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이은상(1903∼1982년, 경남 마산)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7:50

이은상(1903∼1982년, 경남 마산)

 

 시조 시인인 이은상은 소월과 함께 많은 작품이 작곡돼 널리 노래로 불려지고 있다.

 학이 날아가는 형상이라는 무학산을 뒤로 하고 호수 같은 바다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고장 마산. 유독 많은 문인을 배출해 문향의 고장이다. 노산 이은상은 1903년,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한의사였던 노산의 부친은 그를 낳던 이듬해 마산에 첫 교회를 세우고, 현재 창신 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창신학교를 설립한 지역 유지였다. 아버지가 설립한 창신학교를 마친 이은상은 잠시 그 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연희 전문에 입학했다. 이후 와세다대학 사학부에 청강생으로 들어갔다 동양문고에서 국문학을 연구한 뒤 귀국, 각종 사회단체와 언론계 등에 몸담았다.

 노산 이은상이 1923년 등단작 ‘고향 생각’ 이후, 본격적으로 시조에 손을 댄 것은 1927년 경 그가 일본에 있을 때부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첫 시조집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한 것은 1932년으로 오늘날 노산 이은상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리게 된 작품 ‘가고파’가 쓰여진 것도 그때이다. 그가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할 때 씌어졌고, 그 다음해에 김동진이 평양 숭실중학 재학시절 열아홉 살에 곡을 붙였다. 담임 양주동 선생의 강의로 이은상 시인의 「가고파」를 알게 된 뒤, 현제명씨 독창회에서 자작곡 「가고파」를 듣고서 나는 저보다 더 나은 곡을 작곡하리라 결심하고 만들었다고 한다. 4장을 작곡했다. 40년 후인 1973년에 나머지 6장을 완성하였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당시 식민지 시대에 객지살이를 하던 그에게 세상사가 힘들면 힘들수록 고향 마산은 돌아가고 싶은 안온한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우리 시대 가곡으로 온국민의 향수를 달래주었던 ‘가고파’는 유년기의 애틋함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잘 담아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38년, 조선일보 편집국 고문직을 그만두고 국토 순례길에 오른 노산은 자연과 인생의 교감을 시조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때 지은 숱한 기행문과 기행 시조는 노산 문학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민족적 정서와 애수를 담아 가곡으로 더 유명한 ‘성불사의 밤’과 ‘장안사’도 이때 만들어진 노래다.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는 등 은신과 구금으로 얼룩진 생을 살게되는 노산.

 그러나 광복 이후 대학교수로, 각종 기념 사업회 활동 등으로 분주하지만 화려한 생의 길을 걷게 된다.

 이은상의 호인 노산은 마산시 상남동 그의 생가 뒷산이었던 ‘노비산’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 노산의 생가터에는 대형 극장이 들어섰고 노산의 출생을 기념해 그의 부친이 파서 아들의 이름을 붙였다는 ‘은상샘’은 도로변 남의 집 쇠창살 문 안쪽에 초라한 우물로 숨어있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료

 

 어린 시절 노산은 노비산 동산에 올라와 한 눈에 바라보이는 마산 앞바다를 굽어보며 시인의 눈과 마음을 길렀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이 가고 없는 지금, 그 옛동산은 흔적만 남긴 채 허물어졌고 단지 따사로운 햇살만이 옛동산의 흔적을 어루만질 뿐이다.

 다음은 <3.15의거와 이은상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란 제목으로 김주완이 쓴 글이다.

 [ 4·19 혁명 41주년을 맞은 19일 오후 2시, 의거의 도시 경남 마산에서는 한 시민단체의 이색적인 시위가 열렸다.

 열린사회 희망연대(공동대표 임경란·백남해·남두현) 회원들이 마산시 노산동 옛 북마산파출소 자리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3·15의거 기념비'와 '은상이 샘' 사이에 블록을 쌓아 둘 사이를 가로막아 버린 것이다.

 이들은 블록쌓기를 마친 후 성명서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오늘 이 행사는 단순히 은상이 샘과 3·15의거 기념물 사이의 단절이 아니라 잘못된 역사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랑스런 3·15와 4·19를 모독하는 노산의 은상이 샘은 즉각 철거되어야 합니다."

 '은상이 샘'이 자랑스런 3·15를 모독하다니? 이게 무슨 뜻일까?

 노산은 가곡 '가고파'로 유명한 시조시인 이은상의 호다. 그리고 '은상이 샘'은 노산 이은상이 어릴 적 물을 길어 먹던 우물로 지난 99년 마산시가 시민의 세금을 들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마산시는 '은상이 샘' 표지석에 이렇게 새겨놓았다.

 '민족시인 노산 이은상(1903~1982년) 선생을 기리고 시민의 얼과 정서를 해맑게 하기 위하여 생명의 젖줄 은상이 샘을 이 자리에 옮겨 복원합니다. 원위치 전방 200m 지점. 1999년 6월 마산시.'

 대개 우리는 이 표지석의 표현처럼 이은상을 '민족시인'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기념물이 '3·15의거 기념비'와 사이좋게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은상은 적어도 3·15마산의거나 4·19혁명과는 결코 양립해서는 안될 인물이며, 마산시민과 국민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지은 사람이다.

 3·15마산의거가 일어나기 불과 얼마전이었다. 자유당 정권의 온갖 부정선거 음모가 잇따라 폭로되고, 2월 28일 대구를 시작으로 대전·인천·수원·마산·충주·서울·부산·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위가 속출하고 있던 때였다.

 이런 와중에도 반공청년단(단장 신도환)과 반공예술인단(단장 임화수), 그리고 이정재 등의 깡패조직이 전국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민주인사에 대한 살인·테러·폭행을 일삼고 있었다.

 바로 이 때 '가고파'의 주인공 이은상도 김말봉·박종화 등 '정치문인'들과 함께 '문인유세단'이라는 것을 조직, 전국을 돌며 이승만을 영원한 국부로 만들기 위한 부정선거 대열에 앞장서고 나선 것이었다.

 3월 초 어느날, 대구에서 열린 자유당 유세강연회에 이은상이 등장했다.

 그는 시국을 임진란에 비교하면서 "성웅 이순신 같은 분이라야 민족을 구하리라…그리고 그같은 분은 오직 이대통령이시다"고 말했다.(김팔봉, 부정선거와 예술인의 지성, <사상계> 1960년 5월호)

 그러나 마산시민들은 이 말에 속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승만은 '성웅 이순신'이 아니라, 수많은 독립지사와 민족운동가를 구금·살해하고 죄없는 양민 2,000여명을 보도연맹원으로 몰아 마산 앞바다에 수장시킨 폭군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3월 15일 마산시민들은 이 폭군의 압제와 탄압에 항거하며 피를 흘렸고, 그 피의 대가로 끝내 이승만은 물러났다.

 그러나 혁명은 완수되지 못했다. 이듬해 또다시 '정치군인'들에 의해 5·16쿠데타가 터진 것이다. 4·19혁명 이후 어디엔가 숨어있던 이은상은 또다시 박정희 집권을 위한 공화당 창당선언문을 써들고 화려하게 나타났다.

 그런 덕분인지 그는 박정희가 집권하는 동안 계속 힘있는 자리를 지켰다. 민족문화협회장·문화재위원·총력안보국민협의회 의장·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숙명여대 재단이사장 등등…. 물론 상도 많이 받았다. 5·16민족상·예술원상·대통령상·국민훈장 애족장 등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은 다 누린 셈이었다.

 이은상은 청와대를 무시로 드나들 정도로 박정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충무공 이순신을 이용해 독재의 논리를 공고화하는 데도 앞장섰다.

 그러나 영원할 줄 알았던 박정희도 그로부터 9년 후 그의 심복 김재규에 의해 살해됐다. 그러나 이은상은 건재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곧바로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경하하며…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 무엇보다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여론”이라는 글(새시대·새역사의 지도자상, 정경문화 80년 9월호)을 발표한 후 5공정권의 국정자문위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한 때 구금되기도 했지만 이후 친일기사를 양산해내던 조선일보사 <조광>의 주간으로 재직했고, 만주에서 발행된 친일괴뢰신문 <만선일보> 에 재직했었다는 의혹도 끊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은상은 문학적으로는 '시조부흥에 앞장선 위대한 시인'일지 몰라도 적어도 그의 삶은 역사의 전환기마다 권력에 밀착, 민중과 반대편에 서 온 독재부역자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산시는 그가 소싯적 물을 길어먹던 우물까지 '성역화'하고, 그가 태어난 마을을 '노산동'이라 이름지어 부르게 하는가 하면, 이 일대 도로를 '노산로'로 명명하는 등 이은상을 마산의 정신적 지주로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마산시는 또한 시민의 날마저 3·15의거일 대신 외세에 항구를 내준 5월 1일 개항일로 정해 '가고파 대축제'라는 이름으로 매년 성대한 축제를 벌여오고 있으며, '노산 추모 가곡의 밤'과 '가고파가곡제' 등 각종 이벤트를 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사회 희망연대가 4·19혁명 41주년을 맞아 개최한 '블록쌓기' 이색행사는 무심한 마산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주고 있다.

 마산은 '3·15와 4·19의 도시'인가, 아니면 '독재부역자 이은상의 도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