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윤흥길(1942- , 전북 정읍 )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6:03

윤흥길(1942- , 전북 정읍  )


소설 「장마」와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로 잘 알려진 윤흥길은 1942년 12월 14일 전라북도 정읍군 정주읍 시기리에서 이남 사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물질적으로 넉넉했던 윤흥길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도련님’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 명문 강경상업학교를 나와 금융조합, 식산은행, 산업조합에서 근무하며 주위의 존경과 선망을 받았다.

하지만 1947년 이리로 이사하고부터 이 행복한 시절은 끝이 난다. 완고하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직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아버지는 그해 익산 군청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뜨내기 행상처럼 여러 직장을 전전했고 실직이 잦아지자 가세는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갔다. 1950년에는 6·25 전쟁 중 홍역을 앓던 동생 경묵을 잃는다. 십대 전반의 그는 문제아였다. 공부를 게을리했고 밖으로 나돌며 싸움질을 익혔다. 1953년 어렵게 장만한 집이 무허가 판자집이라는 이유로 강제 철거당한다. 이 사건으로 그는 가족 전체가 ‘죽은 목숨’임을 뼈저리게 느꼈고 세상에 대한 강렬한 증오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능한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무작정 가출하여 서울, 대전 등지를 떠돌며 사서 고생을 한다. 이때 그가 집을 나와 혹독한 굶주림에 시달리며 체험한 것은 도시의 그늘 속에 존재하는 난폭하고 황량한 삶의 방식이었다.

이런 그를 탈선하지 않도록 도운 사람들이 있었다. 날마다 눈물로 기도하던 어머니, 집안에 기독교 신앙을 심어준 구원의 여인상 막내 이모, 그리고 그에게 세례를 주고 정신적인 감화를 준 교회 목사님. 그는 가출 생활을 청산한다.

이리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한 것이 1958년. 법률가를 꿈꾸었으나 학비가 적게 들고 취직도 보장된다는 부모의 권유에 못 이겨 선택한 학교였다. 마음에도 없는 학교 생활은 순탄치 못해서 ‘범죄형’이라는 별명과 함께 ‘난폭하고 경조부박하여 치유 불능의 문제아’라는 종합평을 최종 학년 생활기록부에 남긴다. 삼학년이던 1960년 4·19를 맞았으나 ‘먼저 나가서 구호를 외칠 만한 용기도 능력도’ 없었던 그에게 4·19는 아픈 자괴감만 안겨준다.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발령을 기다리다 지친 윤흥길은 1961년 공군 기술병으로 자원 입대한다. 제대 일 년을 앞두고 아버지가 뇌일혈로 쓰러져 돌아가시지만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다.

1964년 군을 제대한 윤흥길은 전북 익산군 춘포국민학교 교사로 발령받는다. 따분한 교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학만 되면 무전여행 다니는 재미로 지내다 과로와 영양실조로 급성간염에 걸려 오래 고생한다.

1966년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결정적인 일이 생긴다. 국민학교 동기동창으로 연애하고 있던 같은 학교 여선생이 소설 공모 당선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여주며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한 것이다. 이튿날 저녁 소설 작법을 비롯한 문학 서적을 사다가 밤새 독파하고 나서 “오직 소설에서만이 내가 열등감을 벗어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고, 오직 소설을 통해서만이 내 내부에 서식하는 범죄성과 내 집을 허물어뜨린 사회에 대한 복수 의지와 못다 이룬 이상을 한꺼번에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해 여름 난생 처음 써서 신인문학상에 응모한 단편소설이 최종 심사에 오른 것을 보고 크게 용기를 얻는다. 이에 그는 부담이 적은 벽지 근무를 자원(여기엔 사귀던 여선생의 죽음도 한몫 했다), 전북 부안군의 바닷가 분교로 전근하여 습작에 몰두한다.

스물일곱 살이던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된다. 상금을 받으면 갚을 작정으로 빚을 내어 생전 처음으로 양복과 외투를 맞춰 입고 시상식장에 나간다. 이듬해 춘포국민학교로 다시 돌아갔는데, 거기서 자신의 열렬한 독자인 아내 유경순을 만나 1973년 결혼한다. 다음해 더 나은 사회적 대접을 받아볼까 하여 뒤늦게 원광대 국문과에 들어간 그는 대학 졸업 후 경기도 성남시 숭신여중에 부임했으나 사립학교의 경영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표를 던지고 실직을 자초한다. 이때부터 신혼의 단꿈을 짓밟는 지독한 가난과 고생이 시작된다.

이 년 후 고향 선배 소설가의 도움으로 출판사에 취직하면서 비로소 생활의 안정을 찾고, 이듬해 서울에 집을 마련하는 한편 첫 창작집 『황혼의 집』을 출간한다. 1977년에는 소설에만 전념하려고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나선다. 이 해 그는 모두 열두 편의 단편, 중편, 장편소설들을 발표하여 그해의 다작(多作) 기록을 세운다. 그리고 두번째 소설집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로 제4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한다. 현재 한서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다음은 2001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윤흥길이 강연한 내용을 줄인 것입니다.


[ 세계 문학사상의 명멸한 수많은 대문호들, 현존 작가들은 뭔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또는 자기의 운명상으로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점과 콤플렉스를 가지고 문학에 임했고, 현재도 임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에 그런 작가들에게는 문학이 자기 고백의 수단이고 고백을 통해서 결국은 문학이라는 가치 있는 결과물을 만든다고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세계적인 문호는 그의 모든 작품에 간질병자가 등장하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또는 노름에 미친 황당한 인물이 도스토예프스키의 거의 모든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평생에 걸쳐 신음했던 간질 질환, 끊지 못했던 도박 벽의 콤플렉스를 자기의 작품을 통해서 고백을 합니다. 고백을 통해서 먼저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구원을 받고 다음은 그 작품을 읽고 감동을 느낀 다른 수많은 독자들이 같이 집단 구원에 이르는 결과로 나타난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고백이라는 것이 결국은 문학을 가능케 만들어주고 또 그 고백을 통한 구원이 한 작가를 성숙시키고 완성을 시킨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아주 호되게 신장결석을 앓은 적이 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통증이 너무나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제가 상당히 참을성이 많은 사람인데 신장 결석의 고통은 뭐라고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서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을 짓누르는 통증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도 문을 닫고 쉬는 때여서 집으로 의사가 와서 진통제도 놔줘서 견뎌야 하는데, 너무나도 오래 통증이 멎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생각난 것이 영화 속에서 총에 맞아 죽어 가는 군인이 총상의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군가나 민요를 부른다든지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전에 본 영화의 기억을 떠올리며 기독교 신자인 저는 때문에 한밤중에 찬송가를 앞에 펴놓고 좋아하는 찬송가를 목청을 높여서 계속 불렀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하니까 눈물이 떨어져서 방바닥에 눈물이 흥건히 고였습니다. 그런데 계속 소리를 높여 찬송가를 부르다 보니까 어느 순간 통증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런 노래 형식을 통해서 자기의 아픔을 대속받는 것도 하나의 구원 행위라고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문학이 아니라도 고백을 통해서 구원의 결과에 이르는 예들을 굉장히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뭔가 문제점을 타고났거나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에드거 앨런 포우나 앙드레 지드와 같은 작가들은 뭔가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작가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바이런과 같은 시인은 신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웅으로만 알려져 있는 카이사르와 같은 사람도 사실은 문인입니다. 그래서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기} 같은 문학 작품은 지금도 전쟁문학으로서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저 중의 하나입니다. 노벨문학상이 있던 시대에 카이사르가 태어났다면 아마도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을 줄도 모릅니다. 그런데 카이사르와 같은 희대의 영웅도 결국은 간질 질환 때문에 평생 고통을 당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걸 보면 웬만한 문인들도 문제점 한두 가지 안 가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삶에서의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그런 점에서 공통점이 많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문학 이론으로서 결함을 하나의 큰 자산으로 평가해 주는 문학 이론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이론이 '상처와 활' 이라는 문학 개념인데 한마디로 얘기해서 '문인은 장점으로서 활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단점으로서 동시에 상처를 가지고 있다' 는 등식을 성립합니다. 또 한가지는 '상처가 클수록 그 문인이 가지고 있는 활도 강해진다' 는 것이 두 번째 등식이 됩니다.


문인이라는 것은 독사에 물린 상처와도 같은 결함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 결함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따돌림받기도 하고 버림받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그 상처를 가진 반면에 문인들에게는 신궁과도 같은 놀라운 능력, 재능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서 보람있고 가치있는 일에 기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문인이 사회에 할 수 있는 기여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결함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큰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가 클수록 활도 강해지고,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상호작용을 할 때 비로소 좋은 작품, 좋은 작가가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문인이라는 것은 자기의 상처를 세상을 향해서 외치고 공개를 하고 고백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남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도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문제점들을 안고 성장을 했고 지금도 여러분에게 공개할 수 없는 많은 허물과 결함들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 중에서도 문학적으로 고백 형식을 빌어서 작품을 썼거나 이야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가출입니다. 저의 가출 이력을 말씀드리자면 사람들이 상당히 놀랄 정도로 화려한 편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가출을 했습니다. 바람이 나서 가출을 한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 5학년 때 저의 집이 전쟁 후에 살던 집이 무허가 판잣집으로 판정이 나서 시청에서 철거반을 보냈습니다. 정들여서 살던 저의 집을 강제로 철거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학교에 가는 날이었지만 저는 집이 헐리는 것을 어떻게든 나의 힘으로 막아볼 생각으로 학교도 가지 않았습니다. 철거반을 기다렸다가 트럭을 타고 온 철거반원들이 연장을 가지고 집으로 덤벼드는데 그 때 저 혼자 나서서 팔을 벌리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물론 쉽게 제압당해서 한쪽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래서 한쪽에서 내 집이 강제로 쇠갈고리에 의해서 지붕이 찢겨져 내려오고 해머질에 의해서 벽에 구멍이 뚫리고 결국은 쇠사슬에 감아서 트럭에 담기니까 폭삭 주저앉는 참담한 광경을 초등학교 5학년 때 목격을 했습니다. 내 집이 강제 철거당하는 것을 막지 못한 무능한 아버지에 대한 반감, 내 집을 허물어뜨린 사회에 대한 반감 때문에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면 뭐하고 공부는 해서 뭐하는가, 서울로 가서 일찍부터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세상에 대해서 복수를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밤에 도둑 열차를 타고 서울로 갔습니다.


그때의 꿈이 서울에 가서 돈을 많이 번 다음, 세비로 양복을 입고 어린 눈에 기역자로 꼬부라진 미군들이 사용하는 회중전등이 있었는데 그것이 굉장히 갖고 싶었습니다. 세비로 양복을 입고 회중전등을 허리에 차고 고향으로 금의환향하겠다는 꿈을 안고 서울로 가출을 했습니다. 밤에 금의환향할 때는 회중전등이 필요할 텐데 낮에 금의환향 할 때는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가출이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해마다 한두 차례씩 계속이 되고 고생도 참 많이 했습니다. 빗나갈 수 있는 위험함을 다 피하고 마지막 중학교 2학년 때 가출을 해서 돌아와서는 이제는 정말로 더 이상 가출을 할 수가 없다. 가출을 졸업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가출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출을 하고 돌아온 때가 겨울이었는데 너무나도 춥고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밤중에 담을 넘어서 들어가니까 기르던 개가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도 알아보고 길길이 뛰면서 덤벼드는지 개를 안고 마루 밑에 들어가서 방안의 불이 꺼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방에 불이 꺼지지를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방에서 우는 소리가 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어머니가 밤새도록 불을 켜놓고 기도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집나간 우리 아무개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 고 밤새도록 기도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가출해 있는 동안에 우리 어머니가 지옥과도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방에 불이 꺼져야 살그머니 들어가서 잠을 잘 텐데 불이 꺼지지 않으니까 마루 밑에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견디다가 새벽쯤에 마루 밑에서 엉엉 하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집안에 있던 식구들이 전부 놀라서 뛰어나왔습니다. 방에 들어가 보니까 내가 가출해 있는 동안에 언제든지 돌아오면 먹을 수 있도록 아랫목에 따뜻하게 밥을 묻어놓고 윗목에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린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 두 가지를 알고 나니까 미꾸라지도 배통이 있고 벼룩도 낯짝이 있지 더 이상은 가출을 할 염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출을 그만 하고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겠다고 학교도 정상적으로 다녔습니다.


군대에 갔다 와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는데 가출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잘 참고 기다리다가도 누군가 집 근처에 와가지고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환청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무개야, 너 거기서 뭐하냐 나와라' 하고 뭔가 유혹하는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뛰쳐나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버릴 수 없는 가출욕구를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방학 때를 기다려서 방학식 하는 날 배낭을 미리 꾸려서 짊어지고 학교에 가서 아이들 방학시켜 놓고 바로 무전여행을 떠납니다. 방학 내내 여기 저기 닥치는 대로 돌아다니다가 개학하는 날 학교에 도착을 합니다. 그런 생활을 해마다 되풀이하는 재미로 간신히 하기 싫은 초등 학교 교사 생활을 견디고 참 불행했습니다. 가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어른이라는 것이 그렇게 불행한 줄을 몰랐습니다. 어른 체면에 집을 뛰쳐나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의 사는 모습을 지켜보던 초등학교 동창 여교사가 어느 날 나를 만나더니 신문 한 장을 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신문을 나한테 전해 주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물어 보았더니, "잘 보면 그 중에서 너한테 귀중한 선물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뒤져보니까 눈에 띄는 것이 서울신문 66년 1월 1일자 신문인데 거기에 한 면 전체를 차지한 기사가 장편소설 공모에서 당선된 강석근이라는 작가의 기사가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그 기사밖에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이걸 나보고 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문학을 하라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문학을 한 번 해봐라. 문학을 하면 잘 할 것 같고 문학만이 지금 방황하는 당신을 붙잡아주고 구원시켜 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걸 하라고 하느냐고 제가 화를 벌컥 냈습니다. 실제로 내가 문학에 소질이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때여서 굉장히 화를 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헤어졌는데 그날 밤 잠을 못 잤습니다. 밤새도록 문학이라는 것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침이 되자마자 시내에 나가서 서점부터 들렀습니다. 서점에서 문학이 들어간 책을 눈에 띄는 대로 골라서 다섯 권을 샀습니다. 그날부터 밤을 새워가면서 독학으로 문학 이론을 공부를 하고 또 문학 이론서에 나오는 작품들을 찾아가지고 읽는 작업을 했습니다. 하다보니 잘 하면 나도 비슷한 흉내라도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어느 날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습작에 들어가고 습작한 것을 응모를 했는데, 최종심사에 올라서 짤막하게 평도 실렸습니다. 거기에 재미를 붙여서 더욱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 생활을 66년부터 시작을 했는데 2년 동안 여한이 없도록 열심히 했습니다. 한때는 과로와 영양실조로 급성간염에 걸려서 오랫동안 고생할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학교도 도시에 있는 학교에서 벽지 근무를 자원했습니다. 변산반도 내소사 앞에 있는 조그만 분교가 있었습니다. 서포분교로 자원근무를 해서 내소사에 하숙을 정하고 거기서 겨울방학도 집에 가지 않고 견뎠습니다. 겨울방학에도 학교의 교실에 가서 책상을 붙이고 그 위에 이부자리를 펴놓고 한학기 동안 아이들이 도화지에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을 모아서 난로 속에 모아놓고 태우면서 불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색색의 크레용이 타들어갈 때 내는 불꽃의 색깔이 그렇게 아름답고 오묘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게 떨어지면 호롱불을 켜놓고 엎드려서 이불을 둘러쓰고 좀 쓰다보면 손이 곱아서 움직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면 호롱 등피에다가 손을 대고 녹여서 또 쓰는 생활을 계속 하다보니까 병이 나서 고생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여한이 없을 정도로 독학으로 열심히 해서 시작한 지 2년만에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고 작가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선작부터 저한테는 일종의 고백입니다. 군대에 가 있는 동안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이 가출을 하고 나는 탈영을 하고 싶었던 나의 개인사를 픽션을 가미해서 세상을 향해서 고백을 한 것이 바로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입니다. 많은 이야기들이 제가 실제로 겪었던 저의 이야기이고, 제가 세상에 대해서 느끼는 분노라든지 외로움들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을 해서 지금까지 작품 생활, 창작 생활을 해 오는 동안에 내 삶에서 부딪쳤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 내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여러 가지 결함들이나 죄의식, 콤플렉스들이 지금까지 쓴 많은 작품들에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자서전적인 요소 그대로 반영된 것은 아니고, 비틀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면서 때로는 반어법도 사용해서 가능하면 독자들한테 들통나지 않으려고 수단을 써가면서 쓴 것들입니다. 하지만 많은 소설 속 에피소드들의 조건들이 제가 실제로 삶에서 부딪쳤던 문제들, 세상이나 인간을 향해서 제가 평소에 느끼고 품고 있었던 여러 가지 감정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양] 같은 작품은 작품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처럼 6, 25 직후에 어려움 속에서 약 한 첩 제대로 쓰지 못하고 내 등에서 숨을 진 동생의 이야기입니다. 동생이 숨진 줄도 모르고 업은 채로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직업이 없어서 노무자로 붙잡아 갔습니다. 탄약통을 나르는 일을 시키기 위해서 노무자로 잡아갔었는데, 아버님은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에 나가시다가 성격적으로 실직을 자주 하셨습니다. 직업이 없을 때 볼일을 보러 밖에 나갔는데 그만 불신검문에 걸려서 노무자로 붙잡혀서 수용소에 수용이 되었습니다. 어머님이 아버님의 면회를 다니고 구명 운동을 다니시면서 밥을 해서 사식 차입을 다니느라고 막내 동생이 홍역 전염병을 앓고 있었는데, 동생을 돌볼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른이 없고 내가 장남이니까 홍역을 앓는 동생을 돌볼 책임이 저한테 주어졌습니다. 저도 그때는 어린애였는데 어린애가 어린애를 노상 업고 달래고 해야 되는데 어머니가 밤이 저물어도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속으로 수를 셉니다. 하나, 둘, 셋… 오백까지 세면 어디쯤 올 것이다. 그때까지 안 오면 또 다시 오백을 세고, 몇 번씩 되풀이를 해도 어머니는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너무나 피로에 지쳐서  업고 칭얼대는 동생을 달래면서 선 채로 벽에 기대어 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동생의 고개가 뒤로 휙 젖혀지면 깜짝 놀라서 다시 추스르기를 몇 번을 되풀이했는데, 나중에는 귀찮으니까 동생을 벽에 기대게 하고 그냥 잠을 잤습니다. 어머니가 늦게 돌아오셔서 포대기를 풀고 동생을 내려놓는데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동생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을 죽인 놈이라고 해서 굉장히 혼나고 많이 맞았습니다. 물론 어머니도 저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셨지만 막내아들을 잃은 슬픔이 너무나도 크셨기 때문에, 표적을 찾다보니까 책임을 맡았던 저에게 원망이 돌아온 것입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는 불쑥 감정을 앞세우셔서 하신 얘기지만 자라오는 동안에 저는 '동생을 죽인 놈' 이라는 질책은 엄청난 부담이었습니다. 항상 죄의식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죽은 동생이 생각날 때마다 '내가 죄인이구나' 하는 의식에서 벗어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 죽은 동생 이야기를 가지고 [양]이라는 작품을 쓰고 나서입니다. 탈고하고 나니까 오랫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던 죄의식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죽은 동생하고의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결국은 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내 삶을 억압하고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의식들이나 결함, 콤플렉스들이 '나는 이런 삶이다. 나는 이런 걸 가지고 있다 어쩔래.' 하고 세상을 향해서 공개를 해버리고 고백을 할 때 먼저 고백의 주체인 작가 자신이 먼저 구원을 받습니다. 다행히도 그 작품이 잘 써진 작품이어서 세상의 많은 독자들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고 감동을 나누어주게 되면, 그 자체가 구원이 확산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작가 개인의 구원이 집단구원, 사회구원으로까지 이어지는 기능을 문학이 가지고 있다. 작가는 궁극적으로 고백을 통해서 가출을 하고 실제로 가출을 할 수가 없지만 문학이라는 수단은 정신적으로 가출하기에 아주 좋은 수단입니다. 돈이나 힘도 들지 않고 앉은자리에서 상상력을 통해서 얼마든지 가보지 못했던 세계, 만나지 못했던 사람, 경험하지 못했던 사건들을 상상력을 통해서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학입니다.


문학 중에서도 특히 픽션인 소설이야말로 상상력을 통한 정신력적인 가출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능하게 해주는 좋은 수단입니다. 좋은 수단을 나한테 일러주고 문학을 하도록 권해준 초등 학교 동창 친구에게 지금도 항상 마음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빚을 지고 있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많은 작품을 쓰게 되겠지만 제가 지금까지 쓴 작품도 앞으로 쓸 작품에도 마찬가지지만 저는 지금까지 부딪치고 있는 삶에서의 많은 문제점들, 제 개인사, 또 태생적인 저의 한계들을 앞으로도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을 통해서 세상을 향해 공개하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저는 자유를 얻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 작품이 독자들에게 인정을 받게 된다면 다른 비슷한 처지의 다른 분들에게도 뭔가 제 작은 구원이나마 나눠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선생님처럼 상처가 많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하고 상처가 없는 시대에 태어난 저희들은 어떻게 문학을 합니까" 하는 질문들을 가끔 받게 됩니다.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상처가 없다고 느끼는 그 자체가 사실은 가장 심각한 상처가 됩니다. 상처가 왜 없겠습니까. 풍요의 시대에 태어났다고 해서 상처가 없다면 그건 큰 오산입니다. 물질문명에 오염되어서 정신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멀리하는 현상이야말로 인류 최대의 위기고 비극입니다. 그런 비극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그걸 위기로 느끼지 못하고 상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이상 큰 상처가 어디 있겠습니까. 항상 풍요 속에서도 마음만은 가난하게 해서 항상 목표를 높이 두다 보면 결핍감과 궁핍감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생산적인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은 현실에서의 결핍감이라든지 궁핍감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 생산적인 가치로 나타난다고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포만감에 젖어서 만족하는 세대는 절대로 위대한 정신의 자취를 기록할 수가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어려움이 없다, 전쟁이 없다, 배고픔이 없다, 이런 시대일수록 잘 찾아보면 그야말로 진짜 위기, 진짜 심각한 문제점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인류 멸망의 징조까지도 많이 이야기될 정도로 지금 심각한 상태에서 우리는 너무 잘 자랐기 때문에 상처를 모른다, 문학하기가 어렵다, 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상처를 찾고 상처를 만드는 그런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좋은 문학을 할 수가 있다고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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