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1328∼1396, 영덕)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말 삼은의 한 분인 목은 이색은 1328년 5월 9일 외가 동네인 영덕군 괴시리에서 태어났다. 한산 이씨 문중으로서 당대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이곡이 그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친구인 이제현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어 학자적 가풍 속에서 자라 13세에 성균시에 급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20세 때에 아버지와 함께 원나라로 건너간 이색은 그 곳에서 벼슬을 지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고국으로 돌아와 과거에 급제하는 등 고려·원나라 양국을 넘나들며 이름을 떨쳤다. 이색은 과거에 무과를 두어 용맹한 장군을 길러내야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33살 되던 해에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에는 안동까지 피난 가는 수모를 겪었으나 훌륭한 무관들 덕분에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그 뒤 이색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성균관을 다시 짓고 대사성이 되어 김구용, 정몽주, 이숭인 등을 발탁해 유학을 보급하고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한산군, 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다 우왕3년(1377)에 우왕의 사부가 됐다.
이색은 구래의 제도와 관행을 존속시키는 고려왕조 내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정도전·조준 등은 모든 제도에 대해 철저한 개혁을 주장하는 가운데 유교의 이상에 맞는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주장하였다. 곧 성리학을 수용하여 개혁을 주장하던 사대부는 고려왕조를 전제하는 가운데 개혁을 지향하는 수성파(守成派) 사대부와 체제변혁을 모색하는 창업파(創業派) 사대부로 분기하였다. 이색은 고려왕조의 존속을 전제로 개혁을 주장하는 수성파 사대부에 속하였다.
1389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창왕이 즉위한 후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된 이색은 정도전 등의 움직임에 적극 대처하였고 명에 의존해서 반대파를 누르려고 했다. 이는 명과의 천자제후라는 명분관계를 설정하는 가운데 고려 내부의 군신질서를 확고히 다지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내정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명의 방관적인 입장으로 이색의 의도는 실패하였고, 정도전 등의 개혁과 왕조창업이 결행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색의 왕조재건 기획의 실패는 후의 정몽주의 마지막 노력의 실패와 함께 왕조를 지키려는 수성파 사대부의 좌절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長湍)·함창(咸昌) 등지에 유배되었다. 이 때 이색의 두 아들도 죽음을 당한다.
1391년 조선왕조 건국으로 석방, 한산백에 책봉됐으나 불사이군 충절로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색은 쓰러져 가는 고려왕실을 끝까지 지탱하려고 했으나 역부족으로 왕조교체를 회한과 오욕을 지켜보면서 전왕조의 유민으로 의리를 다했다. 이색은 고려왕조의 존속을 통하여 개혁정치를 추구하였지만, 시세 변화에 따른 보다 강도 높은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 등에 의하여 좌절되었고 결국 고려왕조에 의리, 절의를 다한 충신으로 남게 되었다.
태조의 간곡한 요청으로 만났을 때도 그를 동료로서의 예우만 했다. 이것이 괘씸죄(?)에 걸려 이듬해(1396) 돌아가실 때 독살이라고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색이 69세 때의 일이었다. 이색이 여주 신륵사에서 피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방원(혹은 정도전)이 사자를 시켜 여강의 연자탄 제비여울에서 휴식하던 이색에게 술과 안주를 내려보내어 어주라 속이고 극독이 들은 술병을 보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신륵사 승려들이 마시지 말라고 말렸으나, 이색은 태조가 보냈다는 그 독술을 마신 후 곧 배안에서 죽었다. 이때 술병을 막았던 대나무 잎이 강가로 떠밀려가서 대숲을 이루어 그 대쪽같은 절개를 상징하였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여주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색의 죽음 후 태조 이성계는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내리며 3일 동안 조회를 중단했다.
이색은 문하에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이색은 그의 호 은(隱)자에서 보여지듯이 은둔과 무욕과 탈속의 삶을 살았으며, 저서에《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이문원 교수는, "목은은 학자와 정치가, 교육자로서 큰 자취를 남겼으며,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는 왕조교체기에 끝까지 고려에 대해 불사이군하는 충절을 지킨 충신이었다. 고려를 통틀어 산문으로는 익재 이제현, 시인으로는 목은을 꼽는다." 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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