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1916-1998, 안성)
이세기 씨는 말한다. 혜산 박두진의 생애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일컬어 '극기의 인물'로 평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앙상하리만큼 야윈 체구에 오랜 등산과 수석채집으로 다져진 강단은 일상생활에서도 불의에 굴하거나 적당주의나 시속의 타협이 없이 무엇을 하든 정의감과 선비적 자세를 지켜왔다. 김지하씨의 "오적"이 사법처리 대상이 되자 감정서를 통해 "독재정권이 계급주의 문학 내지는 이적 표현물로 몰아붙인 이 작품은 문학 본래의 사명과 책임에 충실한 결과로 오히려 우리의 민주 비판적 영향의 잠재력을 과시한 좋은 표징이 된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문단의 교분은 다양하지 않지만 월탄이 생존해 계실 때는 종로구 충신동 월탄 댁에 가끔 모여 [문주반생기]의 무애 양주동, [명정사십년]의 수주 변영로, 공초 오상순, 연포 이하윤 등 문단의 주호들과 맥주 두 잔의 술 실력으로 시를 주고받고 휘호를 치면서 밤을 새웠다.
박두진에게는 고향이라는 의미가 남달랐다.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경기도 안성의 '고장치기', 그 곳은 지금은 '오흥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그의 문학적 흔적이라 할 수 있는 서재가 남아있다. 그는 이 고장치기에서 집 앞으로 펼쳐진 높은 산과 넓은 들판, 그리고 푸른 하늘을 보며 시상을 키워 왔다. 그 시대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그의 유년은 풍족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가 살던 고장치기라는 마을은 다른 어느 마을보다도 빈촌이었다. 어려운 환경 때문에 그의 누나는 그와 떨어져서 공장에 취직하여 돈을 벌기도 했다. 이 누나는 동생 박두진에게 각별한 애정을 주었던 누나인데 공장에 나가 있을 때 많은 편지를 동생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누나는 결핵에 걸려서 죽게 된다. 박두진은 오랜 시간 동안 누나를 잊지 못했다
'고장치기' 그 곳에서 박두진은 언제나 집 마당에 나와서 그의 시적 배경이 되기도 한 청룡산을 바라보면서 시 세계와 사상의 기반과 골격을 형성 시켜 나갔다. 무엇보다도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고장치기의 하늘이었는데 그는 그 하늘에서 끝없이 푸르고, 끝없이 넓고, 끝없이 신비로우며, 끝없는 너그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그 하늘에서 완벽하고 절대적이고 그 자체로서 모든 것의 모든 것으로 군림하는 그러한 태양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태양을 시로 옮긴다. 그가 시로 옮긴 것은 비단 태양뿐만이 아니었다. 고장치기의 하늘에서 보았던 달과, 별 그리고 하늘의 기상마저도 그에게는 모두 아름다운 자연이었고, 훌륭한 시상이 될 수 있었다.
다음은 공석하 시인이 박두진 시인을 회고한 내용이다.
[박두진 선생님은 나와 고향(경기 안성)이 동향이시다. 그런 관계로 어릴 적에 몇 번 뵌 적이 있었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드린 것은 문단에 나와서다. 그리고 신촌에 있는 댁에도 몇 번 찾아뵌 적이 있다.
박두진 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을 갖게 된 것은 1980년 연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할 때이다. 학위논문 심사를 통과시킨 교수님들에게 사은을 하기 위하여 우리들 5명은 20여만원씩을 걷어서 담당교수님들에게 인사를 드리기로 합의하고는 다른 선물도 조금씩 준비했다. 그리고는 하루 날을 잡아 교수님댁을 한 분씩 찾아뵈었다. 마지막으로 “저희들의 조그만 성의입니다”라고 인사를 드리고 나서 우리들은 정중하게 촌지 봉투를 내밀었다.
“자네들도 어려울 텐데…. 이런 일은 하지 말게. 이미 학교에서 심사료는 받았네.”
“그래도 다른 교수님들께서는 다 받으셨는데….”
“넣어두게. 이런 일을 하려면 다시는 집에도 오지 말게.”
선생님께서 너무 완강하게 나오심으로 참 난처하게 됐다. 더구나 내 논문의 주심을 맡아주신 관계로, 특히 나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저희들이 공동으로 모금해서 준비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만 받지 않으시면 모금한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미, 받았다고 했네.”
선생님의 태도가 너무 완강했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모금한 것을 전달하지 못하고 차만 마시고 돌아왔다.
“그러니까, 그렇게 강인하고 좋은 시를 쓰시는 것이지. 학력도 거의 없으신 분이 대학교수까지 되신 것이고….”
박두진 선생님댁을 나오면서 같이 갔던 친구들의 말이었다.]
박두진은 돌에 대한 애착으로도 유명하다. 박두진의 30여년 간 계속 된 수석 사랑은 수석시집을 따로 간행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수석을 취미로 채집한다는 것 보다 그 속에서 새로운 자연을 발견해 내고 우주만물을 수석 속에 담아 내었다. 그의 이러한 면은 수석을 취미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꺼린 데에는 시를 취미로서 한다고 말할 수 없는데 그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그렇게 그는 수석과 시를 동격으로 보았다. 박두진이 처음 수석을 접하게 된 동기는 우연한 기회에 제자를 따라 남한강 유역의 최고급 수석의 산지라 할 수 있는 양평군 관내 양수리 돌밭이었다. 그가 첫 번째로 찾아 든 돌, 바로 그 한 점이 그대로 明石이었고, 그만큼 그에게는 황홀하고, 신비롭고, 충격적이었다. 그 때 까지 그가 생각해온 돌이라는 개념이 그 때의 체험으로 인해 완전히 새로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로 그의 수석생활이 전개되었다. 그는 수석을 위해서라면 혹한과 폭설, 장마의 홍수 때에도 피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큰 수석이라도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한 번은 역시 남한강으로 수석 채집을 나갔을 때 마음에 드는 수석을 발견했는데 수석이 너무나 커서 옮겨 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 인부들을 데리고 다시 남한강으로 가 수석을 옮겨오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서재 앞마당과 서재 안에는 그 때의 수석들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그의 남다른 수석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것은 특이하게도 수석에 수석 하나 하나에 그 모양이나 느껴지는 것을 토대로 빠짐 없이 이름을 붙여 주고 그것을 일일이 사진으로 찍어 스크랩을 해 둔 것에 있다고 하겠다. 그는 수석을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그가 수석에 몰두하는 동안, 그의 詩業의 소재와 정신적 배경도 거기에 상응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시기에 해당되는 산의 시와 수석의 시가 주축을 이루었고 10대 후반부터의 기독교 신앙의 영향과 그 배경이 위의 두 세계를 또 다른 차원에서 포괄, 심층적으로 생명화 하게 된 시의 역정을 겪게 되었다. 이는 수석으로 인해 그의 시와 자연과 신의 세계가 서로 따로 이면서 하나로 내재화했거나, 통일되고 승화되어 온 것임을 자각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박두진의 아들 박영하(화가)은 아버지를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수적이고 고집이 세 보이시지만 굉장히 다정한 분이셨습니다. 자식들이 있는 앞에서도 아버지가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도 계시고… 어머니뿐만 아니라 저희들한테 대하시는 것도 굉장히 자상하시고 부드러우셨습니다. 사랑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잔정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우리 집에서 일하던 식모 아이가 있었는데 결혼할 나이가 되자 손수 신랑감을 찾아 주시겠다고 발벗고 나서셨습니다. 예식장은 물론이고 혼수장만도 해 주시고, 식장에 직접 손을 잡고 들어가 주시기도 했습니다. 너무 그 일에 신경을 쓰시자 어머니께서 그렇게 까지 할 필요 있냐고 하셨지만 '그래도 자식 같은 아인데 그렇게 해 주고 싶다.'며 끝까지 일을 마무리 하셨습니다.]
박목월과 조지훈이 너무 일찍 세상을 버렸다고 아쉬워하던 박두진은 1998년 두 시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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