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윤선도(1587-1671,서울)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6:16

윤선도(1587-1671,서울)

 

[송강 정철이 가사문학의 대가라면 고산 윤선도는 시조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선비들이 한문문학에 경도된 것에 비해 고산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섬세하고 미려한 시조들을 지어냈다.

고산의 생애는 한마디로 유배와 은둔의 생활이 거듭된 굴곡 많은 삶이다. 고산은 본관이 해남 윤씨로 1587년(선조20) 6월 22일 한성부 동부 현 서울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유심과 어머니 순흥 안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고산은 해남종가에 아들이 없자 8세 때 작은 아버지 유기의 양자로 입양돼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을 잇는다. 고산이 양자로 입양되던 해에 부친 유기가 과거에 급제했다. 그 뒤 그는 부친이 외직에 나갈 때면 그 임지를 따라다녔다. 13세 때는 부친이 안변도호부사에 임명되자 안변 지방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고산의 성장기는 자주 거처를 달리한 탓으로 오래 사귈 친구가 없었으며, 일정한 스승이 없이 외롭게 수학하던 시절이었다.

고산은 26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지만 당시는 광해군이 다스리던 시기로 당시는 이이첨 등 북인들이 득세하여 남인이었던 고산은 이러한 세력다툼 속에서 힘을 펴지 못 하였다. 고산은 이이첨 일파의 불의를 비난한 병진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 주변의 간신들의 모함으로 함경도 경원으로 첫 유배를 당한다.

 

이 곳에서 지은 시 중에 「견회요」가 있다.

 

"산은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크고 크고

어디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느니"

 

이것은 「견회요」제4수로 긴 산과 먼 물, 그리고 울고 가는 외기러기에 작자의 모습을 투영함으로써 어버이를 그리는 간절한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고산은 다음해엔 경상도 기장으로 옮겨져 6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지만 유배 후의 심정이 정리되지 않아 곧 사직하고 해남으로 돌아온다. 그는 이곳에서 유배의 아픔을 달래며 두문불출 은둔생활에 젖는다.

고산은 42세가 되었을 때 출사의 꿈이 펴진다. 별시초시에 장원급제하고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거쳐 7년간 요직을 거치며 정치적 경륜을 쌓는다. 그러나 48세에 성산현감으로 좌천되고 경세의 뜻이 좌절되자 다음해 현감직을 사임하고 해남으로 다시 귀향한다.

1636년(인조14) 고산의 나이 50세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애국의 정이 깊었던 고산은 향리자제와 가졸 등 수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선편으로 강화도까지 간다. 그러나 이미 왕자들은 붙잡히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화의를 맺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개탄 평생 초야에 묻혀 살 것을 결심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한다.

이때 배를 타고 남하하다 도착한 곳이 '어부사시사'의 배경이 된 완도의 보길도다. 그는 이곳에서 산이 사방으로 둘러있어 바다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샘과 돌이 참으로 아름다와 '물외(物外)의 가경(佳境)'이라고 감탄하며 머물게 된다.

윤선도는 보길도에 머물면서 부용동에 '낙원'을 지었다. 포구가 보이는 자리에 속세의 티끌을 씻어낸다는 뜻으로 '세연정'을 짓고, 마음 심자 모형으로 3개의 연못을 파서 원림을 조성했다. 그곳에는 야외무대격인 동,서대를 두고 입석과 판석에 구멍을 뚫어 꿰어서 굴뚝다리를 걸었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다 싫증이 나면 활을 쏘기도 했다는 '사투암'도 세웠다. 이곳에서 5리 남짓 산쪽으로 들어간 곳에는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삼았는데 이때 윤선도의 섬생활에 대해 '가장유사(家藏遺事)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아침이면 경옥주를 한 잔 마시고 몸을 단정히 한 후 자제들을 가르쳤다. 조반 후에는 사륜거를 타고 악공을 거느려 회수당(回水堂)이나 석실에 올라가 놀았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반드시 세연정에 나갔다. 세연정에 갈 때는 술과 안주를 충분히 준비시켜 조그만 수레에 싣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세연정에 이르면 자제를 곁에 앉히고 앞 못에 조그만 배를 띄워 미희들을 줄지어 앉혀놓고 그 찬란한 복색과 어여쁜 용모가 물 위에 비치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를 부르게 했다. 때로는 정자 위에 올라가 악공에게 풍악을 울리게 하고 때로는 동대와 서대에 사람을 나누어 서로 마주보고 춤추게 하고, 더러는 무희로 하여금 못 가운데 있는 '옥소암'에서 긴소매를 나부끼며 춤추게 하여 못에 어리는 그림자를 즐겼다."

고산의 시련은 말년까지 이어진다. 그는 74세 때 승하한 효종의 산릉과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서인과 대립하다 기년복을 주장하는 서인과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과의 논쟁에 있어 3년복이 옳다고 강경히 주장하는 고산의 말에 과격함이 있다하여 송시열 등 반대파에 의해 사형이 주장된다. 그러나 고산은 바른말하는 선비요 또 선왕의 사부니 경솔히 죽일 수 없다는 상소가 받아들여져 함경도 삼수로 유배된다.

고산은 79세(1665년 현종6)에 광양으로 이배되고 81세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7년 4개월의 긴긴 세월을 다시 유배생활로 보내게 된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난 뒤 1671년 6월 11일 보길도 낙서재에서 향년 85세로 파란많은 생을 마감한다.

고산은 관직에 있던 기간은 얼마되지 않고 대부분 중앙정계와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에서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집안은 누대에 걸쳐 벼슬을 한 명문이었고 재산도 유족했지만 당시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힘이 부치는 남인 집안이었고, 또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고 따지고드는 꼬장꼬장한 성격 때문에 윤선도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85세라는 장수를 누렸으나 그 가운데 세 차례에 걸친 유배로 20년 남짓한 세월을 보냈고 그 사이사이에 해남의 금쇄동과 보길도 부용동 등에서 19년 가량을 숨어살았다.

그러나 그의 은거는 '골짜기에서 고사리를 캐는' 생활은 아니었다. 그는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오히려 화려하다고 할 만한 은거 생활을 하였다. 81세 때 유배에서 풀려난 고산은 효종에게 받은 수원의 집을 해체하여 수원에서 남양으로, 다시 남양에서 뱃길로 띄워 해남까지 옮겼다. 그 집이 바로 지금의 녹우당 사랑채이다.

고산은 정치적으로 불우했지만 그의 유배지와 은둔지에서 성숙한 문학 작품이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다. 보길도와 해남은 그의 음영 짙은 내면풍경과 삶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며 그의 생애와 시문학은 이곳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

 

아래는 강제윤 시인의 글입니다.

 

[보길도를 다녀온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보길도를 제대로 보고 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자동차를 타고 이정표를 따라 정해진 코스만을 돌다오기 때문입니다. 이번 보길도 답사는 보길도의 숨겨진 비경을 찾아 떠나는 여행입니다. 물론 세연정, 동천석실, 낙서재, 옥소대 등의 고산 윤선도 유적지와 송시열의 글씐바위, 예송리 해수욕장, 보옥리(뽀리기) 공룡알해변 등의 답사는 기본입니다.

하지만 보길도에는 보길도 사람도 잘 모르는 숨겨진 비경이 많습니다. 이번 답사에서는 왕복 4킬로미터를 바다와 섬들만을 보고 걷는 도치미끝 길과 내내 숲 터널을 통과하게 되는 선창리재 등의 숨겨진 비경을 걷게 됩니다. 도치미끝은 도끼날 끝이란 뜻의 절벽인데, 도치미 끝에 서면 환상적인 풍경 앞에 숨이 탁 멎는 듯한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또 부용리에서 선창리로 이어지는 선창리재는 재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평지에 가까운 낮은 고개인데 지금은 더 이상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아름다운 옛길입니다. 시간여행을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고즈넉한 길입니다. 늦은 휴가를 원하시는 분들은 이제 늦여름 보길도의 느린 풍경 속으로 떠나 보면 어떨까요.

 

폭풍이 온다더라

물길이 닫히기 전에 떠나야 하리라

뭍에서 온 사람들

잠시 머뭇거림도 없이 갑판에 오르고

청별에서 출항한 배가

노화 지나 소안에 가 닿는다

몇척의 어선들

방파제 안으로 서둘러 몸을 숨기고

추자도를 건너온 폭풍우가

적자산을 넘는다

폭풍이 온다더라

비바람 속에 너를 보내며

그러나 정작 슬픈 것은 이별이 아니다

천 번의 이별이 두렵겠는가

이별이 아니다

서러운 것은 이별이 아니다

잊혀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배가 떠난 뒤

물길이 닫히고

물 밑으로 가라앉는

보길도

기억하라

천 번을 헤어진 뒤

천 번을 다시 만나리

(강제윤 시 <보길도1>)

보길도는 내가 나고 자란 고향입니다. 보길도 사람들은 그런 땅을 '안태(안투)고향'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태를 묻은 고향이란 뜻이지요. 유년시절을 보내고 뭍으로 나가 살다가 어른이 된 뒤 귀향하여 산 시간까지 합하면 20년을 넘게 살았으니 보길도 구석구석 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지금은 다시 고향을 떠나 유랑자로 살지만 여전히 보길도는 내 삶의 뿌리가 되는 섬입니다.

고향은 아니었으나 저보다 수백 년을 앞서 보길도에서 살다간 시인이 고산 윤선도 선생입니다. <어부사시사>나 <오우가> 등의 시가와 한국의 3대 정원 중 하나라는 부용동 원림을 만든 이가 바로 고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길도를 고산의 유배지로 기억하지만 보길도는 그의 유배지가 아니었습니다. 보길도는 고산의 은둔지이고, 고산의 왕국이었습니다. 보길도 전체가 고산의 장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산의 주된 주거지는 본처와 자식들이 있는 해남 녹우당이었고 보길도의 집들은 첩실과 그 자식들이 기거하는 집이었으며 고산의 별장이었습니다. 고산은 부용동 원림을 건축하고 7번을 드나들며 13년이란 시간을 보길도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겼고, 1637년 85세로 보길도에서 숨을 거두었을 정도로 보길도에 대한 애착이 각별했습니다.

내가 고산을 처음 만난 것은 아마도 아주 어릴 적 할아버지와 할머니, 염소와 오리, 닭들을 막 지각하고 구별해내던 그 무렵부터였을 겁니다. 지관이었던 할아버지가 늘 윤고산, 윤고산 하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저는 윤고산을 이웃마을 사는 할아버지의 친구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묘 자리를 잡고 집터를 찾는 할아버지와 함께 호흡하고 있었으며, 보길도 주민들 가운데 살아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억겁의 시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인간의 의식 속에서 400년이란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요.

초등학교 5학년 때 보길도를 떠나 인천으로 이주한 뒤 내 의식 속에서 고산도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면서 고향에 남은 친구들, 마을 어른들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는 것과 같이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중학교 교과서에선가 고산을 조우하고 아주 많이 놀랐습니다.

그것은 고산이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를 지은 유명한 시인이었다 해서가 아닙니다. 고산이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라니! 그가 이미 수백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내 의식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오우가>나 <어부사시사>는 국어 교사들이 상찬하던 것과는 달리 나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가 죽은 사람이라니! 그런데도 그렇게 산 사람들의 의식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었다니! 그 의문만이 오래도록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세연정이며 세연지, 회수담 등 고산이 축조했던 구조물과 연못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이었다는 것은 그로부터도 한 참 뒤에야 새롭게 알게 된 지식입니다. 동천석실이며 낙서재, 곡수당, 낭음계 같은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피라미 낚시를 하던 낚시터가 세연지였으며 미술 시간에 진흙을 퍼다 공작을 하던 놀이터가 세연정 자리였고 민방위 훈련 시간에 대피했던 방공호가 봉화대 터였습니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만난 고산은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뜻밖에도 그는 더 이상 낭만적인 시인이 아니라 섬 주민들 위에 군림한 섬의 지배자였던 것이지요.

광해군 시절, 30세 백면서생의 몸으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이이첨 등 권신들의 부패와 전횡을 탄핵하다 귀양살이를 떠난 실천적 지식인 고산. 쉰한 살의 나이에 13세 소녀였던 설씨녀를 만나 평생을 사랑한 열정적인 로맨티스트 고산. 그는 가는 곳마다 스스로 설계한 건물을 세우고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고 정원을 꾸민 뛰어난 건축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가진 막대한 부를 임진, 병자 양대 전쟁 이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는 자기 왕국을 꾸미는데 허비해 버린 이기적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세속을 초탈했다는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칠십이 넘어서까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중앙 정계의 권력 투쟁에 주도적으로 개입하다 10여 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했던 지극히 권력 지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고산이 보길도로 들어 간 것은 병자호란이라는 비극적 전쟁이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으로 종결된 직후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해남에 낙향해 있던 고산은 가노를 비롯한 인근 주민들 수백 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서해 바다를 통해 강화도로 향합니다. 하지만 배가 강화도에 당도하기도 전에 강화도는 청나라에 함락되고, 고산 일행은 뱃머리를 돌려 남하 하게 됩니다. 배가 해남 인근을 지나갈 무렵 고산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당시 고산의 나이 51세. 고산은 제주도에 은둔하기 위해 바로 뱃길을 떠납니다. 항해 도중 바람 길이 바뀌자 보길도 대풍(待風)기미에 배를 정박하고 범선을 날라 줄 바람을 기다리다 문득 보길도의 산을 둘러보고 그 산세의 아름다움에 취해 바로 그 섬에 들어와 정착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고산은 보길도에 별서(별장)를 짓고 해남과 한양, 유배지였던 함경도 삼수, 경상도 영덕 등을 들락거리다 85세의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에서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합니다. 고산은 보길도 부용동에 은거해 들어가며 꿈에 그리던 낙원[仙界]을 발견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녕 고산은 낙원을 얻었던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고산에게 보길도는 평생 은둔의 땅이었을 뿐 결코 낙원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보길도에서 낙원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통해 정치적 야심을 버릴 수 없었고, 어쩌면 낙원일 수도 있었던 땅을 도피와 쾌락의 은둔 공간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실상 그의 낙원은 왕이 기거하는 한양의 왕궁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집인 낙서재를 북향하여 왕이 있는 한양 쪽으로 세웠고, 세연지 연못가에 제갈량의 사당을 짓고 싶다고 노래했습니다. 하지만 제갈량과는 달리 끝내 부름을 받지 못했고, 부름을 받을 만하면 정치적 반대파들의 방해로 좌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까요. 그가 꿈꾸던 왕궁이라는 낙원으로의 출사가 좌절되었을 때 그는 전혀 새로운 낙원을 꿈꿀 수는 없었을까요.

만약 고산이 출사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고 바른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출사를 염원했다면, 권력으로부터 배척당했을 때 한양이 아니라 저 본토로부터 버림받은 땅, 보길도, 소안도, 노화도, 당사도, 넙도, 흑일도, 백일도 등의 섬들, 그 섬 안의 민중들을 부축하여 함께 낙원을 세울 수는 없었을까요.

임진, 병자 양대 전쟁이 끝나고,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 비단옷을 입고 배불리 먹으며 권력투쟁에 몰두해 있을 때, 이 땅의 민중들은 기아와 역병으로 또 얼마나 처참한 지경에 처해 있었습니까. 하지만 고산은 그가 가진 막대한 부를 민중들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만의 '낙원'을 만드는데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보길도의 세연정이고 낙서재며 동천석실입니다. 그것이 또한 해남 금쇄동과 수정동 별서들입니다. 그것을 시대의 한계만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은 그보다 앞서거나 동시대에 부패한 세상을 뒤엎으려던 선비들, 정여립, 허균 같은 이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탄에 빠진 민중들의 신음소리 그치지 않을 때 고산의 정원, 세연정에서는 스스로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인 <어부사시사> 가락 소리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어부사시사>에는 어부의 현실이 없고 어부의 풍경만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고산을 배반한 것은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당대의 왕들이나 정적들이 아니었습니다. 고산을 배반한 것은 무엇보다 고산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산은 보길도에 부용동 원림이라는 '낙원'을 세웠으나, 결코 낙원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노화도란 섬과 보길도가 다리로 연결되어 여객선은 노화도의 동천항이나 산양항으로 입항합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길도의 관문은 보길도 청별항이었습니다. 고산이 사람들을 배웅하며 작별을 했다는 데서 유래된 청별(淸別). 청별항에서 세연정 방향으로 5백 미터쯤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호수처럼 아늑한 바다를 만나게 됩니다. 그곳이 황원포입니다. 윤위가 <보길도지>에서 "예로부터 동방의 명승지로는 금강산 삼일포와 보길도가 있다고 하는데 그윽한 아취로는 삼일포가 보길도만 못하다"고 기록했던 그 황원포입니다. 지금은 간척 사업으로 논이 생기면서 옛 정취를 많이 잃어 아쉽기만 합니다. 그래도 만조 때면 비할 데가 없이 그윽합니다.

다시 500여 미터를 가면 세연정 정원입니다. 부용동 원림의 3대 공간 중 누정 공간, 말하자면 위락시설인 셈입니다. 고산 스스로 놀거나 친구들, 조정의 관리들이 왔을 때 접대하던 장소가 세연정이라는 정자를 중심으로 펼쳐진 세연지, 회수담, 연희무대였던 동대와 서대, 산중턱의 옥소대 등입니다. 고산 당시에는 3천여 평의 공간이 세연정 정원이었다는데 지금은 일부인 1천여 평만 복원되어 있습니다. 바로 옆 건물은 보길초등학교입니다.

세연정과 옥소대를 둘러본 뒤, 큰 도로를 따라 부용리 마을로 향합니다. 정면에 보이는 큰 봉우리가 해발 425m인 보길도의 주봉 적자산입니다. 적자산 앞의 조그맣고 둥근 봉우리는 미산이지요. 산들에 둘러쌓인 마을의 생김이 그대로 연꽃 봉우리 모양입니다. 어째서 고산이 그 마을을 부용(芙蓉)동이라 이름 지었는지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이, 숙제의 수양산에서 따온 미산(薇山)이라는 이름은 무언가 어색하기만 합니다. 고산은 백이, 숙제처럼 고사리나 뜯으며 산중에 은거하겠다고 '고사리산'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보길도에서 고산의 삶은 기실 고사리 뜯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부용리에 들어서면 그대로 산중입니다. 더 이상 바다도 보이지 않고 파도소리, 갯냄새 나지 않는 첩첩산중. 부용리 마을회관 앞에서 이정표는 낙서재와 동천석실 양 방향으로 갈라집니다. 마을회관부터 부용리 마을 전체가 동백나무 숲속에 들어 있습니다. 동백꽃 피는 계절이면 벌치는 사람들이 먼저 알고 트럭 가득 벌통을 싣고 와 꿀을 따가곤 합니다.

낙서재 쪽으로 들어섭니다. 근래에 복원이 된 낙서재 권역은 고산의 주거공간이었습니다. 3천여 평의 공간에 낙서재, 곡수당, 곡수대, 동와, 서와 등의 건물과 연못 등이 있었는데 고산은 이곳에 기거하며 보길도에서 얻은 자식들과 제자들을 길러냈다 합니다. 고산이 낙서재에 기거하며 지은 시 한 편입니다.

 

눈은 청산에 있고 귀는 거문고에 있으니

세상의 무슨 일이 내 마음에 이르리요

가슴 가득한 호연지기를 아는 이 없으니

한 곡의 미친 노래를 홀로 읊어 보노라

(고산 윤선도 <낙서재에서 우연히 읊다> 전문)

 

낙서재 등의 건물은 고산 사후 자식들이 기거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분노한 주민들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구전이 있습니다. 낙서재에서 내려와 동천석실로 향합니다. 석실에 이르려면 계곡을 건너야 합니다. 계곡의 물이 말라 있습니다. 한때 빼어났던 이 계곡은 우기 한 철만을 제외하고 늘 바짝 말라 볼품이 없어졌습니다.

그것이 다 저 위의 상수원댐 때문입니다. 고산이 옥구슬 떨어지는 소리처럼 맑은 물소리가 난다하여 낭음계라 이름한 계곡. 그 빼어난 계곡미는 댐 건설과 함께 수몰되고 말았습니다. 전두환 군사정권 때 일입니다. 당시 부용리 마을 주민들은 크게 반대했습니다. 댐을 건설하지 않아도 사철 계곡에 넘치는 물로 식수나 농업용수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웃 섬 노화도 상업지구에 상업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군사정권은 부용리 주민들의 항의 시위를 무장경찰을 들여보내 진압하고 댐 건설을 강행했습니다.

돌다리를 건너 개울을 건너면 전혀 다른 세계가 시작됩니다. 고요한 동백나무 터널 아래 한적한 오솔길이 20여 분간 지속됩니다. 고산은 51세 때 13세였던 설씨녀를 만나 셋째 부인으로 삼고 보길도에 살림을 차렸습니다. 현재 보길도의 윤씨들은 그 후손들입니다. 고산은 설씨녀와 둘이서 이 길을 자주 올랐다 합니다. 팔순이 된 고산도 보름날 밤이면 달구경을 위해 올랐던 가벼운 길이지만 자동차 문화에 오염된 현대인들은 이 잠깐의 거리도 견디지 못해 투덜거리기 일쑤입니다.

동천석실은 산중턱에 있는 천연의 바위들을 이용해 만든 바위 정원입니다. 위태로운 절벽 위에 단칸 정자를 세우고 연못을 팠습니다. 우기에는 연못자리에 아직도 연꽃이 핍니다. 부용동 원림의 3대 공간 중 선계 공간이지요. 석실에 오르면 부용동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적자산 줄기의 능선이 비단결처럼 부드럽습니다. 이곳에서 비로소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동천석실이 가진 조경의 뛰어남은 절벽의 정자도, 바위 위의 연못도 아닙니다. 적자산이 품어안은 부용리 마을의 안온함으로 인해 이곳은 비로소 명승이 됩니다. 석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산바람에 취해 있으면 몇 시간이고 일어설 생각이 없습니다. 보길도 여행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어도 좋지만 섬에 온 사람들은 바다가 그리워 해변으로 갑니다.

전국적으로 이름난 보길도의 해변은 단연 예송리 해수욕장입니다. 하지만 보길도에는 아름다운 해변이 여러 곳 있습니다. 특히 중리와 통리, 두 백사장 해수욕장은 경사가 완만하고 깊지 않아 물놀이하기 아주 좋습니다. 특히 중리 해수욕장은 수백미터를 바다로 나가도 어른 가슴까지밖에 차지 않는 천혜의 물놀이터입니다. 예송리 해수욕장은 그 청환석의 해변으로 인해 명성이 자자하지만 실제 해수욕을 하기는 적당치가 않습니다. 수심이 깊고 가파르기 때문입니다. 앉아서 놀기에 좋은 곳이지요.

장쾌한 바다를 보려면 선창리와 보옥리 마을로 가야 합니다. 특히 보옥리 공룡알해변과 동백숲은 아주 특별한 공간입니다. 뾰족산 아래 공룡알같이 둥근 돌들이 펼쳐진 해변, 썰물 때의 보옥리 해변은 그 크고 둥근 돌들이 살아 움직이며 들끓습니다. 일몰을 보기 좋은 곳은 겨울철엔 선창리 망끝전망대, 여름철엔 정동리 솔섬이 으뜸입니다. 이제 정자리 솔섬에 앉아 진도 쪽으로 지는 해를 보면 영원처럼 길었던 보길도에서의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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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1942- , 전북 정읍 )   (0) 2010.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