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황(1501∼1570, 경북 안동)
퇴계(退溪) 이황은 연산군 7년인 1501년에 경북 안동군 도산면 온계리에서 태어났으며,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12세 때 숙부 이우에게서 '논어'를 배웠다.
1534년, 이황은 34살의 나이에 비로소 문과에 급제, 암행어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 예조판서 등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쳤지만, 마음은 학문에서 떠나지 않았다. 퇴계 이황은 벼슬을 거듭 물리고, 고향에 머물기를 원했다. 낙동강이 흐르는 고향 안동에서 무려 40여 차례나 사직서를 써서 한양의 임금에게 보내야 했다.
도산서원은 이황이 직접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웠던 도산서당에서 출발했다. 이황은 대제학에서 물러난 1557년(명종12년) 고향인 안동군 도산면으로 돌아와 자신이 거처할 도산서당과 제자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를 지었다. 이황은 1561년 도산서당이 완성되자 이곳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4년만인 1574년(선조7년)제자와 유림들이 그의 학덕을 숭모하여 서원을 세웠으며, 선조가 현판을 내려줌으로서 왕실과 유림의 존중을 받는 곳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후 도산서원은 많은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며 이황 등을 받드는 곳으로 영남 유림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도산서원의 위상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존속됐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황은 주자(朱子)의 '이기 이원론(理氣 二元論)' 을 이어받아 크게 발전시킨 유학자로 유성룡, 김성일, 정구 등으로 이어진 영남학파를 형성하여, 이이(李珥)의 기호학파와 함께 우리나라 유학의 2대 주류가 되었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은 일본에까지 건너가 일본 성리학 발달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일본 유학의 근본이 되었다. 퇴계 이황은 선조 3년인 1570년 세상을 떠났으며, 저서에는 <퇴계집>, <성학십도>, <주자서절요>, <자성록> 등이 있고 시조 작품으로 <도산십이곡>이 있다.
퇴계는 자리에 앉을 때 벽에 기대는 일이 없이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았고, 날마다 '소학'의 글대로 살았다. 짚신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으며, 세숫대야로는 도기를 썼고, 앉을 때는 부들자리 위에 앉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수저 부딪는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반찬은 끼니마다 세 가지를 넘지 않았고, 다만 가지와 무와 미역만으로 찬을 삼을 때도 있었다. 손님을 모실 때가 아니면 특별한 반찬을 놓지 않았고, 비록 어린이나 아랫사람에게 식사를 내릴 때도 반찬을 차별하지 않았다. 좋은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종가로 보내 제상에 올리게 했다.
언제나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갓을 쓰고 서재로 나가 정좌하였고, 제자들과 마주앉아 이야기할 때는 마치 귀한 손님을 대하듯 했다. 그 가르침은 자상하고 다정하였으나 제자들은 감히 스승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나라에 세금을 낼 때는 언제나 평민들보다 먼저 냈으며, 진실로 예와 의가 아니면 남으로부터 조그마한 물건도 받지 않았으며, 예로써 받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이웃이나 친척이나 또는 배우러 오는 제자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한 점도 집에 쌓아두지 않았다. 제자들을 '너'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제자가 자리에 앉으면 반드시 그 부모의 안부부터 물었다. 아무리 춥고 어두운 밤이라도 방안에서 요강을 쓰지 않고 반드시 밖에 나가서 소변을 보았다.
이황은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무척 좋아하여 신변에서 책을 멀리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서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아무리 피로해도 책을 누워서 읽거나 혹은 흐트러진 자세로 읽은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처럼 근엄한 독서 자세는 어려서부터 70세에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퇴계는 책을 남달리 정독(精讀)하는 편이어서 무슨 책이나 읽기 시작하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다시 읽어, 그 책 속에 담겨 있는 참된 뜻을 완전히 터득하기 전에는 그 책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공자(孔子)는 주역(周易)을 삼천 번이나 읽느라고 가죽으로 묶은 끈이 세 번씩이나 끊어졌다는 고사(故事)가 있거니와 이황의 독서법도 바로 그와 같은 것이었다.
일찍이 이황이 서울에서 유학하는 중에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처음으로 읽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방문을 굳게 닫고 방안에 조용히 들어앉아 그 책을 읽기 시작하자, 하루에 세 번씩 끼니 때 이외에는 일체 외출을 안하고 그 책 한질만을 수 없이 되풀이하여 읽었다. 때마침 그해 여름은 몹시 무더워서 보통 사람들은 독서는커녕 서늘한 나무 그늘을 찾아다니기에 바쁠 지경이었건만 이황은 그와 같은 폭서(暴署)도 아랑곳없이 방문을 굳게 닫은 채 줄곧 독서만 했던 것이다.
어느 친구가 이황의 건강을 걱정한 나머지 찾아 와서 "이 사람아! 독서가 아무리 중요하기로 건강도 생각해야 할 게 아닌가. 요새같은 무더위에 방문을 닫고 앉아 독서만 전념하다가는 반드시 건강을 해치게 될걸세. 독서는 생량(生凉) 후에 하기로 하고, 이 여름에는 산수 좋은 곳으로 피서라도 다녀오도록 하세!" 하고 충고한 말이 있었다. 그러자 이황은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가슴속에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 듯한 깨달음이 느껴져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 이 책에는 무한한 진리가 담겨져 있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정신이 상쾌해 지며 마음에 기쁨이 솟아오를 뿐이네!"
또 독서에 대해 이렇게도 말했다. "글을 읽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반드시 성현들의 말씀과 행동을 본받아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서둘러 읽어서 그냥 넘겨 버리면 그 책을 읽기는 했어도 별로 소득은 없게 되는 것이다."
율곡 이이와의 만남도 되새겨 볼 만하다. 당시 젊은 학자로서 명성을 세상이 널리 떨치고 있던 율곡이 이황의 학문과 덕망이 높음을 우러러 보고 처가(성주)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길에 천리길을 멀다 않고 예안의 계상서당(溪上書堂)에 퇴계 이황을 찾아 내려왔다. 율곡의 나이 23세요, 이황의 나이가 58세 때의 일이었다.
율곡은 이황에게 초면 인사를 올리고 나서 그의 학덕(學德)을 찬탄하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어 바쳤다.
溪分洙泗派 시냇물은 수사에서 한갈래 나뉘고
峯秀武夷山 드높은 봉우리는 무이처럼 빼어났소
恬計經千卷 천권 경서속에 보람있게 살아가니
行藏屋數閒 고요한 뒷방이 한가하기만 하도다
襟懷開霽月 회포를 푸니 맑은 하늘에 달이 떠오르는 듯
談笑止狂簡 웃으며 나누는 얘기에 거친 물결 잠자오
小子求聞道 소자가 뵈온 것은 도를 듣고자 함이니
非偸半日閑 반나절 헛되이 보냈다 생각지 마옵소서.
이상과 같은 율곡의 헌시(獻時)에 대해 이황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화답하였다.
病我로關不見春 내 병들어 문닫고 봄빛을 못보더니
公來披豁醒心神 그대 만나 얘기를 나누니 심신이 상쾌하다
已知名下無虛士 선비의 높은 이름 헛되지 않음을 알았으니
堪愧年前闕敬身 지난 날 사귀지 못했음이 적이 부끄럽소
嘉穀莫容梯熟美 깨끗한 곡식에 가라지 자라지 말 게 하오
纖塵猶害鏡磨新 새로 닦는 거울에는 티끌도 해가 되오
過情時語須刪去 부질없는 이야기는 모두 제쳐 놓고
努力工夫各日親 힘써 공부하여 우리 서로 친해보세.
자세히 읽어보면, 주고받는 시에 사제지간의 무한한 존경과 애정이 넘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율곡은 예를 갖추어 사제의 의를 맺은 뒤에 계상서당에서 학문을 닦다가 예안을 떠났다.
율곡은 떠남에 즈음하여 이황에게 이런 부탁을 올렸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곳을 떠나기는 하오나, 소자의 마음은 항상 선생님 그늘에 있사옵니다. 선생님께서는 소자가 한평생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을 잠언(箴言)을 한 말씀만 내려 주시옵소서."
선생은 제자들에게조차 항상 겸허한 어른인지라, 율곡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대가 워낙 총명한 사람이니 내가 그대에게 무슨 잠언을 들려줄 수 있으리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간절히 부탁하오니 잠언을 꼭 내려 주시옵소서."
"그대가 그토록 소망이라면 내가 꼭 부탁하고 싶은 말을 한 마디만 하겠네."
이황은 그렇게 말하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잠언을 율곡에게 주었다.
持心貴在不欺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立朝當戒喜事 벼슬자리에 올라서는 일을 좋아하기를 경계하라.
이황은 소신(所信)대로 정치(政治)를 펴지 못할 바에는 학문을 정성스럽게 닦아서 세인들에게 정도(正道)를 널리 알려주려고 했던 반면에, 율곡은 자신의 포부를 펴는 일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 점이 이황과 율곡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기도 했는데, 이황은 젊은 율곡에게 부질없이 일을 일으키려고 하지 말라는 훈계를 해두었던 것이다.
율곡은 먼 훗날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곡퇴계선생(哭退溪先生)의 만사(輓飼)를 지었으며 흰 띠를 메고 심상(心喪)을 하였다.
그의 제문[만사]은 아래와 같다.
"아아 슬프도다! 나라의 원로를 잃으니 부모가 돌아가신 것 같고, 용과 범이 망했으며 경성(景星)이 빛을 거두었도다. 소자, 일찍이 배움을 잃고서 할 일없이 방황할 때, 마치 저 사나운 말이 가로뛰며 가시밭 길이 무성할 때 나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아 주신 것은 실로 선생께서 열어 주심이었습니다."
율곡은 경연(經筵)에서 퇴계의 문묘종사를 극력 주장하여 실현시켰고 시호를 내릴 때도 적극 힘썼다.
권철(權轍)과의 만남에서도 이황의 인간됨을 짐작해볼 수 있다. 권철은 이황과 동시대의 대학자로서, 명종(明宗) 때에 영의정(領議政) 벼슬까지 지낸 명현(名賢)이다. 권철은 영의정으로 재직시에 평소에 추앙해 오던 이황을 만나보고자 몸소 찾아간 일이 있었다. 두 학자는 기쁜 마음으로 학문을 토론하였다.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그 다음 식사 때가 큰 문제였다. 끼니 때가 되자 저녁상이 나왔는데 밥은 보리밥에다가 반찬이라고는 콩나물국과 가지잎 무친 것과 산채 뿐으로 고기부치라고는 북어 무친 것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이황은 평소에도 제자들과 똑같이 그런 식사를 해왔는데, 상대방 손님이 영의점 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식사를 내왔던 것이다. 평소에 진수성찬만 먹어 오던 영의정 권철에게는 보리밥과 소찬이 입에 맞을 리가 없었다. 권철은 도저히 그 밥을 먹어낼 수가 없었는지 몇 숟갈 뜨는척 하다가 그대로 상을 물려 버렸다.
그러나 이황은 모르는척 하고, 다음날 아침에도 그와 똑같은 음식을 내 놓았다. 권철은 이날 아침에도 그 밥을 먹어낼 수가 없어서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몇 숟갈 떠먹고 나서 상을 그냥 물려 버렸다.
사태가 그렇게 되고 보니 권철은 더 묵어가고 싶어도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아 더 묵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예정을 앞당겨 다음 날은 부랴부랴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권철은 작별에 앞서 이황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찾아 뵙고 떠나게 되니 매우 반갑소이다. 우리가 만났던 것을 깊이 기념하고자 하니 선생은 좋은 말씀을 한마디만 남겨 주시지요."
"촌부(村夫)가 대감전에 무슨 말씀을 여쭐 것이 있겠나이까. 대감께서 모처럼 말씀하시니 제가 느낀 점을 한 말씀만 솔직히 여쭙겠나이다."
이황은 그렇게 전제하고 옷깃을 바로 잡으려 다시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대감께서 원로에 누지(陋地)를 찾아 오셨는데, 제가 융숭한 식사대접을 못해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감전에 올린 식사는 일반 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기면 더할 나위 없는 성찬이었고, 백성들이 먹는 음식은 깡보리밥에 된장찌개가 고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감께서는 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제대로 잡수시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저는 이 나라의 장래가 은근히 걱정스럽습니다. 무릇 정치의 요체(要諦)는 여민동락(與民同樂)에 있사온데 관과 민의 생활이 그처럼 동떨어져 있으면 어느 백성이 관의 행정에 성실히 복종하겠나이까?"
그 말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충언이었다. 이황이 아니고서는 영의정에게 감히 말할 수 없는 직간(直諫)이었던 것이다. 권철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수그렸다.
"참으로 선생이 아니고서는 누구에게도 들어볼 수 없는 좋은 말씀입니다. 나는 이번 행차에서 깨달은 바가 많아 돌아가면 선생의 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에 옮기도록 노력하겠나이다."
영의정 권철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이황의 충고를 거듭 고마워하였다. 그리고 권철은 돌아오자 만조백관들은 불러놓고 이황의 말을 전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그날부터 생활을 일신하여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한다
한번은 공자의 말씀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친구라 삼지 말라" 하였으니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는 일체 사귀지 않아야 하겠습니까?"하고 덕홍이 물으니, 이황은 "예사 사람의 정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기를 좋아하고 나은 사람과는 벗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공자는 이러한 사람을 위해서 한 말이요, 일체 벗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 말은 아니다. 만일 한결 같이 착한 사람만 가려서 벗한다면 이 또한 편벽(偏僻)된 일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귀다가 그 속에 휩쓸리면 어찌 되겠습니까"하니, "착하면 따르고 악하면 고칠 것이니 착함과 악함이 모두 다 나의 스승이며 만일 악에 휩쓸린다면 학문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하였다.
이황이 70세가 되던 해, 종가의 제사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이황은 병이 깊어지자 아들을 불러 장례를 검소히 치를 것과, 장례에 대한 국가의 배려와 의전을 사양하라고 엄히 당부하였다. 남에게서 빌려온 책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가족에게 명하여 염습에 필요한 물건을 미리 준비케 하였다.
이황이 세상을 떠나던 날 저녁에 눈이 내렸다. 제자들을 시켜 당신이 아끼던 매화나무에 물을 주게 하고 임종의 자리를 정돈시킨 다음 몸을 일으켜 달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여 한평생을 지켜온 정좌의 자세로 앉아서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였고,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시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언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 새긴 묘비가 세워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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