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경북 안동, 1904-1944)
육사는 호이고 본래 이름은 이원록이다. 고친 이름은 이활이다. 육사는 1904년 음력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천리에서 출생했다.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었다. 육사는 다섯 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우는 등 어린 시절에는 전통 한학을 공부했다. 열 한 살까지 조부 밑에서 한문을 배웠다. 육사는 여섯 형제의 두 번째였는데 형제 간의 우애가 지극했다. 할아버지가 맡고 있던 보문의숙(寶文義塾)에 다니기 시작한 열두 살 이후 백학서원을 거쳐 일본에 건너가 일년 남짓 머물렀다가 스무 살(1923)에 귀국했다.
아래의 산문을 보면, 이 무렵 이육사는 어떤 상실감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낙동강가에는 그 하이얀 조각돌이 일면으로 깔리고, 그곳에서 나는 홀로 앉아 내일 아침 화단에 갖다 놓을 차디찬 괴석들을 주우면서 그 강물 소리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그 물소리를 따라 어디든지 가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어 동해를 건넜고, 어느 사이 <플루타크 영웅전>도 읽고, <시저>나 <나폴레옹>도 다 읽은 때는 모두 가을이었습니다마는 눈물이 무엇입니까. 얼마 안 있어 국화가 만발한 화단도 나는 잃었고 내 요람도 고목에 걸린 거미줄처럼 날려 보냈나이다."
1925년 형 원기, 동생 원유와 함께 대구에서 독립 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들어간 이육사는 대구를 중심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1926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베이징 조선 군관 학교에 입학했다.
육사는 고국을 떠나 중국에 있을 때도 책읽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 한 예를 그의 수필 「연인기(戀印記)」에서 볼 수 있다. "그때 봄비 잘 오기로 유명한 남경의 여관 살이란 쓸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나는 도서관을 가지 않으면 고책사나 골동점에 드나드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라고 적고 있다.
이듬해 귀국한 이육사는 장진홍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관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그때의 수인 번호 264를 따서 자기의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육사를 포함해 사형제(원기, 활, 원일, 원조)가 함께 피검되어 들어가자 안동 유림의 힘을 입어 일주일만에 나왔다가 3일 후 다시 위로 3형제만은 투탄 사건의 주모자로 인정되어 재검되었다. 그 때 사건 조서에 형 원기는 지휘자이고 활(活)은 폭탄의 수입자이고 원일은 그 폭탄 상자에 글씨를 쓴 자라고 되어 있다. 이 때 3형제가 당한 고문은 참혹하였다. 옷을 차입할 때는 피옷을 받아 내었다고 한다. 2년 6개월만에 미결수로 풀려나올 수 있었다.
그밖에도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에 연관되어 옥살이를 하는 등 이육사는 모두 열 일곱 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나온 이육사는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베이징 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활동했다. 1932년 조선군관학교 간부 훈련반에 들어가서 두 해 뒤에 제 1기생으로 졸업했다.
육사는 1943년 북경으로 건너가 국내로 무기를 반입하려다 체포되어, 1944년 1월 북경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해방을 일년 남짓 앞둔 상태였다.
1933년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하며 등단하였으나 작품 수가 많지 않고 문단활동도 별로 하지 않았다. 그의 삶 대부분은 만주와 중국, 조선을 오가며 살았다. 시대의 질곡에 대결하는 강인한 정신을 정제된 시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그의 시가 지닌 특징이다. 유고시집으로 <육사시집>(1946)이 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절정] 전문
이육사의 생가는 도산서원 근처의 원천(遠川) 마을에 있었다. 원천은 낙동강변의 강마을로서 '먼내'라는 뜻이다. 원천은 안동댐이 세워지면서 차 두 대가 가까스로 비킬 수 있는 길을 경계로 반은 헐리고 반은 남았다. 그 반도 장마가 지면 수몰예상지역이다. 그래서 육사가 살던 집은 1975년에 안동 시내의 태화동으로 이전, 민속자료 제10호로 보존되었다.
육사는 그의 산문에서 "지금 내 머리 속에 타고 있는 내 집은 그 속에 은촉대고 있고 훌륭한 현액(縣額)도 있기는 하나 너무도 고가(古家)라 빈대가 많기로 유명한 집"이었다고 생가의 모습을 회상했다.
지금 옛 집터에는 유허비(遺墟碑)와 시비가 서 있다. 유허비에 새겨져 있는 육우당(六友堂)은 이 집의 당호인데 그들이 6형제라 해서 형이 명명한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원조는 6형제 중 다섯째로, 월북했다가 50년대 초의 남로당 숙청 때 반동분자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
생가터 바로 옆에 이육사 문학관이 건립되었다.
안동댐 아래에는 1968년 세워진 이육사 시비가 있는데, 비문은 조지훈 선생이 직접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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