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총( ?∼?, 경주)
설총은 신라 경덕왕 때 학자로서, 신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열 사람을 가리키는 '신라 십 현(十賢)' 가운데 한 분으로 일컬어진다.
설총은 신라 시대의 큰스님 원효의 아들이다. 삼국유사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원효가 미친 척 거리를 다니면서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나에게 주겠는가?/ 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내리라.'고 노래했다.
모두들 그 뜻을 알지 못했지만, 태종만은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현명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현인이 있으면 그 이로움이 클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이 때 요석궁에 홀로된 공주가 있었다.
태종은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 들이도록 했다. 관리는 원효를 만나자 함께 물 속에 넘어져 옷이 다 젖게 한 다음, 그를 궁 안으로 데려가 옷을 말리게 했다. 그래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공주가 아이를 배어 설총을 낳았다.
이 전기를 통해 설총이 태어난 시기가 태종 무열왕 때인 650년대 후반임을 알 수 있다. 설총의 성장 기록은 거의 없다.
전해지는 이야기 중 하나는 이렇다. 수도승과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설총은 자신의 환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젊어서 많은 방황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설총은 나이가 들어 드디어 아버지 원효대사를 찾아갔다. 원효대사를 만난 설총은 "아버님, 여쭈어 볼 말씀이 많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원효대사는 "먼저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마당을 쓸어 놓아라"하곤 어디론가 가버렸다. 설총은 열심히 낙엽 하나 없이 마당을 깨끗이 쓸어 놓았다. 이윽고 원효대사가 돌아오자, "아버님, 말씀하신 대로 마당을 깨끗이 쓸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원효대사는 마당을 한번 둘러보고는 모아 둔 낙엽더미에서 낙엽을 한 움큼 쥐어 오더니 설총이 깨끗이 쓸어 놓은 마당 여기저기에 뿌리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설총을 보고 원효대사는 말하였다. "얘야, 마당을 잘못 쓸었구나. 가을 마당에는 낙엽이 좀 흩어져 있어야 제 맛이 난단다…" 그리곤 이내 원효대사는 다시 아들을 뒤로한 체 가버렸다. 설총은 더 이상 아버지께 여쭈어 볼 말이 없었다. 그는 원효대사의 행동에서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 왔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경사(經史)에 박통하였으며 신라말(그 당시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삼문장(新羅三文章)으로 꼽혔다.
설총은 향찰(이두)을 집대성, 정리하였는데, 육경(六經)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하여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등 한학의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공이 컸다. 또 신문왕 때의 국학(國學) 설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산문인 《화왕계(花王戒)》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하였다는 일화로서 《삼국사기》 <설총열전>에 실려 있다. 고려 현종 때 홍유후(弘儒侯)의 시호를 추증받았다. 문묘 동무에 최치원과 함께 종향(從享)되었고,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배향되었다. 《증보문헌비고》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설총열전>을 옮기면,
[설총(薛聰)은 자가 총지(聰智)이고 할아버지는 나마 담날(談捺)이며 아버지는 원효(元曉)인데, 처음에 승려가 되어 불경을 두루 통달하고 얼마 후에 환속하여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였다. 총은 성품이 총명하고 예민하여 배우지 않고도 도술(道術)을 알았고, 방언(方言)으로서 구경(九經)을 읽어 후생을 가르쳤으므로 지금[고려]까지 학자들이 그를 높이 받든다. 또 능히 글을 잘 지었으나 세상에 전해오는 것은 없다. 단지 지금[고려] 남쪽 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마멸되고 떨어져나가 읽을 수 없으므로 끝내 그의 글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없다.
신문대왕(神文大王)(681-691)이 한 여름[5월]에 높고 밝은 방에 거처하면서 설총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오늘은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처음으로 그치고 향기로운 바람이 살랑살랑 부니 비록 좋은 반찬과 애처로운 음악이 있더라도 고상한 말과 좋은 웃음거리로써 울적한 회포를 푸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대는 틀림없이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을 것이니 나를 위해서 이야기 해주지 않겠는가?”
설총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는 이야기를 하였다.
“신이 들으니 옛날 화왕(花王)이 처음 전래하였을 때 이를 향기로운 정원에 심고 비취색 장막을 둘러 보호하자 봄 내내 그 색깔의 고움을 발산하니 온갖 꽃을 능가하여 홀로 빼어났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과 먼 곳에서 아름답고 고운 꽃들이 달려와 찾아뵙고 오직 자기가 뒤질까 걱정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한 아리따운 사람이 나타났는데 붉은 얼굴에 옥같이 하얀 이에, 얼굴을 곱게 단장하고 예쁜 옷을 입고 하늘거리며 와서 천천히 다가서며 말하였습니다. ‘첩(妾)은 눈처럼 흰 모래를 밟고 거울처럼 맑은 바다를 대하면서 봄비에 목욕을 하여 때를 벗기고 맑은 바람을 쏘이며 스스로 즐기는 장미인데,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실까 하오니 왕께서는 저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또 한 대장부가 있어 베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둘렀으며, 흰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노쇠하여 비틀거리며 굽어진 허리로 걸어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는 서울 성 밖의 큰 길 가에 살면서 아래로는 넓은 들 경치를 바라보고, 위로는 뾰죽히 높다란 산에 기대어 사는 백두옹(白頭翁)이라 합니다. 저으기 생각하옵건대 좌우에서 공급하는 것이 비록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고 옷장에 옷을 가득 저장을 하고 있더라도 반드시 좋은 약으로 기운을 북돋우고 아픈 침으로 독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실을 만드는 삼[麻]이 있더라도 띠를 버릴 수 없다고 합니다. 무릇 모든 군자는 어느 세대나 없지 않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왕께서도 그러한 뜻이 있으신지요?’
그때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왔는데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화왕이 말하기를 ‘장부의 말에도 합당한 것이 있으나 아름다운 사람은 얻기 어려운 것이니 이를 어떻게 함이 좋을까?’ 하니 장부가 다가가 말하였습니다.
‘저는 왕께서 총명하셔서 이치와 옳은 것을 알 것으로 생각하여서 왔는데 이제 보니 그것이 아닙니다. 무릇 임금된 자가 사특하고 아첨하는 자를 친근히 하고 정직한 사람을 멀리하지 않음이 드뭅니다. 이런 까닭에 맹가(孟軻)가 불우하게 몸을 마쳤고, 풍당(馮唐)은 낮은 낭중(郎中) 벼슬에 묶여 늙었습니다. 옛부터 이러하니 저인들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화왕이 말하기를 ‘내가 잘못 하였구나! 내가 잘못 하였구나!’ 하였답니다.”
이에 왕이 슬픈 얼굴빛을 지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우화의 말 속에는 실로 깊은 뜻이 있으니 청컨대 이를 써서 임금된 자의 교훈으로 삼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설총을 발탁하여 높은 벼슬을 주었다. 세상에 전하기는 일본국 진인(眞人)이 신라 사신 설 판관(判官)에게 준 시의 서문에 『일찍이 원효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金剛三昧論)을 읽고 그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을 깊이 한탄하였는데, 신라국 사신 설씨가 거사의 손자라는 것을 듣고, 비록 그 할아버지를 보지는 못하였어도 그 손자를 만나니 기뻐서 이에 시를 지어 드린다.』고 하였다. 그 시가 지금[고려]까지 전하는데 단지 그 자손의 이름을 알지 못할 뿐이다. 우리 현종 재위 13년 천희(天禧) 5년 신유(1021)에 이르러 홍유후(弘儒侯)로 추증되었다. 어느 사람은 말하기를 설총이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공부를 하였다고 하나 그런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설총은 아버지 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소상(塑像ㆍ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는 효성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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