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1750-1805, 서울 출생)
박제가는 학자적 소양이 풍부했으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서얼 출신의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년. 그래서 그는 사회적 소외감 속에서 내적 갈등과 싸우며 살아야 했다고 한다.
박제가(朴齊家)는 역사적 전환기에 치열하게 살다간 문인이자 경제학자였으며 화가였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주류를 거슬러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용감한 비주류였다. 그는 나라 살림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물을 도입할 것 등 중상주의적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대부분 비주류의 경우가 그렇듯 그의 주장은 주류의 ‘무관심’에 묻혀버렸다.
박제가는 1750년 11월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밀양 박씨이며 아버지는 부승지(副承旨)를 지낸 박평(朴坪·1700∼1760)이었다. ‘열한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묵동 집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필동으로, 거기서 묵동으로 갔다가 또 필동으로 전전하며 간신히 연명해 돌이켜 생각하기에도 끔찍스럽다’고 소년시절을 술회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혼자 되신 후로는 드실 음식이 없었고, 해진 솜옷이나마 몸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신 채 새벽닭이 울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하셨다’고 애달퍼했다. 하지만 ‘아들이 사귀는 이가 종종 어른과 손윗사람 등 이름있는 분들이었으므로 아들을 위해서라면 있는 힘을 다해 잘 대접했다. 그래서 아들만 보고는 그의 가난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적었다.
이렇게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바로 이때 그는 자신의 문예활동에 큰 영향을 준 박지원과 이덕무·유득공 등을 만났다. 그는 연암 박지원이 당대의 명문장가라는 말을 듣고 탑골 북쪽으로 찾아간다.
이덕무를 통해 이미 박제가를 알고 있던 연암은 제가보다 열세살 손위였으나 옷매무새도 가다듬지 않고 뛰어나와 옛친구처럼 손을 잡고 자기 글을 모두 꺼내 읽어주었고, 몸소 밥을 지어주며 오래 살라고 술까지 부어주었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그는 탑골 근처에 살던 이덕무와 유득공·이서구·서상수·유련 등과 함께 어울리며 스스로의 말처럼 ‘한번 가면 열흘이고 스무날이고 돌아올 줄 모르는’ 사이가 됐다. 그가 얼마나 이들을 그리워하고 소중히 생각했는가는 ‘신혼 초야를 지내자마자 장인의 말을 빌려 타고 처가에서 빠져나와 이들과 술을 마셨다’는 일화라든지 ‘형제라도 같은 기질 아닐 수 있고/부부라도 한 방을 쓰지 않을 수 있지만//사람은 하루라도 벗이 없으면/마치 좌우 손을 잃은 것 같네’라고 읊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덕무나 유득공과는 신분적 동질성과 시(詩)·서(書)·화(畵) 전반에 걸친 공통적 예술취향으로 평생의 지기(知己)가 된다.
나라를 위해 고심하며 울분을 글로 삭인 “이소”(離騷)를 유독 즐겨 읽은 것은 그가 평탄하지 못한 삶 속에서 겪는 갈등과 고뇌를 문학을 통해 해소하려 함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들 중 특히 이덕무는 박제가보다 아홉살 위였으나 의기투합하는 사우(師友)로서 가장 돈독한 관계였다. 이덕무는 박제가에 대해 백동수의 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수줍고 내성적이어서 남에게는 별로 말이 없었는데 내게는 말을 잘 했다. 비바람 들이치는 집에서 등불을 밝히고 있는 속 그대로 조금도 숨김없이 이야기하다 격해지면 서로 슬퍼하고, 좋아지면 서로 기뻐하면서 조용히 바라보고 웃었다’고 썼다.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서구 네사람은 연경(燕京·베이징) 문단에 사가(四家)라고 소개되면서 중국 문인들의 높은 찬사와 인정을 받았다. 이들의 시는 우리의 현실감각으로 생활감정을 다루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박제가가 임호상의 집에서 썼다는 시에는 ‘바람이 잔잔하니 향은 저 혼자 맑게 날고/단정히 앉아 눈 감으니 세속 인연 드물어라//가을소리 태반은 시 속으로 들어오고/밤빛은 괜시리 술 속으로 돌아드네//가물가물 푸른 등불 작은 방을 감싸안고/팔랑팔랑 지는 잎은 텅 빈 사립에 날아든다//바로 이때 개 한마리 표범처럼 짖어대는데/가지 끝에 걸린 별빛 다투어 옷깃 적시누나’라는 것이 있다. 고요한 가을밤 술잔을 앞에 두고 천지의 변화를 가까이에서 포착하는 산뜻하고 청신한 감각이 내비친다.
1800년 박제가의 정신적 지주였던 정조(51세)가 승하한다. 다음 해(순조 1년) 박제가는 신유사옥과 연루돼 함경도 경성부로 유배되었다가, 1805년 유배생활에서 해배된 후 바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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