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1939-2008, 전남 장흥)
이청준은 1939년 8월 9일 전남 장흥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집에 가기 위해서는 전남 장흥읍에서 솔티재를 넘어 천관산(天冠山)을 넘어야 한다. ''하늘에 관을 씌운 모습''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 산은 어찌 보면 작가의 탄생을 예견하고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청준 말고도 한승원, 이승우와 같은 출중한 작가들이 모두 이 고장 출신인 것이다.
그가 태어난 장흥군 대덕면 진목리는 앞으로는 푸른 바다가 보이고, 뒤로는 산이 있는 시골 마을이었다. 진목 마을은 영화 『축제』에서 오정해가 포구 마을의 한 횟집에서 술에 취해 노래하는 연기를 펼친 곳이다. 또한 그의 작품 중 단편 「침몰선」, 「노송」, 「돌아온 풍금」의 배경이며, 장편 『흰옷』의 초등학교 여선생이 부임하고 떠나던 포구이기도 하다.
이곳 오지벽촌에서 중학교 입학 전까지 부모님과 일곱 형제와 함께 살았고, 고등학교는 광주로 유학을 가 광주제일고를 다녔다. 이청준은 광주 유학생으로서 마을의 자랑거리였다. 부모님은 물론 마을 모두가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출세가 보장되는 법학을 택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본격적으로 빠져들었던 문학의 세계를 향해 서울대 독문학과에 진학하였다.
이청준이 문학으로 나아가게 된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그가 여섯 살 나던 해 어느 봄날 새벽, 세 살짜리 막내가 홍역으로 죽은 것을 시작으로 연달아 맏형과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다. 멋쟁이로 통했으며 책읽기를 즐겼던 맏형은 스물여섯 한창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다시 2년후에는 그 맏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던 부친이 타계했다. 어린 이청준은 형이 읽던 책들의 행간에 적어놓은 단상이나 일기장, 생전의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통해 형과의 정신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글을 통한 인간의 정신적인 재생을 믿게 된다. 그 경험은 이청준의 문학적 상상력에 근원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청준의 어릴 적 체험으로 빠뜨릴 수 없는 커다란 기둥은 가난과 어머니이다. 이청준은 공사석을 막론하고 스스로 그리 말했으며, 「눈길」은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1977년에 쓰여져 이청준의 가장 빼어난 단편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 작품의 배경은 이러하다.
그의 형은 고약한 술버릇으로 전답과 집까지 홀랑 팔아먹고 만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이청준은 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갔는데 어머니는 그 사실을 감춘 채 집주인의 허락을 얻어서 내 집인양 아들을 맞이하여 밥을 해 먹이고 잠까지 재워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신새벽에 눈 쌓인 산길을 걸어 아들을 읍내 차부까지 배웅하고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아들과 자신이 걸어갔던 눈길에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그 발자국에서 아들의 목소리와 온기가 그대로 느껴져 아들의 발자국만을 밟으며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눈앞이 가리도록 그 발자국 위에 눈물을 뿌리면서 말이다.
이청준의 어머니는 1994년에 세상을 뜨셨다. 이청준은 어머니의 부재를 글쓰기를 통해서 메운다고 한다. 이청준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고향 나들이를 할 때면 원죄의식과 같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 많다. 그것은 이청준 자신의 고향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어릴적 고향은 그 시절 어디나 다 그랬었던 것처럼 가난하고 남루하였다. 이청준은 가난한 고향을 부끄러워하며 빠져나왔다. 나이가 좀 들고 난 뒤 고향과 화해를 하고 그곳을 다시 찾고 싶어졌을 때 그 옛날의 일들은 그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그는 지금도 고향집을 찾을 때면 공연히 무언가 떳떳치가 못한 느낌 때문에 될수록 날이 어두운 때를 타서 들고나곤 한다. 그는 그 부끄러움이 소설을 쓰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고 한다.
서울대 4학년 재학중이던 19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退院)」이 당선되면서 이청준은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시기 이청준은 독일 소설을 통해 늘 만나던 주제인 ''인간의 심성'', ''선과 악의 투쟁''이라는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맞는 초고를 65년의 노트에서 골라내어, 약 일주일에 걸쳐 손을 본 다음 완성한 소설이 바로 「병신과 머저리」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1967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후에도 1969년「매잡이」로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75년「이어도」로 한국일보창작문학상, 1978년 「잔인한 도시」로 이상문학상, 1980년「살아있는 늪」으로 중앙문예대상, 1986년「비화밀교」로 대한민국문학상, 1988년「날개의 집」으로 21세기문학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휩쓸었다.
이청준의 소설에는 도공이든 소리꾼이든 일종의 예술가들의 가슴속에 맺혀있는 한의 구조를 실타래 풀듯이 풀어가 보는 것이 많은데, 특히 몇년 전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더욱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서편제』는 소리를 찾아 떠도는 광대의 애절한 삶과 한을 그리면서, 그 한의 극복과정을 통해 전통을 재창조한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청준은 평소 "문학이란 불행의 멋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실의 큰 난국을 겪으며 가끔 "이 고통 앞에 혹 소설쓰기란 부질없는 넋두리요, 혹 뻘판에 얹힌 배를 배 위에서 미는 것처럼 허황된 짓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고 말한다.
천형이라 했던가. 기술과는 달리 글쓰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점점 힘에 겨워오는 작업이다. 자기모방이 심해지고 소재도 고갈이 되고 특히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을 발표할 때면 더더욱 그렇다. 때문에 이청준은 서재로 들어오기가 무척 망설여지고 때론 끔찍스럽기까지하다고 한다. 그래서 퇴근(작업실을 나가는 것) 후엔 반드시 술부터 마시는 것이 일과가 됐다. 하지만 또 쓸 수밖에 없는 게 작가의 운명이다.
이청준은 판소리를 좋아하고, 소시적에는 좋아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서양음악은 클래식이건, 팝송이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 출신의 여자 가수 나나 무스쿠리를 좋아한다. 남들은 '자유여 너를 위해서 노래 부른다'라는 노래를 좋아하는데도, 그는 유독 '숲속의 빈터'라는 노래를 제일 좋아한다.
이청준은 음모를 꾸미기를 좋아한다. 음모라고 하면 컴컴한 구석이 연상되지만 그가 주로 생각해서 만들어 내는 일은 저녁을 집에서 먹을 것인가, 밖에서 먹을 것인가, 주말에는 남한산성이라도 한번 올라가 볼 것인가, 누구를 꾀어내어 술이라도 빼앗아 먹을 것인가 하는 하찮은 일들이다. 그러느라고 머리카락이 은빛이 되었다고 한다.
이청준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직업을 가졌으면서도,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하는 월급쟁이처럼 시간표 짜기를 좋아한다. 아침에 그의 작업실(사실 그의 집에 있는 공부방을 말한다)에 출근하고, 점심 먹고 다시 들어가서 일하다가, 저녁 여섯 시에 퇴근하는 월급쟁이 생활인 셈인데 월급쟁이와 다른 점은 월말이 되어도 아무도 그에게 월급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충실하게 월요일부터 토요일 낮까지 근무하고 주말이나 휴일을 꼬박꼬박 기다리며 살고 있다.
한국 영화계는 소설가 이청준에게 빚진 것이 많다. 지난해 배우 전도연에게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밀양'은 그의 소설 '벌레이야기'(1985)가 원작이다. 단편 '석화촌'은 1972년 영화화돼 청룡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고,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는 1993년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 밖에 김수용 감독의 '병신과 머저리',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 이장호 감독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 등이 그의 소설을 모태로 삼았다.
이청준의 절친한 친구이자 작고한 평론가 김현은 존경할 만한 작가로 '토지'의 박경리와 이청준, 단 둘을 꼽았다. 그는 두 거장에 대해 "거의 순교자적인 태도로 작품에 달려들고 있다"면서 "독자의 비위를 맞추는 데만 신경을 쓰는 듯이 보이는 작가들에게 이런 작가들이 있다는 것을 크게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오롯이 문학에 헌신한 까닭은 소설가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소설가, 혹은 문학을 '깜깜한 밤길을 앞서간 선행자'로 비유해 왔다. 불확실하고 외로운 인생길을 걷는 인간은 앞서간 선행자가 있다는 말만으로도 불안감을 떨친다는 것이다. 떠들썩하게 사랑을 외치는 대신 조용히 곁에 다가가 한 편이 되는 것이 그의 처세이자 문학이었다.
한국 사회가 '당신들의 천국'이 '우리들의 천국'으로 바뀌길 바랐던 인간주의자 이청준. 그는 폐암과 싸우면서도 "겪고 있는 고통을 함부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꼿꼿한 군자의 모습을 남기고 그의 천국으로 떠났다.
시인 김광규 한양대 교수는 고인의 영전에 바치는 조시를 통해 서울대 문리대 재학시절 함께 문학을 꿈꿨던 기억을 회고했다.
"자네의 잔잔한 말소리와 / 조숙한 의젓함 / 얼마나 오랜 세월 안으로 안으로 / 아픔을 삼키고 다져야 / 그렇게 정겨운 웃음이 배어나오는지 /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네 / (중략) /눈길 걸어 떠난 고향으로 / 매미 울어대는 숲 속으로 자네는 / 이제 돌아가는가 / 회진면 진목리 갯나들 / 산비탈에 지은 새집으로 / 학처럼 가볍게 / 날아드는가"
고인은 전남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마을회관 앞에서 지역 문인과 예술인들에 둘러싸여 마지막 의식을 치른 후 노모가 잠든 고향 땅에서 함께 영면에 들어간다.
아래는 황효수 교수의 글이다
[한 소년이 있었다. 중학교에 가기 위해 돈을 벌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워낙 집안이 가난한 탓이었다. 청년이 되어 서울대에 입학했다. 배가 고파 친구의 하숙방에 있던 참기름을 보고는 병째로 마셔버린 적도 있다. 무사할 리가 없다. 며칠 동안 설사를 하며 부대꼈다. 거처를 구하지 못한 밤이면 대학 강의실에 숨어들었다. 잠을 자기 위해 들어온 강의실을 매일 밤 수위는 전짓불(손전등)로 비추었다. 휘두르는 불빛에 들켜 쫓겨나지 않으려고 몸을 피했다. 전짓불은 참을 수 없는 공포였다. 소년을 따라다닌 허기와 가난의 체험은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소년에게 빛은 '한 줄기 빛'이라는 상투적 표현의 안도감이 아니라 지독한 공포의 원인이 되었다. 작가 이청준의 이야기다.
이청준은 전짓불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트라우마는 재해를 당한 뒤에 생기는 비정상적인 심리반응이다. 뇌에는 외부 자극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두 개의 정보처리 시스템이 있다. 편도체와 해마이다. 편도체는 반사적이고 즉각적인 신체 반응을 유발한다. 해마는 외부 자극을 과거의 유사 상황과 비교하여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대응책을 시행한다. 두 시스템은 외부로부터 위협적인 자극이 들어올 때마다 상호 보완하면서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트라우마를 경험하면 뇌의 정보처리 시스템은 커다란 혼란을 겪는다. 자극에 대한 적절한 대처는 없어지고 불안과 공포, 무력감, 불안감을 나타낸다.
하지만 뇌는 치유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트라우마는 억압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면적으로 처리되지 않은 채 고정되어 있다. 사실에 대한 인식과 직면은 트라우마 해소에 중요하다. 트라우마 해소는 트라우마 사건의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의 사건을 삶의 전체 맥락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그 나름의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이청준은 전짓불의 트라우마를 글로 썼다. 그 스스로도 "나의 문학 작업은 자기 구제의 한 몸짓으로서 출발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전짓불 앞에서의 두려움과 공포를 밖으로 끌어냈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일들도 글로 써서 보면 담대해진다. 종이 위에 기록된 사건일 뿐이다. 견딜 만해지면 더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다. 글쓰기를 되풀이해가는 과정 속에서 자기를 갱신하는 소설을 썼다. 그의 '소설질'의 출구는 불행한 가난의 체험을 승화시키려는 글쓰기 치유인 것이다. <퇴원>에서는 아버지에게 느끼는 공포, <소문의 벽>에서는 말하지 못하는 진술 공포, <개백정>에서는 인간의 폭력적인 잔인성에 대한 공포를 형상화했다. 그의 글쓰기 목표는 공포의 제거와 참다운 자신의 모습 당당하게 드러내기였다.
간호사의 시각에서 볼 때, 예견하지 못했던 일을 겪으면서 보이는 다양한 행동들은 질병이 아니라 어려움에 대한 인간의 저항의 일부이다. 인간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갖고 있다. 다만 극심한 공포와 정서적 압력이 내적인 힘을 발휘하는 역량을 위축시키는 것이다. 자기의 경험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고 노력하는 동안 스스로 역량은 살아나고 강화된다. 용기를 내어 보자. 소설가 이청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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