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보 (1467-1555, 안동 예안)
이현보는 강호문학(江湖文學ㆍ강과 호수, 즉 자연에 묻혀 사는 삶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읊은 문학)의 선구자이자 청백리(淸白吏ㆍ재물 욕심이 없고 깨끗한 관리)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현보는 세조 13년 안동 예안에서 태어났다. 얼굴이 검붉고 볼에 털이 난 자라는 기록이 있다.
그는 1498년 식년 문과(式年文科ㆍ조선 시대에 3 년마다 보이던 과거)에 급제한 다음, 32 세에 벼슬길에 올랐다. 왕의 명령을 기록하던 관청인 예문관 등의 벼슬을 거쳐, 임금에게 간(諫ㆍ임금에게옳지 못한 일을 고치도록 말함)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사간원의 정언벼슬에 이른다.
정언 시절에 이현보는 연산군에게 "사관(史官ㆍ역사를 기록하던 관원)이 임금의 일을 적을 때 멀리 엎드려 있으면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며, 탑전(임금의 앞자리)에 가까이 가 임금의 언어와 동작을 기록토록 했다.
연산군 때 결국 귀양살이를 했으나, 중종반정 후 복직됐다. 이 기간 동안 밀양·안동·충주·성주 등 주로 외직을 자청하여 아홉 고을의 수령과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우수하여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았으며, 청렴 결백하여 청백리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그는 외직을 역임하는 동안 향토에 기반을 둔 사대부 계층의 향촌 자치기능 강화에 역점을 두고 고을을 다스렸는데, 벼슬에서 은퇴한 뒤에는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처사적(處士的) 삶의 방식을 개발해 내는데 몰두하여, 후배인 이황이나 이황의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가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을 역임하고 벼슬이 형조참판에 이르자 사직하기를 원했으나 임금이 승낙하지 않으므로 신병을 핑계삼아 고향으로 내려가서 전원생활을 즐겼다. 이현보가 사직서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조정의 사대부들이 강가에 나와 전송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배 안에는 화분 몇 개와 바둑판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76세에 고향에 돌아온 이현보는 조정에서 몇 차례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올라가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농암가(聾巖歌)」,「어부가(漁父歌)」같은 국문시가를 창작하거나 개작한다. 특히, 83세 때 잊혀져 가던 「어부가」(12장)를 재발견하여 이를 개작하였는데, 이현보에 의하여 개작된 「어부가」(9장)는 흔히 농암 「어부가」로 불리며 조선후기의 한국문화(문학과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이 농암 「어부가」는 뒷날 궁중 노래로부터 민간의 뱃노래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불려졌고 조선말엽에는 십이가사(십이잡가라고도 함)의 하나인 「어부가(일명 어부사)」로 정착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요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현보는 또 기존의 어부단가 10장을 5장으로 개작하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이현보에 의하여 다듬어진 「어부가」와 「어부단가」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등에 영향을 주어 조선 후기 문학사에서 「어부가」라는 하나의 작품 계열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현보는 '어부가', '농암가' 등의 농암문학의 창작 현장인 분강(낙동강 상류)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북쪽은 높은 산에 의지해 있고, 구름에 닿을 듯한 서쪽은 긴 숲이 무성하게 감싸안았다. 동쪽은 긴 강이 유유히 흐르는데, 멀리 청량산으로부터 만학천봉 사이를 구비 돌아 반나절 정도 흘러와 '관어전(官魚箭)'에 이른다. 그 빼어난 모습은 긴 성과 같고, 그 앞에서는 충격으로 아래에 깊은 소(沼)를 이루는데, 이 소를 '별하연(別下淵)'이라 한다. 소는 절벽을 베개로 하는데, 절벽 위에는 병풍암(餠風庵)'이라는 옛암자가 있다. 좌우로 기암과석이 뾰족한데 그 그림자가 소에 떨어져 쳐다보기조차 어렵다. 이곳으로부터 물결은 점점 완만해져서 그 모습이 징홍청격(澄泓淸激)의 경개를 이룬다, 이 물굽이가 농암 아래 에 이르면 넗고 가득하게 퍼지고 쌓여 조그만 배를 띄우고 노를 저을 수 있게 되는데, 이를 '분강' 이라 한다. 강 가운데는 반석이 있어 마치 자리바위와 같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점석'이라 한다."
어부가 서문에 이현보가 적기를, "…이를 얻은 후에는 전에 감상하던 모든 가사는 버리고 오로지 여기에만 뜻을 두었다. 손으로 써서 꽃피는 아침과 달뜨는 저녁에 술잔을 잡고 벗을 불러 분강의 조각배 위에서 영(詠)하게 하면 흥미가 더욱 참되어 권태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라고 했다.
이현보의 국문시가 작품들은 영남의 후배들에게 국문시가의 필요성을 일깨워 줌으로써 이황에 의하여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창작으로 계승되고, 다시 이황의 제자인 권호문(權好文)의 「독락팔곡(獨樂八曲)」등으로 이어지면서 영남가단이라고 불리우는 국문시가 창작의 전통으로 확립된다. 이는 송순 -정철 -윤선도로 이어지는 호남가단과 함께 조선후기 한국문학을 풍성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황은 ‘농암선생행장’에서 말하기를,
"선생은 자제와 비복들을 편애하지 않았으며, 자녀의 혼사에 벌열(閥閱) 집안을 희구하지 않았다, 성품이 고고하고, 간결했으며, 사람을 대우함에 어리석고 천함을 불문하고 표리가 같았다. 간혹 술자리에 마련되어 초청하면 구차하게 사양하지 않았고, 향촌에 있을 때 사적인 것으로 공적인 것을 범한 적이 없었다.…
선생은 남을 위하는 데는 부지런하고 자기를 위하여 데는 치졸하였다. 항상 몸을 깨끗이 하며 넘치는 것을 경계했다. 경사가 있으면 문득 근심하며 벼슬이 오르면 두려워하여 기뻐하지 않았다. 욕심이 없어 이익을 탐내지 않았으며, 무릇 입고 쓴 물건이 간소하여 일개 서생(書生)과 다름없었다."
이현보는 또한 효의 실천자로 널리 알려져있다. 그가 부제학으로 있을 때였다. 그가 부모님을 뵈려고 오는데 그때 부친의 나이는 94세였고 , 숙부는 92세, 장인은 82세였으므로, 그는 그 고을 사람 중에 70세 이상인 아홉 명을 모아 구노회를 만들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어린 아이가 입는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부려 아버지를 즐겁게 해 드렸다.
1512년 46세 때, 이현보는 분강의 기슭 농암 위에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한 이른바 애일당(愛日堂-매일 사랑의 집)을 지었다. 이현보는 그 취지를 ‘효도’와 ‘수양’이라 하고, ‘자손들도 대대로 지켜야 하는 규범으로 삼고자 한다’고 희망했다. 즉,“애일당의 편액을 ‘애일’이라 한 것부터 이미 일신의 즐거움을 위함이 아니라, 오직 부모 효도에 ‘날(日) 부족함의 뜻’이 거기 있다”고 했다. 이현보의 이런 경로사상은 ‘화산양로연’과 더불어 당시 관료들을 고무시켜 대거 방문하게 하였으며 많은 시가 답지했다. 애일당은 농암 유적 가운데 가장 정체 있는 건물로, 농암 바위와 더불어 유서 깊은 농암문학 현장의 성격도 아울러 지닌다. 애일당 편액은 중국 제2명필이 썼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지금 마루에는 농암, 모재, 회재, 퇴계의 시가 걸려있다.
화산양로연에서 주목할 부분은 이현보가 여자와 천민까지도 함께 초청했다는 점이다. 이현보의 이런 측면은 집안에서도 “자제와 비복들을 편애하지 않았고, 혼사도 벌열 집안을 희구하지 않았다”는 퇴계의 기록과 일치한다. 당시의 사회가 삼엄한 신분사회였음을 생각 할 때 이는 파격적인 일이며, 경로(敬老)와 박애 정신에 대한 이현보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현보는 화산양로연을 개최하는 취지와 시를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기묘년 가을, 관아에서 양로연을 베풀어 부내 80세 이상 노인을 찾아 사족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불문하고 나이만 되면 다 오게 하니 수백 명이 되었다. 나의 양친이 인접한 예안현에 계시는데 연세가 지금 80이었다. 맹자 말씀에 “老吾老以及人之老(내 부모를 대우하듯 다른 사람의 부모를 대우하라)” 했으니, 이 좋은 시절 자리를 펴고 노인들을 모셔 즐겁게 해 드리는데 내 부모 또한 모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내외청에 자리를 마련하고 어버이를 중심으로 풍성한 음식을 대접하니, 보는 사람들도 칭찬하고 나도 자랑스럽다. 대개 관리나 장수, 재상이 되어 열정(列鼎)의 규모로 봉친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고을 원의 신분으로 어버이와 향중의 노인들을 함께 초청하여 자리를 마련함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 이런 모임을 다시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세월이 지나감에 한편은 기쁘고 한편은 두려움의 감정(一喜一懼之情)이 저절로 일어, 시 한 수 지어 좌중에 화답을 구하고 먼 후일에도 잊지 않을 자료로 삼고자 한다.”『농암집』, ‘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
歲稔時淸九月天 풍년 9월 하늘 아래
公堂開宴會高年 노인들을 청내로 모셨네.
霜髥雪 扶携處 서리서리 백발들이 손잡은 주변에
赤葉黃花爛 邊 단풍, 국화가 가득하네.
位設尊卑酬酌遍 나누어 수작하는 자리,
廳分內外管絃連 내·외청에 음악이 이어지네.
樽前綵戱人休怪 색동옷 입고 술잔 앞에 춤추는 사람 괴이하다 하지 마라
太守雙親亦在筵 태수 양친이 또한 자리에 계심이다.
농암 이현보는 명종 10년(1555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효성을 높이사 효절공(孝節公)이란 시호(諡號ㆍ죽은 뒤 그의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임금이 내린 이름)를 내렸다. 분강서원에서 선생을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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