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선우 휘(鮮于 煇, 1922-1986. 평북 정주 )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5:45

선우 휘(鮮于 煇, 1922-1986. 평북 정주 )

 

  아래는 박현준이 정리한 글입니다.

[192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올해로 탄생 80주년을 맞는 소설가 선우휘의 현실적 삶을 지탱한 두 바퀴가 소설가로서의 삶과 기자로서의 삶이었다면 여기에 동력을 공급한 것은 반공주의에 대한 강고한 신념이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불꽃」을 비롯해 64편의 단편과 7편의 중편 및 10편의 장편소설, 그리고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출발해서 논설위원, 편집국장, 이사, 주필, 논설고문에 이르기까지 언론인으로서의 역정은 공산주의라는 '현실악'에 대항하는 휴머니즘적 행동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염오(厭惡)는 유복한 자작농 집안 출신으로 광복 후 김일성 정권의 박해를 피해 남하한 그의 개인사적 이력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도피주의자 고현이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에 분노를 느끼고 공산주의자 연호를 사살한 뒤 현실과 정정당당하게 맞서며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는 내용의 대표작 「불꽃」을 비롯,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반윤리적 인간관에 대한 분노가 날 것 그대로 드러나 있는 그의 소설에는 "'행동주의'의 간판격이자 '자유와 휴머니즘'을 옹호"한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반공 이데올로기'의 프리즘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 특히 분단과 전쟁을 지나치게 보수우익적 관점에서 묘사"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함께 따라다니고 있다(「윤리적 인간, 혹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기원」, 『실천문학』 2001년 봄호, 한수영)

 선우휘에 대한 이러한 찬반양론은 언론인으로서의 면모에도 그대로 적용돼, 5·16 쿠데타 직후의 이에 대한 맹렬한 비판과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사설 게재, 또 거듭되는 정부의 요직 제의를 거절한 지조있는 자세 등을 예로 들어 그의 강직한 언론인으로서의 태도를 찬양하는 옹호론과 유신 이후 5공화국에 이르기까지의 반정부운동에 대한 그의 알레르기적 거부반응을 겨냥한 비판론이 엇갈리고 있다. 특히 80년대 중반까지 조선일보에 기고됐던 '선우휘 칼럼'은 "'남한의 진보주의자'들을 '역사의 교훈을 모르는 덜 떨어진 지진아(遲進兒)'로 매도함으로써"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한수영, 앞의 글).

 선우휘의 이런 엇갈린 면모에 대해서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사로잡혀 사회주의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지적 편협성에 얽매여 있었다는 비판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의 관념적이고 병적인 문학 흐름에 반기를 들고 현실 참여와 인간의 행동적 의지를 강조한 선굵은 작품을 선보인 그의 문학 세계는 일정부분 평가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선우휘는 1986년 모 방송사의 6·25 특집프로 <살아 있는 전장>을 녹화하러 경상도 일대의 전적지를 취재한 뒤 뇌일혈로 사망했다. 향년 65세였다. 그가 남긴 81편의 작품은 5권의 『선우휘 문학선집』으로 묶여 조선일보사에서 간행됐다.]

 

다음은 한기의 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1922년 평북 정주 태생인 선우휘가 경성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 사회경력을 출발시킨 자리는 일제말기 교원의 자리였다고 한다. 관급교원의 자리란 체제보수의 기능과 뗄 수 없는 자리였을 것인데, 북녘 오지의 마을에서 보통학교 훈도 노릇에 머물렀던 그는 해방과 함께 바로 월남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의 계층의식의 바로미터가 되는 서북출신 실향민의 처지가 이로써 마련되었으며. 이후 그는 곧 기자생활에 뛰어들게 된다. 해방 정국의 혼란상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취재하는 사회부 초년기자가 그의 직분이었던 셈이다. 그의 생애의 업이 된 기자 감각이 이에서 마련되었거니와. 그렇지만 어찌 된 탓인지, 기자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 그는 사직서를 내던지고 다시 전직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자설로는 이 무렵 미국유학의 길을 꿈꾸었던 참이라고 하는데, 여의치 못해 주저앉게 된 그는 일선학교 교사로 몸담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한 획기적 전환점이 마련된다.

 6·25를 앞둔 시점에서 어떤 혼란의 현실이 벌어졌던가를 우리 모두는 알거니와, 5·10선거에서 8·15 정부수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내전적 현실 전개과정에서 그는 4·3사건과 그에 이어지는 여순사건 등을 목도하고, 군인의 길을 자원한다. 이 시절의 심경을 작가는 작품 「오리와 계급장」(《지성》,1958.秋)에 간략히 피력하고 있거니와, 그처럼 피나는 내전의 계절에 앉아 죽거나 전장에 나가 싸워 죽거나 매일반이라는 심정에서 일종의 도피행각을 벌였던 것이라고 스스로는 말하고 있다. 정훈장교를 지원하게 된 그는 6·25 중간 잠시 특수부대 요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고 하나, 대개의 군생활을 정훈 병과 주변에서 맴돌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점은 그의 이데올로기적 면모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정훈 병과란 곧 병영내에서 이데올로기적 사무를 관장하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그가 문단에 나온 것 역시 이 정훈관으로서의 현역복무 시절이었는데, 군인-작가로서의 이 시절 선우휘의 면모는 우리 문학사로서도 유니크한 삽화적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직업군인이면서 작가인 최초의 선례가 이에서 마련되었기 때문이다.--이후 최인훈이 비슷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1957년 대령으로 예편 후, 그는 다시 신문사에 몸담아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논설고문 등의 직책을 전전하며, 전후 세대의 대표작가이면서 동시에 한국 언론계의 거목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의 후반기 생을 장식한 작가--언론인으로서의 생활이 어떠하였는지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자로서의 정상적인 궤도를 밟지 않았음에도 그가 언론인으로서 빠른 성장가도를 달렸다는 점만은 분명한데, 특별히 3공화국의 민정이양 초기에 그는 편집국장 직위에 있으면서 일종의 필화사건을 겪어 구속되는 화를 입게 된다. 이 사건의 여파가 그의 작가생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런 풍파를 겪은 뒤에도 다시 언론계의 정상에 복귀한 그는 70년대에 주로 주필과 논설고문의 위치에서 신문사의 논조를 결정하는 중책을 맡게 된다. 작품활동이 뜸해짐과 함께 <유신> 치하에서 어려운 논설가로서의 위치를 지켜나갔던 그는 1973년에 다시 한 번 필화의 화를 입게 된다. 논설로서 한 정치적 사건에 관여한 탓이었다. 이러한 역정은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충실도를 반증해 주는 자취들이라 할 것이다. 그가 다시 작가로서의 재충전을 도모하게 되는 시기는 7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서의 일인데, 그의 최대 장편이면서 대표작인 「노다지」(《주간조선》,1979.2∼1981.8)가 바로 이 시기의 정점에 씌어졌던 것이며, 1986년 타계하기까지도 그는 한국의 대표적 보수언론인으로서의 위치를 잃지 않고 있었다. 5공화국 시절 매주 고정 칼럼을 통하여 영향력 있는 필봉을 휘둘렀던 것인데, 오늘날 언론인으로서 그를 기억하는 독자들은 바로 이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자신의 문필 생활에 심각한 위협이 초래될 정도로 한때 험악한 사회적 물의를 겪기도 했던 그는 그 신념인의 모습 그대로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죽기까지 필봉을 놓지 않았으므로 그는 참으로 엄청난 양의 논설을 개진한 셈이며, 작품을 통한 문학적 집필량 역시 녹록치 않다.

 30여 년 작가생활 동안 장편 10편, 중편 7편, 단편 64편 등 총 81편의 작품 기록을 남겨놓음으로써 어느 전업작가에 비해서도 부족하지 않은 문필 총량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와 논객, 작가와 칼럼니스트의 입장 중 그는 어느 한쪽을 더 선호하였던 것일까. <2∼3년 먹을 것을 대주는 독지가>만 나타난다면 편집국장직을 포기하고 작가 노릇에 충실하리라는 엄살을 그가 한 때 내비친 적이 있다. 하지만, 사회적 반향이 즉각적인 대신문사의 논객 위치와 아무런 제도적 장치의 배경이 없는 작가의 위치를 쉽게 바꿀 수 없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의 자부심이 그로 하여금 소설가의 위치 또한 쉽게 버릴 수 없도록 하였을 것임은 당연한데, 그런 만큼 작가와 논객의 위치를 겸임하는 자리에서 소설적 언어와 논설 언어의 상호 수렴 현상이 빚어졌던 것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문필의 한 특징이 여기에 있는 셈인데, 행동주의 작가로 시발했던 작가의 원질적 요소의 측면이 이를 가능케 한 요소의 하나로 작용했던 것을 살펴볼 수 있다. 행동주의 문학 강령이란 문학적 실천과 함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문학적 실천주의의 또 다른 윤리적 형태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선우 휘 원작으로<TV동화 행복한 세상>에 소개되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점심시간이 되어 친한 친구와 함께 도시락을 펼쳐 놓고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밥 한 술을 떠 넣은 친구가 도시락 속에서 머리카락 하나를 골라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밥을 먹었습니다.

 다음 날, 그 친구는 또다시 도시락에서 머리카락을 골라 낸 뒤 밥을 먹었습니다. 어쩌다 머리카락이 한두 개 들어갈 수는 있지만 친구의 도시락에서는 자주 머리카락이 나왔습니다. 선우휘는 점점 친구가 불결하게 느껴졌고 함께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도시락을 싸 주시는 어머니는 도대체 얼마나 지저분한 사람일까? 아들의 도시락에 머리카락이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선우휘에게 그 친구가 자기 집에 놀러가자며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선우휘는 썩 내키지 않았으나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 나섰습니다.

 ''어머니, 제가 말씀드린 친구 선우휘가 왔습니다."

 친구는 집으로 뛰어들자마자 어머니를 불렀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더니 친구의 어머니가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그래, 네가 선우휘구나!'

 그러나 선우휘를 반기며 걸어나오는 친구의 어머니는 선우휘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두리번거리기만 했습니다. 어머니는 장님에 가까울 정도로 눈이 어두웠던 것이다. 순간 선우휘는 콧날이 찡해졌습니다.

 '아, 그랬구나! 친구의 도시락에 유난히 머리카락이 많은 까닭이…'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어머니는 도시락에 머리카락이 들어갔는지를 쉽게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뒤에도 친구는 도시락을 먹다 말고 머리카락을 골라내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선우휘는 그 친구가 더없이 좋아지더라는 것입니다. 눈이 멀다시피 한 어머니가 더듬거리며 싸 주신 도시락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머리카락을 골라내며 밥을 먹는 친구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우휘는 그 때마다 친구의 아름다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송우는 선우휘의 죽음과 관련하여 그의 칼럼에서 말하기를, 선우 선생이 케이비에스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하러 부산에 갔다가 제작 중 부산 현지에서 갑자기 세상을 뜨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인은 과도한 술대접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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