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원(1930-1985, 평북 선천)
1930년 11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한 오상원은 어린 시절에 월남하여 서울에서 용산중학교를 다녔다. 그는 본래 안정된 생활 기반을 갖고자 기술자가 되려 했으나, 곧바로 "예술만이 인간을 창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문학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그의 문학 수업은 우리말을 배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유년기를 지나 우리말을 새로 배워야 했던 것은 일제 치하에서 성장한 작가들의 슬픈 운명이었다.
어린 시절 오상원의 가장 큰 후원자는 그의 사촌형이었다. "사촌 형님이 책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많은 도움을 받았고, 또 사상적인 영향도 크게 받았다."고 그는 회상하지만 곧 충격적인 사건을 겪는다. 사촌형이 암살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촌형이 어느 정당에서 활동하였는지는 작가 자신도 뚜렷이 밝히지 않고 있지만, 어쨌든 그 형님은 "눈보라가 몹시 치던 어느 날 밤, 누구도 모르게 불귀의 객이 되었고", 그는 "어린 마음에도 나는 인간의 처참한 어두움을 배웠던 것이다."라고 당시를 회상하였다. 작품 전반에 깔린 어두운 분위기, 정치 상황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허무주의적인 태도 등은 이때부터 형성되었을지도 모른다.
곧 밀어닥친 전쟁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문학 수업을 계속한 그는 대학(서울대 불문학과)을 졸업하던 1953년에 희곡 「녹스는 파편」이 장막극 공모에 당선되었고, 이듬해 단편 「유예」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화려하게 등단하였다.
총살을 앞둔 국군 포로의 의식을 세밀하고 비정하게 포착한 단편 「유예」와 이후에 발표한 오상원의 작품은 허무와 냉정 속에서도 삶에 대한 애착이 번득이며 죽음이라는 절박한 상황을 정면으로 응시하려는 실존주의적 분위기가 넘친다. 특히 감정의 노출을 자제하고 긴박한 호흡을 전달하는 비정한 문체는 인간에 대한 강한 애정을 역설적으로 표현해 준다.
1950년대는 전쟁의 참상이 한반도 전역을 지배하였으며, 정치 상황도 매우 혼탁하여 테러와 음모가 끊이지 않았다. 한국인들에게 이 시기는 죽음과도 같은 어둠이었으며, 오로지 삶에 대한 의지로 버텨야 했던 나날들이었다. 오상원은 전후의 젊은 작가답게, 때로는 절망으로 몸부림치다가도 끝내는 비장한 의지로써 현실을 돌파해 나가는 인물들을 형상화하였다. 그가 그리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회 밑바닥과 주변에서 극한적인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총살을 기다리는 포로(「유예」), 전투 중 낙오하여 농민을 사살해 가면서 생존의 길을 찾아가려는 병사(단편「현실」), 미군 부대의 창고를 털어먹고 사는 인간들(중편「 황선 지대」), 전쟁으로 팔다리가 잘리거나 정신적 상처를 입은 제대 군인들(장편「백지의 기록」), 재산을 잃고 아내와 자식에게 얹혀 사는 아버지(단편 「부동기」), 정치 테러리스트(단편 「모반」) 등 모두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인물들이다. 특히 인간성의 회복을 기원하여 어둠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테러리스트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 「모반」(1958)은 작가의 관심이 정치의 세계까지 넓어졌다는 징표로서, 작품성을 인정받아 그 해의 동인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절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설사 죽음이 확실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헤아리고 인간으로서의 위치를 지켜나가고자 한다. 극한 상황일지라도 죽음과 정면으로 맞설 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실존주의적 사고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이 그의 작품들이다. 오상원은 장용학과 함께 대표적인 실존주의적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장용학의 사색형 인물과는 달리 행동형 인물들을 그린다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행동적 휴머니스트 작가로도 불린다.
그는 작가로서의 활동과 병행하여 기자 생활을 하였는데, 1960년대 들어서는 작품 활동이 거의 중단되다시피 하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훈장」(1964) 「담배」(1965) 「지루한 이야기」(1966) 「산」(1981) 정도의 단편들만이 있고 그나마 매우 짧은 분량들이었다. 전후 문학의 총아로서 각광을 받던 그가 불과 십 년 정도의 활동으로 그치고 만 원인의 하나가 장편 「무명」을 연재하다가 중단하게 된 충격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4ㆍ19를 전후한 시대의 정치, 언론계 현실을 그려낸 이 장편 소설을 오상원은 5ㆍ16 직후인 1961년 8월부터 잡지 『사상계』에 연재하기 시작하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중단하였다.
백우흠이 저서 『오상원 소설 연구』라는 책에 쓴 것처럼 군사 정권의 압력이 있었을 것이고, 이로 인해 작가로서의 의욕이 꺾이게 된 것 아닌가 하는 추측에는 사실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 진위야 어쨌든 오상원이 집필을 사실상 중단하게 된 것은 우리 문학계에 큰 손실이었다.
《동아일보》기자와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출판국 심의위원으로 있던 1985년 12월 3일에 오상원은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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