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이상(1910-1937, 서울)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7:42

이상(1910-1937, 서울)

 

 1910년 9월23일에 태어난 이상은 1912년 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집에서 장손으로 성장한다. 이상은 백부의 권유로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가 되었다.  이무렵 이상은 자신이 폐결핵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상은 23세의 나이로 직장을 그만둔다. 병마는 오히려 그를 백부와 친부모의 기대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그가 선택한 길은 투병이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마음대로 소모하는 것이었다.

 이상은 직장을 그만두고 휴양지에서 금홍이를 만나 열애에 빠진다. 이후 금홍이를 마담으로 앞세워 '제비'라는 다방을 경영하면서 당대의 문사들과 교류했다. 그리고 이 인연으로 그는 34년 구인회에 가입하게 되고,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다. 미친 놈의 잠꼬대다 무슨 개수작이냐 등 빗발치는 항의로 인해 중도에 그만두긴 했지만 이상의 이름을 널리 알린 측면도 있었다.

 구인회 모임에서 이상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이상의 말솜씨를 이태준이나 김기림 등은 따를 수가 없었다. 박태원이 대작을 하고 간간이 정지용이 새디스틱한 여자 이야기에 핀잔을 줄 정도였다. 그럴 때면 이상은 독특한 웃음을 웃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나무젓가락에 간장을 찍어서 때가 낀 식탁에 낙서를 했다. 그리고는 그 젓가락으로 천연스레 안주를 집어 먹었다. 이태준과 김기림은 연극을 보듯 그의 한 동작 한 동작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이상은 모임이 있으면, 어느 때나 시니컬한 웃음을 웃으면서 기지발랄한 말을 종횡무진으로 구사했다.

 이 무렵 제비다방 뒷골방에 마련했던 조그만 살림방은 그의 대표작인 '날개'의 무대가 되었다. 금홍은 마담으로 '제비' 카운터에서 일하고, 이상은 골방에 처박혀 있다가 밤이 되어야 밖으로 기어나오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그의 제비다방 시대는 1933년 7월 14일 개업으로부터 1935년 9일, 파산하기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가장 격렬한 사랑마저 이렇게 금방 끝나고 만 것은 폐병 때문에 성기능도, 보석을 사줄 만한 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 여자에게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금홍은 이상에 대해 '쓸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는 병신이야. 게다가 돈도 벌어올 줄 모르고'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정도로 그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그에게 있어 1933년과1934년은 화려한 문단 등단뿐 아니라 파산, 금홍과의 파경으로 가득찬 해였다. 당시 그가 느꼈던 좌절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있다.

"하루는 나는 이유없이 금홍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금홍이가 너무 무서웠다. 나흘만에 와보니까 금홍이는 때묻은 버선을 윗목에다 벗어놓고 나가버린 뒤였다."

 금홍과 서먹해질 즈음 그는 동인들과의 만남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금홍이 나간 직후 그는 잠시 카페 '쓰루'에 있었던 여급 권순희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그녀를 짝사랑하다 자살소동까지 일으킨 친구 정인택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한 채 둘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결혼식의 사회까지 맡아주었다.

 이후 이상은 아버지의 집을 저당 잡혀 인사동에 카페 '쓰루'와 광교 근처에 다방 '69'를 개업했다가 곤 망해버리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명동의 '무기'를 설계해 개업하려했으나 중도금이 없어 도중 하차하고 말았다. 빈민촌으로 가족을 이사시킨 이상은 묵묵히 따르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무능력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는 박태원, 김유정과 자주 어울려 다녔다. 여러 카페를 전전하며 심신을 소모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그가 했던 한마디는 그의 생활을 잘 드러내준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절망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상이 수염을 창대같이 기르고 밤을 낮같이 사는 퇴폐적인 인간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돈을 못 벌었으되 돈을 낭비한 축은 아니었다. 어디서 목돈이라도 들어오면 호주머니 깊숙이 넣어 집에 갖다 주었다. 그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자리 술은 물론 커피 한번 시원하게 사지 못했다. 그가 술을 산 것은 싸구려 선술집에서뿐이었다고 한다.

 서정주, 함형수, 이성범, 최하림 등이 이상을 찾아갔을 때이다. 그들은 종로통의 술집을 거쳐 반도호텔 뒤의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주모에게 약주를 청한 뒤, 이상은 분위기를 잡을 겸 그의 장기인 [창부타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다른 사람도 따라 불렀으나 이상의 노래 솜씨를 따를 수 없었다. 그만큼 이상의 음색이나 창법은 빼어난 데가 있었다.

 금홍이와 헤어진 이상은 1936년 되던 해, 변동림을 만나 결혼한다. 그러나 생활의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은 동경행을 결심하고 혼자 동경으로 떠난다.  그러나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 보려는 이상의 시도는 실패했다. 아니 성공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상은 37년 불령선인(사상범)으로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지만 오랜 병고를 겪은 그의 몸은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져 있었다.

 결국 이상은 4월 17일 동경 병원으로 달려온 변동림과 벗들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이상은 "레몬을…" 했다. 벗들이 거리로 달려나가 레몬을 사가지고 왔을 때 이상은 숨을 떨구었다. 그가 사망한 날은 그와 절친했던 김유정(3.19)과 불과 며칠의 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