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오정희(1947- , 서울 종로)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6:18

오정희(1947- , 서울 종로)

 

 아래는 장석주의 글이다.

[오정희는 1947년 11월 9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4남 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해방 전후 황해도 해주에서 월남해 별다른 생활기반 없이 곤궁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오정희가 네 살 되던 해에 6·25가 터졌는데 바로 아래 동생을 임신한 어머니 때문에 가족들은 피난하지 못하고 공산치하의 서울에서 석 달을 보낸다.

 1951년 1·4 후퇴 때 간신히 국군 트럭 한 귀퉁이를 얻어 타고 가다가 무작정 내린 곳이 충남 홍성군 홍주읍 오관리라는 마을이었다. 타관의 피난민들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적대심, 동생과 방안에 갇혀 허기로 보내야 했던 이 시절의 기억들을 오정희는 <유년의 뜰>에서 그대로 털어놓는다. 식탐이 많아 아랫목에 묻어 놓은 식기의 밥 알갱이나 동생의 고구마를 빼앗아 갉아먹어 통통하게 살이 오른 도벽이 있는 아이, 전쟁을 겪으며 지나치게 조숙해져 불순하게 심사가 뒤틀려버린 아이가 바로 오정희의 유년기 모습이다.  

 어머니가 장사하러 집을 비우는 바람에 외할머니와 함께 입학식에 간 그녀는 분홍색 인조견 치마에 노란 솜저고리를 입었는데, 외할머니의 실수로 속옷 입는 것을 빠뜨렸다. 그녀는 할머니가 무서워 차마 말은 못하고, 수치심과 불안 속에서 입학식에 참석한다.

 휴전 얼마 후인 1955년, 제2국민병으로 징집되었던 아버지가 돌아와 석유회사 인천 출장소 소장으로 취직되면서, 5년여에 걸친 홍성에서의 피난생활을 정리하고 인천시 중앙동으로 이주한다. 인천의 자유공원 근처에 자리잡은 일명 ‘차이나타운’ 혹은 ‘중국인 촌’이 내다보이는 작은 일본식 집에 정착한 후, 오정희는 신흥국민학교 2학년으로 전학한다. 가뜩이나 소심한 성격의 오정희는 심한 열등감에 시달려 학교에는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학교가 파한 후 자유공원 꼭대기에 올라가 묵묵히 인천바다를 바라보거나, 신문연재 소설부터 야담류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읽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소녀 오정희는 한편으로 장난끼 많고 당돌한 아이였다. 집 근처 언덕의 중국인 촌에 세 들어 사는 ‘양공주’들의 하이힐과 플레어스커트와 페티코트 등의 이국적인 화려함과 아름다움은 그녀를 온갖 비밀스럽고 야릇한 상상세계로 이끌어가곤 한다. 이때의 체험과 상상력이 <중국인 거리>에서 그려진다.

 눈에 띄지 않게 학교를 오가던 조용한 오정희가 드디어 학교에서 주목받는 일이 일어난다. 1956년 초등학교 3학년 때인 어느 날, 작문시간에 쓴 <제비>라는 산문이 담임선생의 눈에 띠었던 것이다. 난생 처음 칭찬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후부터는 날마다 방과 후에 남아 글짓기 지도를 받아, 그 해 가을 경기도 내의 백일장에서 산문이 특선함으로써 단번에 ‘글 잘 쓰는 아이’로 소문이 난다.

 1959년 아버지의 전근과 함께 꽤 넓은 마당이 딸린 서울 마포구 신수동 집으로 이사하고, 수송초등학교 6학년으로 전학하며, 과중한 과외에 시달리고, 때로는 잠을 쫓는 각성제를 몰래 복용하며 중학교 입시에 매달린다. 어린 오정희는 입시의 중압감 속에서도 가방 속에 대학생 오빠 책인 니체, 헤세, 지드, 도스토예프스키를 몰래 넣고 다니면서 읽거나, 이광수, 김동인 등을 비롯한 한국 전후 작가의 소설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치운다.

 그녀는 학교 정구 코치와 절친한 아버지의 ‘빽’으로 정구부에 들어간다. 그것은 병약한 몸을 튼튼하게 만들겠다는 의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허황한’ 꿈을 품은 딸의 생각을 돌려놓겠다는 아버지의 생각이 더 크게 작용한 선택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막내 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자, 집이 싫어진 그녀는 새벽부터 밤까지 운동장에서 라켓만 휘두르고, 3학년 때에는 주전선수 자리를 차지한다. 그녀는 합숙소나 정구코트 벤치에 앉아 틈틈이 독서를 하고, 가끔은 사랑과 우정을 소재로 한 짧은 소설들을 써보며 소설가의 꿈을 은밀하게 키워간다.

 중학교 3학년 늦가을부터 선수 생활을 집어치우고 고교 입시공부에 매달린 끝에 1963년 이화여고에 입학한다. 그 뒤 내면의 열등감이 다시 살아나며 친구·가족·세상에 대한 강한 불신과 적의를 품고 반항적이 되어 결석과 조퇴를 밥 먹듯 한다. 책가방을 든 채로 혼자 교외선을 타고 돌아다니거나, 심한 문학병을 앓으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다.

 1966년에 작가가 될 뜻을 품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한 오정희는 이 학교 은사로 있던 김동리·서정주·박목월·김수영·김현의 강의를 듣는다. 당시 서라벌예술대학에는 이동하, 김형영과 같은 선배와 이경자, 윤정모, 김민숙, 송기원, 이시영 등의 동급생들이 있었다. 특히 이곳에서 만난 이경자와는 대번에 “인생의 미궁 속에서 아직 불도 지피지 않은 문학의 등잔불을 들고 음울하게, 온갖 열등감의 헝겊 쪼가리들에 감싸여 살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함을 깨닫고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이 즈음 오정희는 몇 편의 소설을 써보기도 하고 문학의 어려움을 어렴풋이 알게 되며, 자신에게 재능이나 광기가 없다는 생각과 거기에 겹쳐진 스무 살의 지적 열망과 절망에 사로잡혀 참담한 시간을 보낸다. 2학기 가을 무렵부터는 아예 학교 나가는 일을 작파해버리고 집에서 뒹굴며 낭인이 되어 정처 없이 유랑 길에 나설 것인가, 고아원 보모가 될 것인가, 스님이 될 것인가 하는 따위의 궁리를 하며 우울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이러한 괴로운 시간이 오정희의 문학에는 오히려 밑거름이 되었다. 마침내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단편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문단에 첫발을 내딛는다.

 작가는 1970년에는 대학을 졸업한 뒤 같은 대학 조교로 일하며 <번제(燔祭)> 등을 발표한다. 1971년 이후에는 잡지사, 출판사 등을 전전하면서 <봄날>, <관계>, <직녀> 등을 계속 발표하다가 1974년에 결혼한다. 이즈음 작가는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는 데, 하루종일 쓸데없이 냉장고 문을 여닫거나, 냉수나 차를 쉬지 않고 마셔대는 일로 그 초조함을 달랜다. 문단에 나오고, 결혼과 출산의 경험을 하며, 서서히 범속한 일상성에 매여 고정되기 시작하는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 욕구에 시달렸던 시기이다.  

 1978년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된 남편을 따라 춘천으로 이주하고 <꿈꾸는 새> 등을 발표한다. 1979년에 《중국인 거리》, 《비어있는 들》, 《저녁의 게임》등의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한다. 작가에게 제3회 ‘이상문학상’을 안겨준 <저녁의 게임>은 어릴 적 작가가 한때 화투를 배워 “자나 깨나 화투장이 눈앞에 어른대는 통에 한 학년 위의 오빠를 꾀어 학교를 가지 않고 벽장 속에 숨어들어가 화투를 치던, 끝내 어머니에게 들켜 죽지 않을 만큼 매 맞았던 체험이 모티브가 되었다.

 오정희는 같은 해, 가족이 모두 집을 나간 상태에서 홀로 남은 주인공이 등화관제 훈련으로 인한 어둠의 시간 속에서 느낀 감정을 묘사한 <어둠의 집>을 비롯하여 <겨울 뜸부기> 등을 발표한다. 그리고 1981년에는 어느 소도시 중산층 파티에서 보여지는 삽화를 통하여, 중산층 사회의 속물근성과 허위의식에 찬 일상, 이에 대한 모멸감을 드러낸 <야회>를 비롯하여 <인어>, <별사(別辭)> 등을 발표하며, 두 번째 창작집 《유년의 뜰》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다.

 1982년에는 더 이상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라고는 없는 노부부의 삶과 심리를 그린 《동경(銅鏡)》과, 결혼 이후 일상을 감당하지 못해 “바람처럼 펄럭이며” 가출벽을 보이다가, 결국에는 치한들로부터 윤간을 당하게 되는 여주인공이 충격으로 인해 망각되어진 어린 시절과 전쟁에 대한 상처를 기억 속에서 하나씩 길어 올리는 과정을 그린 <바람의 넋>, 그리고 <하지> 등을 발표하고, 같은 해 제15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다.

 1984년에는 <지금은 고요할 때>와 <순례자의 노래>, <새벽별>을 발표하며, 같은 해 8월에는 뉴욕 주립대 교환교수로 나가는 남편을 따라 가족 모두가 뉴욕 주 올바니 시로 이주하여 머물게 된다. 1986년 귀국하여 세 번째 창작집 《바람의 넋》을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한다. 1987년에는 <그림자 밟기>를, 1989년 <불꽃놀이>, <저 언덕>, <파로호> 등을 꾸준히 발표한다.

 이 즈음 문득 오정희는 “낡은 거푸집 하나로 똑같은 물건들을 거듭 찍어내고 있다는 느낌”에 견딜 수 없어 잠시 새로운 소설의 창작은 쉰 채, 1990년에 기왕에 발표했던 소설을 가려서 엮어낸 《야회》, 짧은 소설집 《술꾼의 아내》 등 주로 그동안의 작품모음집을 펴내는 데 만족한다.

 집 근처의 산에 갔다 오는 일 외에는 거의 외출을 피하고, 가족들이 나간 빈 집에서, 책을 보거나 글 쓰는 일에 매달린다. 하지만 쓰지 못한 채 빈칸으로 놓아둔 원고지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보낸다. “평생 말뚝에 묶인 소처럼 달아나지도 못하고 그 언저리를 빙빙 돌며 겁내고 눈치나 보며 살수는 없겠지. 맞대결을 하면 어쨌듯 결판이 나겠지.” 그래서 “속이 타고 막막하여 책상 위에 얼음을 갖다 놓고 깨물어 가면서, 소설 쓰기에 대한 주눅을 깨뜨리려”는 자기와의 싸움을 거쳐 1994년에 발표한 것이 <옛우물>이다. 같은 해 자선소설을 한데 묶은 《옛우물》을 ‘청아출판사’에서 펴내고, 십 년 가까이 살던 춘천의 스무 평의 아파트에서 서른 평의 아파트로 늘려 이사한다. 자기만의 서재를 갖게 되며 안정을 찾은 작가는 모처럼 신작 소설 <새> 등을 이듬해에 내놓는다.

 작가는 ‘이상문학상’의 수상소감에서 “내가 문학에서 나를 아낀다면 그것은 나를 아끼는 게 아니라 나를 죽이는 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언어를 통해, 그러나 결코 언어에 취함이 없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해나갈 것을 다짐한 작가에게 소설 쓰기는 “보상을 바랄 수 없는 짝사랑, 지독한 연애”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문학과 인생"이란 제목으로 오정희가 강연한 내용이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글을 써왔습니다. 당시 경기도에 속했던 인천에 살았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도내 백일장에 가서 장원을 했었습니다. 그것이 글쓰기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 자신이 글을 쓰게 된 데 대하여 운명이라든지 숙명, 필연성 따위의 비장미를 풍기는 수식어를 쓰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글을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적정한 교육을 받은 중산층의 주부로서 평범하게 살아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암기 위주의 공부가 싫었던 여고 시절, 별다른 재주가 없었던 저는 약간의 문장력에 기대어 일어섰고,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다른 길을 걸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또 그 이후에 제가 만난 선생님이라든가 벗들이 경쟁심과 열정을 부추겨 주지 않았더라면 역시 한 작가로서의 입지가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대학 시절 교수님께서 "천재는 집념에 다름 아니다"라고 말씀해주신 게 생각납니다. 미국의 작가 윌리엄 포크너는 작가는 "99%의 재능과 99%의 훈련과 99%의 노력으로 탄생한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제 나이 스물한 살, 대학교 2학년 때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30여 년의 작가 생활을 해오는 동안 여섯 권의 창작집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의 작품 생산량은 과작(寡作)에 속하고, 그래서 저에게는 과작의 작가라는 별칭이 따라 다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끊임없이 문학이 뭘까 소설은 어떻게 써야 할까에 매달려 왔고, 전전긍긍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 생활과 창작이라는 데 두 다리를 걸치고 엉거주춤하면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자괴감으로 고뇌하기도 했습니다.

 가끔 왜 내가 많이 쓰지 못하고 본격적으로 작가로서 살아오지 못했는지 분석을 해봅니다. 우선 게으름 탓도 클 것입니다. 한편으로 글을 쓰는 과정에서 크게 의식되고 말해지지는 않지만, 확실히 삶 속에 깃들어 있으면서도 우리 인생을 지배하는 어떤 것들을 예민하게 담아 내고자 하는 욕망이, 분위기나 이미지에 집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야기 줄거리보다도 분위기나 이미지에 집착하는 성향의 제게 있어서 소설 쓰기란 한 단어 한 문장과의 싸움입니다. 또한 제 몸과 정신을 뚫고 지나간 것이 아니면 어떤 상상력도 믿지 못하는 의심 많은 저의 성향, 또한 글을 쓸 때마다 갖게 되는 자모(字母) 하나하나까지도 뒤집어 버리고 싶은 참을 수 없는 파괴 욕구… 이런 것들이 저로 하여금 많은 작품들을 생산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저의 생활에 기대어 있습니다. 저는 상당히 단조로운 생활을 하고 있고, 생활을 단순화시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걸레질을 하거나 밥을 하면서도, 머리는 머리대로 따로 가동을 하는 거죠. 담요나 스웨터의 올 하나를 터서 잡아당기면 죽 풀리듯이 일상적으로 부딪치고 만나는 것들 속에서 모티브를 찾아내곤 합니다.

 제게 있어서 생활을 단순화한다는 것은 단순화시킴으로써 그것이 확대되어 보이도록 하는 것이죠. 돋보기를 들이댈 때 자세히 보이면서 크게 보이면서 의미도 커지는 것처럼. 뭔가 다가오고 난 다음에는 오래 묵히고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단편을 하나 쓰는 데는 20일쯤 걸리지만, 실제로 생각하는 건 여섯일곱 달쯤 걸립니다.

 저를 스치고 지나간 느낌이나 분위기는 남의 이야기를 듣고서 이걸 소설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제게 뭔가 휙 스쳐가는 이미지에서 출발하곤 합니다. 뭔가 다르다, 뭔가 표현해 보고 싶다는 작은 욕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 다음 아주 빈약하게나마 이야기 줄거리를 조금씩 만들어 보곤 합니다.

 저는 문학 이론으로 말하면 문학 이론가를 따라갈 수 없고, 글이란 백 권의 이론서를 읽느니보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한번 써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글은 끊임없이 쓰고 또 쓰면서 배우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왕의 이론서 이곳저곳에서 뽑아서 말하느니보다, 제 소설의 배경이라든지 집필 경위 따위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저의 초기작, 주로 20대에 쓴 소설들은 정상적인 삶의 틀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생활이나 정신적 신체적 장애자들, 뒤틀린 성의 이미지들이 등장하여 광기와 파격으로 가득 찬 소설들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저는 거기에 대해서 제 젊은 날의 참혹한 자화상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제 소설이 광기와 파격으로 가득 차 있다는 평에 대해서 저는 종종 소설을 쓰고 읽으려는 욕망 자체가, 이미 당연하고 상식적인 세계로부터의 일탈과 자유, 파격에의 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대답하곤 합니다.

 방황하는 청춘기에 가졌던 자신과의 대화, 세상과의 불화가 그러한 소설들을 쓰게 했다고 봅니다. 그 이후에 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비로소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작품 세계의 변모를 겪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낳고서야 비로소 저는 음습하고 폐쇄적인 20대와 결별할 수 있었습니다. 모종의 뒤틀린 환상으로 가득 찬, 마치 열병을 앓듯이 치른 청춘기와 결별할 수 있었습니다. 제게 호의를 보이지 않은 세상을, 혼돈과 질서를 원한과 질시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어렴풋이 싹텄던 것이지요.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 없이 당연한 일이지만, 제게는 인생관과 세계관이 바뀌는 획기적이고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아이는 세상과 저를 이어주는 통로였습니다. 저는 아이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바라보고, 상처와 아픔으로만 기억되는 어린 시절을 비로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시절의 이야기를 쓰는 한편, 일상적인 삶 속에 깃든 죽음과 탄생, 깊은 비극성에 한층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제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여성의 삶의 의미에 천착하게도 되었습니다. 남성과 대립·대비되는 존재로서의 여성이라기보다, 어떤 본질적인 여성성, 즉 생산하고 품고 떠나 보내는 자의 고독과 환희, 신비를 끝까지 파헤쳐 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났습니다. (략)]

 오정희는 작가 지망생이 좋아하는 작가이다. 대학의 문예창작과에선 오정희씨의 작품을 필사하면서 문장연습을 시킨다고 한다. 신경숙씨가 습작시절에 오정희씨와 김승옥씨의 작품을 거의 다 베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오정희는 밖에 나갈 때 항상 주머니에 메모장을 휴대한다. 잘 때에도 머리맡에 메모지를 둔다.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주로 적는다. 그렇지만 컴퓨터에 따로 저장하지는 않는다. 거기에 고착되기 때문이다. 메모의 8할을 결국 버리게 된다.

 오정희의 작품에는 간질환자 곱사등이 반신불수 육손이 등 정신적ㆍ육체적 불구자가 많이 등장했었다. 평론가들이 이른바 ‘불구 모티프’라 일컫는 것인데, ‘내 청춘의 참혹한 자화상’이라 답한 적이 있다. 타인들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폐적인 스스로의 결손감이 작품에 반영되었던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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