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영 (1911-2004, 경기 이천)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한 유달영은 양정고보, 수원 고등농림학교(서울대 농대 전신)를 마쳤다. 개성의 호수돈 여고에 첫발령이 나서 근무하면서, 소설 ‘상록수’ 속 채영신의 실제 인물이었던 최용신(1909∼1935)과 함께 젊은 날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35년 최용신이 26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유달영은 ‘농촌계몽의 선구 최용신의 소전’을 펴냈다. 이 책을 발행한 성서조선사는 일제에 의해 불온 잡지로 지목돼 유달영은 양정고보 스승인 김교신,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됐다. 이후 함석헌이 재야 운동을 전개한 반면에, 유달영은 자신의 저서 ‘새 역사를 위하여’을 읽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요청으로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맡았다. 후에 새마을 운동과 산림 녹화 사업을 박정희의 업적으로 꼽기도 했다.
유달영은 46년부터 서울대 농대 원예학 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이 시험을 치를 때 시험 감독을 평생 하지 않았다고 한다. 62년에는 FAO 기아해방 한국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며 식량 자족 운동에 힘을 쏟았다. “농민들에게 농업을 장려하는 이가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에 60년대 초 수원에 ‘평화농장’을 만들었다. 그는 농장 일부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로 편입되면서 받은 토지보상비를 사회에 환원키 위해 91년 ‘성천문화재단’을 설립해 문화활동을 펼쳤고, 2001년에는 남은 5,000여평의 토지 역시 재단에 기부하는 유증절차도 마쳤다.
85년 ‘한국무궁화연구회’를 창립, 나라꽃 심기에 앞장서 ‘무궁화 선비’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수필집 ‘눈속에 잎피는 나무’ ‘외롭지 않은 외로운 나그네길’ ‘류달영 인생론집 전 7권’ ‘자연과 사랑과 인생’ 등을 냈다. 유족으로 장남 유인걸 성천문화재단 상임이사 등 1남3녀가 있다.
유달영은 말년에 여의도 공원에서 새에게 모이를 주는 일을 즐기며 93세까지 장수했다. 건강 비결로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식사로는 매일 아침 찰떡 두 개와 계란 프라이 한 개, 저지방 우유를 먹었다. 점심에는 칼국수나 만두를, 저녁에는 가까이 사는 아들집에서 꼭 한식을 먹었다. 이밖에 매일 7천보씩 걷기, 머리․목․눈 마사지 70회 하기 등으로 건강을 관리했다고 한다.
유달영는 농민 운동가로 기억되기를 소망했으며, ‘농심은 천심(天心)이며 건강한 정신을 갖게 한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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