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1892 - ?, 평북 정주 )
이 글은 임헌영의 글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평안도 정주에서 태어난 이광수는 10세 때, 부모가 콜레라로 8일 사이에 차례로 사망하여 고아가 되었다. 그 이듬해, 동학의 이념에 감명을 받고 입도(入道)하여 수학하였는데 이 시절의 종교생활과 경험이 후일 문학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10년 일본 메이지(明治)학원을 졸업하고, 오산(五山)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1915년 김성수의 후원으로 다시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 입학하였다.
장편소설 『무정』(1917)으로 전조선 여성의 연인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명성을 얻은 이 희대의 천재는 일본 유학중 19세 때 결혼한 아내 백혜순과 이혼한 후, 도쿄여의전을 졸업한 허영숙(창씨명 香山英子)과 베이징으로 석 달 가량 사랑의 도피여행(1918)을 떠났다. 어려서 천애고아로 자라온 춘원은 애정결핍증 소년이 지닌 민감성으로,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썼는데, 베이징에서 뜻밖에도 단재 신채호를 만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자신이 문제아로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문제아’의 내용은 “젊은 여자와 함께 산다는 문제, M(매일)신문에 글을 쓴다는 문제, 일본 공사관에 다닌다는 문제”였다. 일본 공사관에 다닌다는 말은 춘원이 여행을 떠날 때 총독의 측근인 일인 언론계 거물급인 아베(阿部充家)의 소개장을 소지하고 와서 공사관의 도움을 받은 것을 뜻한다.
을씨년스러운 베이징에서 춘원은 온갖 악조건 속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민족적 분위기를 안은 채 귀국, 도일하여 이듬해에 「2·8 독립선언서」를 쓴다. 그리고는 이를 외국으로 보내는 사명을 띠고 상하이에 도착한 것이 1919년 2월 5일이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의 속사정은 춘원 같은 천재의 눈으로 볼 때 근대화된 문명국가인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그의 조바심은 연인 허영숙에게 보낸 편지에 솔직히 나타난다.
“나는 상하이에 온 후로 작년(1919) 9월부터 대단히 자포자기한 생활을 했습니다. 날마다 술을 먹고 기생집에도 다녔습니다.”
이 무렵 임시정부의 홍보로 《독립신문》을 펴내는 일을 맡았던 춘원은 도산 안창호와 긴밀한 사제적·동지적·육친적 관계를 맺게 되어 일생 동안 그의 이념노선과 충고를 따랐다. 그런데 춘원은 《독립신문》 일을 그만두고 귀국할 때만은 도산의 충고를 거슬렀다. 허영숙이 상하이로 춘원을 찾아간 것은 1921년 2월이었는데, 이 때 그는 아예 상하이에 남는 길, 도산의 권고대로 미국으로 가는 방안 등을 버린 채 그 해 3월 귀국 길에 올랐다.
춘원은 여러 글에서 귀국하면 징역을 살 것처럼 썼으나, 실인즉 간단한 조사만 받고 풀려났을 뿐만 아니라 5월에 허영숙과 정식 결혼, 9월에 사이토(齊藤實) 총독과 면담 등등 화려하고 세속적인 출세가도의 길로 들어섰다.
아베가 총독에게 건의한 여러 글들로 미뤄볼 때 민족개량주의론을 선양시켜 독립운동의 이념을 누그러뜨리면서 문화운동을 유도하려 했던 점만은 분명하며, 그 주역으로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이 있다. 이광수는 갈수록 ‘친일’로 기울어졌다.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냈던 이광수의 또다른 이름은 향산광랑(香山光郞)이다. 이광수는 당대 지식인 중 가장 이른 1938년 일본식 이름을 썼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실시하기 2년 전의 일이다. 그는 또 논설 ‘의무교육과 우리의 각오’, 시 ‘조선의 학도여’, 수필 ‘성전 3주년’, 방문기 ‘자원병훈련소’ 등 여러 장르를 통해 일제를 찬양한다. 1922년 그는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해 물의를 일으킨다. 임헌영씨는 “‘나라를 뺏긴 것은 우리 잘못이다’라는 춘원의 민족개조론은 당시의 당면한 사회적 갈등에 철저히 대응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설교로 힘을 무산시키는 작용을 했다”고 설명한다.
민족개량과 문화주의로 일관하던 춘원은 1937년 일제의 동우회(수양동우회가 1929년부터 동우회로 명칭이 바뀜)사건 구속에 걸려 옥고를 겪지만 이내 병보석으로 풀려나는 한편, 정신적인 지주 도산의 타계(1938)에 직면한다. 이어 그는 1939년 중국의 일본군 위문을 위한 모임(북지황군위문작가단) 결성식의 사회를 맡게 되고, 이를 계기로 친일 행위가 더 확고해진다.
춘원이 반민특위에 체포당해 투옥된 것은 1949년 2월 7일 효자동 자택에서였다. 그러나 아들의 혈서가 담긴 탄원서와 건강의 악화로 그는 3월 4일 출옥하게 되고, 그의 작품은 조금의 훼손이나 비판 없이 그대로 분단 한국에서 전해지게 되었다.
춘원은 1950년 7월 서울에서 북한 당국에 의하여 연행된 뒤 1950년 자강도 강계군 만포면 고개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189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 가까이에서 58세로 최후를 마쳤다.
아래는 유종호의 글을 줄인 것이다.
[ 역사적인 평가를 떠나 그의 삶이 가히 파란 많은 삶이었고 고단한 삶이었음은 세사에 널리 알려진 공인으로서의 이력말고도 그의 되풀이되는 병력에 잘 나타나있다. 그가 늘 내세우는 겨레사랑의 실상이 어떤 것이던 간에 그의 자녀들이 예외 없이 미국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도 세속적인 뜻으로는 잘되고 못됨과 관계없이 그의 삶의 연속성이라는 점에선 역설적인 빛을 던져 준다. 그의 변심과 전신에 대해서 위선이니 위약이니 하는 설명이 있으나 인간 행동의 계기가 되는 여러 힘을 단순화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의 생년은 1892년으로 되어 있다. 평북 정주에서 전주 이씨 문중의 장손으로 출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당자는 늘 양반 집안이었음을 은연중 자랑했지만 그 당시 평안도 쪽에 흔히 일컫는 의미로서의 '양반'이 어디 있었느냐고 그의 인간과 문학의 신랄한 비판자인 김 동인은 말하고 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마흔 둘, 어머니가 스물 셋으로서 20년의 차이가 나는 부모를 가졌다는 것은 그의 출생상의 특징이라 할 만하다.
그의 형들이 모두 갓난이 시절에 죽었음으로 그의 대한 부모의 애고가 각별했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다. 초시를 했으나 대소과에 실패하여 술먹기나 일삼고 집안을 돌보지 않아 살림이 궁색했다고 자기 아버지를 적어 놓고 있다. 또 몸이 약해서 늘 부모의 속을 썩인 것으로 되어있다. 한편 이사를 자주 다닌 것을 어릴 적의 기억으로 적어 놓고 있는데 그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한다.
다섯 살 때 한글과 천자 반절을 깨쳤고 또 외할머니에게 『덜걱전』 등의 얘기책을 읽어주고 과일 같은 것을 받고 했다는데 이것은 그의 최초의 문학적 체험이 되어 있다. 여덟 살에 동네 글방에서 한문 공부를 해서 『대학』 『중용』 『논어』 『맹자』까지 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여 글재주를 칭송받고 신동이라 불리워졌다.
열 한 살 때 전국을 휩쓴 콜레라로 불과 며칠 사이에 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세 남매가 고아가 되었다. 부모의 죽음을 전후한 이광수의 추억담은 그의 자서전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 되어 있다. 여섯 살 난 누이와 함께 기생 소실을 데리고 사는 할아버지한테로 갔으나 세 살짜리 누이는 남의 집 민며느리감으로 주었는데 한 달쯤 후 이질로 죽었다. 이광수는 늘 사고무친한 고아였음을 자기 연민과 그럼에도 이만큼 되었다는 자랑스러움을 가지고 회고하고 있는데 그의 삶의 가장 획기적인 사건의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부모도 다 돌아가셨으니 고향을 떠나 버리자, 자식들이 떠나가면 누가 있어 부모제사 드리랴 하는 생각에서 사당에 불을 질러 홍패도 위패도 모두 불살라 버렸다'고 그는 회고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그에게 있는 유교적 과거에 대한 우상파괴적인 요소의 최초의 발동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외가와 재당숙집을 전전하던 그는 열 두 살 때 동학에 입교하여 박찬명 대령집에서 유하며 문서 베끼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 무렵 노일전쟁으로 아라사 병정이 정주에 들이 닥쳐 약탈과 부녀 폭행하는 장면을 보고 처음으로 강렬한 민족의식을 체험했다. 일본 헌병대의 동학 탄압으로 현상금을 붙은 체포령이 내려 도망친 일이 13세 때로서 진남포에서 배편으로 인천으로 , 거기서 서울로 갔다. 이 난생 처음의 서울구경의 여비는 부모의 유산인 세목 두 필, 광목 한 필, 명주 세 필을 팔아 충당했다 한다. 반년만에 고향에 돌아갔던 그는 열 네 살 되던 해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일진회에서 세운 학교에서 일본말을 가르쳤다 한다. 그 당시 나온 《황성신문》, 《제국신문》을 통하여 국내외 정세에 대한 관심을 두터이 했고 천도교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그의 도일의 연대에는 약간의 차이가 발견되나 그의 연보를 가장 상세하게 다룬 노 양환 씨는 그것을 1905년 이광수가 열 네 살 나던 해의 8월로 잡고 있다. 을사보호조약이 조인되던 해이다. 이러한 그의 어린 시절에서 보게 되는 것은 그의 분명한 조숙성이다. 도대체 열 세 살 때 현상 체포령의 수배인물이 된다는 것 자체가 그렇듯이 그의 조숙성은 그의 가정 환경이나 국가 정세가 강요한 것이지만 크게 별난 점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그가 여러 어려운 고비를 비상한 조숙성으로 극복해 간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광수는 비범한 현실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뒷날의 변신도 그 점 그의 삶에서 일관성을 얻고 있는 패턴의 하나일 것이다.
이듬해 봄 대성(大城) 중학에 입학한 그는 일본의 신문학, 번역문학을 접하여 문학 작품을 탐독하는 한편 습작도 시도하게 된다. 이해 처음으로 연상의 홍 명희를 알게 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미국에서 귀국하는 도중 일본에 들렸던 안 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은 것, 예수교의 성경을 처음으로 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한편 학비의 곤란으로 몇 번이나 귀국하는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최남선, 정인보, 문일평 등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며 톨스토이에 심취하게 되 것도 이 무렵이다. 이 무렵 《소년(少年)》지 등의 잡지나 학교교우지 등에 우리말, 일본말로 글을 발표해서 유학생 사이에서 글재주를 인정받았다.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1910년 봄 중학을 졸업한 뒤 조부가 위독하다고 전보를 받고 귀국하였다가 이승훈의 청을 받고 오산(五山)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조부의 사망, 첫 결혼, 한일합방으로 극히 다사다난한 한해였다. 스물 두 살 되던 1913년에 『검둥의 설움』(『톰아저씨의 오두막』 초역본)이 간행되었는데 그의 최초의 단행본 출간이 된다. 세계 여행을 뜻하고 한만 국경을 넘어 상해를 경유 아라사에까지 입국했고 미국행도 꿈꾸었으나 세계일차대전의 발발로 단념하고 귀국, 다시 오산에서 교편을 잡다가 15년 김 성수의 후원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고 《매일신보(每日新報)》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26세된 1917년 신년호부터 『무정(無情)』을 연재하여 근대소설의 효시란 칭호를 받게 된다. 일부의 반발과 함께 청년 사이에서 비상한 인망을 얻었다. 「소년의 비애」 「윤광호」등의 단편을 발표하게 된 것도 이 때이고 유학생회 석상에서 뒷날의 아내 허영숙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26회의 연재로 『무정』을 끝내는 한편 지방여행을 다녔고, 11월엔 두 번째 장편 『개척자(開拓者)』를 다시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18년엔 「신생활론」이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허영숙과 북경(北京)으로 사랑의 도망을 간다. 이 때 일차대전의 휴전 소식과 파리 평화회의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가 현상윤, 최 린 등을 움직여 3.1운동의 길을 열었다고 되어 있다. 우리 쪽 문서보다 일본측 문헌에 3.1운동의 초기단계에 있어서의 이광수의 역할이 큰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연말에 일본으로 건너가 백관수(白寬洙), 서춘(徐椿), 김도연(金度演)등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했고 19년 2월에 「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를 기초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배부하는 책임을 맡고 상해로 건너갔다.
선언서를 영역하여 그 복사를 파리의 윌슨 등에게 보냈고 또 영자신문에 보도하도록 했다. 그는 임시정부 의정원(議議政) 조직에도 가담했고 미국에서 건너온 안 도산을 만나 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명하기도 했다. 임시정부 안의 사료편찬위원회의 주임 일을 맡고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 되었다. 일년 남짓한 상해 시절에 그는 흥사단에 가입하고 망명자들의 독립운동에 진력하였으나 한편 경제적 곤란도 심했던 것 같다. 상해로 찾아온 허영숙을 먼저 귀국시킨 후 일년 남짓한 상해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게 된다.
그는 한때 경찰의 조사를 받다가 석방되어 허영숙과 정식으로 결혼하고 한동안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항간에서는 변절자란 비난이 자자했고 허영숙의 상해행(上海行)이 일본 경찰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유야 어쨌든 상해로부터의 귀국이 그의 뒷날의 훼절의 단초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그는 금강산 구경을 다녀왔고 「민족개조론」이 《개벽(開闢)》지에 실리자 개벽사가 습격을 받는 등 해서 그는 발표기관을 잃고 사회의 냉대 속에서 지내야 했다.
32세 되던 해 동아일보사 객원이 되어 『선도자』를 연재했고 많은 논설도 쓰게 된다. 그의 동아일보와의 관계는 10년 후 조선일보사 부사장이 될 때까지 계속되며 그 동안 『허생전』, 『재생』, 『춘향전』, 『마의태자』, 『단종애사』, 『혁명가의 아내』, 『이순신』, 『흙』 등을 동아에 연재하여 그의 문명(文名)을 굳히고 많은 애독자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과로와 병고의 삵의 연속이었다. 척추카리에스와 신장 결핵으로 두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일보로 옮아감에 따라 『유정』, 『그 여자의 일생』, 『이차돈의 사』, 『애욕의 피안』등을 동지에 연재하고 있었다. 46세 되던 1937년에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사건으로 종로서에 이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6개월만에 병보석이 되어 나왔다. 경의전병원에 8개월간이나 입원했다가 퇴원했다. 동우회 사건은 일심에서 7년 구형에 무죄선고, 이심에서 5년 징역, 고등법원 상고심에서 전원 무죄를 받기까지 4년5개월을 끌었다. 사건이 끝난 것은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하기 직전이었다.
그 사이 그는 이른바 '북지황군위문'에 협력했고 또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됨으로써 친일행위의 첫걸음을 디디게 된다.51세 되던 해엔 한국인 학생의 학병 권유차 동경을 다녀왔다. 그는 양주의 사능(思陵)에서 8.15를 맞이했다
8.15 이후의 행적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해방의 흥분이 서울을 휘몰아칠 때 그는 감히 서울 시내에 나오지 못했다. 흥분이 가라앉은 뒤 서울에 나타났을 때 그는 「향산광랑(香山光郞) 서울에 나타나다」라는 신문의 뉴스감이 되었다.
8.15 이후 「꿈」이라는 신작을 발표해서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고, 「나」, 「스무살 고개」 등 자서전적 소설을 썼는데 그것은 훼절에 대한 참회나 하다 못해 변명이라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반발심만을 일으켰을 뿐이다. 57세 되던 해 반민법(反民法)에 걸려 한 달쯤 수감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되었고, 그 후 불기소로 자유로워졌다. 그 사이 아들의 혈서 탄원서가 다시 세상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었다. 이즈음 그는 친미반소(親美反蘇)적인 시를 써서 발표해서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친권력적(親權力的)인 기회주의자라는 공격 재료를 주었다. 1959년 8월 16일에 그를 평양 감옥에서 보았다는 정치인 계광순(桂珖淳)의 발언이 그에 관한 최근의 정보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형편없는 잡곡밥을 제공하는 가운데 이광수만은 쌀밥을 주었다고 한다.
근대 인물 가운데서 이광수처럼 칭찬과 욕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점은 뒷날의 그의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많지 못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겨레의 지도자로 자처한 그가 지도자의 영광만을 구할 수는 없다. 8.15 이후의 행적에서도 우리가 진하게 발견하게 되는 것이 합리화된 현실추수주의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언제나 화려한 역할을 맡고 싶어했음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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