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1958-, 전북 부안)
격포항에서 곰소항으로 가는 길에 자리잡은 한적한 어촌 마을이다. 차 한대 빠져나가기 힘든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낮은 집들이 서로 몸을 비껴 앉아 있다. 한밤중 밀물 때면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온다. 바다로 트인 마루에 앉으면 바다가 무릎 높이에서 일렁거린다. 시인 안도현이 ‘모항으로 가는 길’에서 쓴 것처럼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는 곳. 마을 옆 작은 동산에 올라서면 멀리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뒷산에는 천연기념물 122호인 호랑가시나무 군락과 수령 100년을 넘긴 팽나무가 있다. 모항에서 나고 자란 농부시인 박형진씨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지난해 8월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디새집)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박형진은 말한다.
"나는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평생 땅을 파먹고 살아왔지만 어인 판속인지 살림은 늘지 않고 빚만 늘어간다. 남들처럼 쓰지 않고 먹지 않고 땀 흘려 일해도 해마다 빚이 느니 사람 미칠 지경이다. 빚만 없다면 하늘에라도 오를 심정일 것 같다. 나에게 욕망이란 상향조정될 필요도 없이, 제발 돈의 폭력으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뿐이다.
그러기만 한다면 조그마한 내 논밭에 거름 넣고 미꾸라지 지렁이처럼 흙 속에서 뒹구는 일로 소일할 것이다. 땅에서 나오는 것들을 더 많이 이웃에게 나눠주고 흙집 토방마루 한켠을 열어서는 지나가는 길손을 불러 막걸리잔을 나눌 것이다. 옷이야 흉볼 사람 없을 테니 잠뱅이 하나쯤 걸쳐야지. 애들이 학교 가기 싫다면 보내지 않고……. 그리고는 걸어서 이 나라 산천을 꼭 한 번은 누비리라! 나에게 욕망의 상향조정은 이런 것일 뿐이다."
다음은 김광일 기자의 인터뷰 내용이다.
["사람과 흙은 서로 육화되는 과정이고라"
지난 일요일(17일), 하릴없이 쏟아지는 빗속에 전북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 31번지 띠목(모항)에 있는 농사꾼 시인 박형진을 만나러 갔다. 첫 질문부터 어깃장하게 비틀어 본 것은 그가 지난주 펴낸 산문집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디새집)가 원인이었다. 변산공동체 대표 윤구병씨가 헌사에 썼듯이 “때묻지 않은 우리말로 전해주는 가난한 이웃들의 진솔한 삶을 마주했을 때 느낀 흠칫한 기분” 때문이었다.
―‘정말로 잘 산다’는 게 뭡니까?
“물질적 풍요도 편리함도 아니지라우. 내가 농사 짓고 인간 사귀면서 느낀 바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지요. 사람은 결국 그렇게 가게 돼 있는디 사회적 제약이 그렇게 하덜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모항에서 칠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박형진은 도청국민학교 4학년 때 100권짜리 한국문학전집을 읽어버린 덕분에 “대가리만 굵어지고 학교 공부가 시들해져” 중학교 1학년 중퇴로 제도권 교육을 마감했다. 그리고 바로 농사일이니, 열네 살부터 논밭에 삶을 세운 셈이다. 서울로 도망도 쳐봤고, 외국인 선교사가 만든 학교도 다녀봤고, 고물장수도 해봤지만 자신은 타고난 농사꾼이었다. 18세 무렵 강원룡 목사가 하던 수원아카데미하우스에서 이우재 같은 이에게 배운 의식화 교육은 그에게 농민 운동가의 길도 열어 주었다.
1992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한 박형진은 농촌의 삶을 소재로 시집 ‘바구니 속 감자싹은 시들어가고’, ‘다시 들판에 서서’와 인기 산문집 ‘호박국에 밥 말아먹고 바다에 나가 별을 세던’을 낸 바 있다.
―글쓰는 것과 농사일 가운데 택일(擇一)을 하라면요?
“나눌 일이 아니지요. 나는 잔뼈가 굵었으니 그닥 힘들 건 없지만 종자 부실 혹은 가격 폭락으로 내다버릴 때 너무 지치고 팍팍하지요. 나로서는 술 보다는 글로 풀지요.”
박형진의 이번 책은 봉니, 갑열이, 종태, 오징개 양반 같은 동네사람들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울퉁불퉁 우습지만 속내 하나는 진국인 사람들이다. 유치원을 하던 이미자(李美子·44)씨와 결혼, 20여년 동안 모항을 떠나본 적이 없는 박형진도 아이를 넷 두었는데, 차례로 푸짐이, 꽃님이, 아루, 보리라는 고운 이름을 가졌다.
―자녀 교육 문제로 내외가 다툰 적은 없습니까?
“우린 공부 욕심 안 냅니다.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지요.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말로 얘들을 내몰고 싶잖습니다. 그냥 땅을 애끼는 품성을 원할 뿐이지요.”
―책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의 끝이 비극적인 이유는요?
“궁벽한 어촌과 산촌은 그럴 수밖에 없지요. 여길 떠나봤자 더 좋아질 것도 없고…. 자기 삶을 물려주기 싫어 서울로 가는 이도 있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은 태생지와 질긴 게 많기 때문이지요.”
불붙은몬당(조금만 가물면 나무에 불이 붙듯 한다는 바위산) 밑 큰 골에 남동향으로 30평짜리 ‘ㄱ’자 접집을 지어 살고 있는 박형진은 나락 농사 한 필지에 밭농사 1400평을 짓는다. ‘동지 겸 친구’라는 둘째 형 박배진씨와 이웃이다.
―사람과 자연 중 무엇을 더 사랑하십니까?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지요. 농사의 바탕은 흙이고, 관계 맺는 것은 사람이니까. 사람과 자연은 서로 육화되는 과정이고요.”]
'문인 일화(ㅂ-ㅇ)'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재삼(1933-1997, 일본 동경-->경남 삼천포) (0) | 2010.08.30 |
---|---|
박두진(1916-1998, 안성) (0) | 2010.08.30 |
박제가(1750-1805, 서울 출생) (0) | 2010.08.30 |
박봉우(1934-1990, 전남 광주) (0) | 2010.08.30 |
박용래(1925-1980, 충남 논산) (0) | 2010.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