몰려오던 상암동 산동네의 그의 집도 한번 가서 잔 일이 있다.
"이제 인세 받아 전세 얻을 계획이랑께." 그는 가난한 살림살이를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이어 그는 제대로 인사도 시키지 않는 아내한테 김치와 두부조림이 전부인 술상을 내오게 한 다음 아랫목에서 잠든 두 아이를 가리키면서 "큰 애가 하나가, 작은 애가 나라지"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고 사 가지고 들어간 소줏병을 땄지만, 나는 그런 모습에서 자잘한 세상살이를 훌쩍 뛰어넘은 대시인이 풍모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조금씩 정신질환이 생긴 그는 '서울 하야식(下野式)'이라는 시를 남기고 전주로 낙향한다. 그 사이 그는 가령 크리스마스날 밤 소란스러운 술집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나 빨치산 노래를 불러 좌중을 침묵시켰다든가, 달리는 버스 안에서 하늘과 땅이 맞붙은 다음 새롭게 열리는 개벽을 외쳐대다가 정보형사한테 끌려갔다든가, 정신병원으로 면회를 간 친구한테 김소월을 만났다고 주장했다는 등 많은 일화를 남겨 기인 소리를 듣기도 했다.
전주에서의 그의 생활은 항상 술을 마시는 일, 골목을 흔들리면서 걷는 일이었다. 85년 아내를 병으로 잃은 뒤 그의 생활은 더욱 곤궁했고 처참했다. 이런 생활을 5년을 더 계속한 뒤 아내와 등성이 하나를 사이에 둔 전주 시립묘지에 영주하게 된다.
- 신경림, 시인을 찾아서, 우리교육,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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