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이호철 (1932-, 함남 원산)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8:13

이호철 (1932-, 함남 원산)


아래는 김용만의 글이다.

[ 1932년 3월 15일,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강원도 원산시 현동에서 아버지 이찬용과 어머니 박정화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난 이호철 선생은 중농의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4살 때부터 조부에게서 천자문을 배우고, 1939년 갈마초등학교에 입학, 원산공립중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은 그는 그 어수선한 시기에 독서에 몰두한다.

세계문학전집을 섭력하고 프랑스 소설과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매료되었으며 특히 안톤 체홉을 좋아했다. 원산고등학교 졸업 무렵인 1950년에 6.25가 터지자 그해 7월 7일 동원령에 끌려 인민군에 입대한 그는 울진까지 내려왔지만 유엔군과 국군의 전세에 밀려 후퇴하던 중 양양 남대천에서 포로가 된다. 국군 헌병의 감시를 받으며 북상하다가 흡곡에서 매형을 만나 포로 대열에서 풀렸났는데 이때의 경험이 <나상> 등의 소재가 된다.


12월 초에 중공군이 밀려오자 월남하여 미군 LST로 피난민 대열에 끼어 부산 제1부두에 닿는다. 그때 시내 중심가의 상점들을 보며 참다운 자유를 느끼고 ‘올 데로 왔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그 심정이 <만조>와 <빈 골짜기>에 그려진다. 제3부두에서 부두 노동을 하게 된 그는 야간작업이 너무 힘들어 초장동의 제면소에 도제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듬해 7월 동래 온천장에 있는 미군 정보기관인 JACK 부대에 경비원으로 들어갔는데 그때부터 틈틈이 습작할 수 있게 된다. 단편 <오돌할멈>을 써서 해군중령으로 정훈국에서 근무하는 횡보 염상섭 선생에게 보냈다가 칭찬을 듣고 용기백배한 그는 남부민동에 있는 서울고교로 황순원 선생을 찾아가 몇 차례 지도를 받기도 한다.


1953년 초 서울로 올라간 그는 계태순 씨의 알선으로 효창동에 있는 KRD라는 미군 기관에 경비원으로 들어간다. 7월에는 휴전이 성립되자 연일 휴전반대 데모가 회오리친다. 그가 황순원 선생의 추천으로 <문학예술>지 7월호에 <탈향>을 발표한 것은 1955년이고, 이듬해 <문학예술>1월호에 <나상>이 두 번째로 추천되어 작가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등단 후 차츰 명동의 문단 분위기에 빠져든 그는 1958년 학원사 간행의 아동문고 <이순신>을 썼으며, 일본어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중역하여 창원사에서 간행한다. 1960년에는 청운동 하숙집에서 4.19 학생의거를 맞고, 그해 9월 공보실 보도관 최규정의 권고로 기자자격증을 얻어 극적으로 판문점 회담에 참관, 북한 기자들과 담화한 경험을 살려 이듬해 사상계 3월호에 단편 <판문점>을 발표한다.

<판문점>으로 제7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고 이어령, 신동문, 한남철, 유종호 등과 자주 어울린 그는 이듬해 단편 <닳아지는 살들>로 제7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다.


6.3계엄이 선포된 1964년에는 한남철의 소개로 미국에서 갓 돌아온 백낙청을 소개 받았으며, ‘산문시대’ 동인인 김승옥, 염무웅, 김치수 등과 자주 어울리면서 장편 <소시민>을 ‘세대’지에 연재한다. 그 무렵 <창작과 비평> 창간에도 동참, 첫호에 단편 <어느 이발소에서>를 발표한 그는 1966년에는 장편 <서울은 만원이다>를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박용구에 의해 일본어로 번역된 <닳아지는 살들>이 외국어로는 처음으로 일본 월간지 <자유>에 실린다.

그해 11월 26일에는 조민자와 결혼했으며, 이태 뒤에는 불광동 독박골에 처음으로 건평 9평 짜리 온전한 내집을 마련한다.


1970년에는 서라벌예대에 출강하여 당시 학생이던 김민숙, 이시영, 송기원, 이진행, 유덕희, 운정모 등과 어울렸고, 이듬해 4월 9일에는 재야 운동단체의 효시 격인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운영위원으로 동참 종로2가에 있는 YMCA에서 첫 모임을 갖고 김재준 목사, 이병린 변호사, 천관우씨를 공동대표로 모시고 대통령 선거를 감시했으며, 가을에는 기구를 확대개편하여 미국에서 돌아온 함석헌 옹까지 대표위원으로 영입하고 장준하, 이영희, 원주의, 지학순 주교, 장일순씨를 운영위원으로 보강한다.


1972년에는 전격적으로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9월에 북한적십자 대표가 판문점을 거쳐 서울로 돌아올 때는 서대문구치소에서 그들을 맞이하고 동아일보에 북한적십자 대표에게 보내는 글을 쓴다. 


1973년에는 육군본부가 주선했던 베트남 파견 <국군방문작가단> 일원으로 김광림, 고은, 최인훈, 최인호 등과 함께 베트남 방문하고, 10월에 전격적으로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11월 5일 YMCA 식당에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명의의 유신체제반대 시국성명을 내고, 그날 김재준, 함석헌, 이병린, 천관우, 지학순, 김승경, 법정, 김지하 등과 종로서에 연행되었다가 당일 훈방된다.


1974년 1월 7일, ‘60인 문인 시국성명’의 진행을 맡았다가 명동성당 앞 코스모폴리탄 다방에서 안수길, 박연희, 백낙청, 천승세, 김지하, 송영, 황석영 등과 중부서로 연행되었다가 당일 풀려나 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이튿날 8일 아침에 전격적으로 긴급조치1호가 발동되어 그날부터 자택구금에 들어간다.

1월 14일에는 서빙고 육군보안사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뒤 25일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혐의로 김우종, 임헌영, 장백일, 정을병과 함께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고, 10월31일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기까지 독거수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때의 경험이 단편 <문>과 그후에 장편으로 늘린 <문>으로 형상화된다. 이듬해에는 문협의 쇄신을 내걸고 이사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조연현에게 패한다.


1979년에는 원주에서 ‘김지하 석방 기도회’에 참가했다가 10일 구류처분을 받고 서대문구치소에서 보냈으며, 11월 24일에는 YMCA 위장결혼식에 참가했다가 구류처분을 받고 마포서 유치장에 수감되기도 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남정현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건 이른 새벽이었다.


1980년는 그의 인생에 잊을 수 없는 해이다. 청진동 남산집에서 열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총회에 참석한 혐의로 5월 17일 자정에 연행되어 남산 지하실에서 2달 간 조사를 받고 7월 13일 서울구치소로 송치되는데, 소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계엄법 위반으로 육군본부에서 군사재판을 받고 3년 6월의 징역을 받았지만 관할관 확인 절차를 거쳐 그날로 서남동, 한완상, 심재철 등과 석방된다.

그후 이돈명, 백낙청, 김병오, 조태일 등과 ‘거시기 산우회’를 조직하여 지리산, 소백산, 설악산, 치악산, 월출산, 태백산, 오대산 등을 누비고 다닌다. 1985년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대표직을 맡고, 이듬해에는 민주헌법 쟁취서명운동으로 자실 사무실 수색 <민족문학회보>를 압수당한다. 이럴 때 집안에는 잔잔한 경사가 생긴다. 외동딸 윤정이 대학에 합격한 것이다. 


1987년 2월 3일에는 ‘자실’ 압수수색영장이 발부되고 다음 날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명으로 87 문학인 선언이 발표된다. 4월 29일에는 ‘자실’ 주최 소위 ‘4.13조치에 대한 문학인 194인의 견해’란 시국성명이 발표되어 우리 문학인들이 6월항쟁의 첫 테이프를 끊은 셈이 된다. 이듬해 7월에는 이돈명 변호사와 일본을 방문하여 재일동포 장기수 사상범 서승 시 가족들을 만나보고 강연도 하며 일본 법률인단과 간담을 갖는다.

이상으로 선생의 가장 치열했던 삶의 행적을 대강 흩어보았다. 싸움은 대거리할 상대가 있어야 팔을 걷어붙일 수 있다. 그리고 먼저 시비를 건 싸움보다는 먼저 공격을 당할 때에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거기에는 분노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90년대로 접어들면서 선생의 행보는 현저히 부드러워진다. 싸울 대상이 사라진 탓일까? 아니면 어깨를 짓누르는 연로의 휴지(休止) 때문일까?


1994년에는 <평화통일자문회의 문화분과위원장으로 피임되고, 1996년에는 한민족 문학인들 백여 명이 참석한 ‘한민족 문학인 대회’를 주도한다. 이듬해에는 <남녘사람 북녘사람>으로 제4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98년에는 현대 정주영 명에회장이 소 떼를 몰고 방북하던 판문점 현장을 취재하는 길에 북한 땅을 방문한다. 고향을 떠나온 지 48년 만이다. 2000년에는 <남녘사람 북녘사람>이 일본어판으로, 장편 <소시민>이 스페인어로 출간된다. 그리고 적십자사 자문위원 자격으로 평양에서 열리는 이산가족 제1차 상봉현장에 동참하여 50년 만에 누이동생을 만난다.]


이 작가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탈향」 「나상」 「만조」 읽으면 이호철의 초기의 문학적인 동기가 6․25를 전후로 한 작가 자신의 체험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전쟁으로 고향을 떠났거나, 고향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들 가운데 「탈향」 은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서 부산에 피난을 온 네 사람의 10대와 20대의 인물들의 생활을 그리고 있고, 「나상」은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형제 가운데형이 먼저 죽어 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만조」는 공산치하에 들어갔던 마을이 다시 국군의 진주로 인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 세 편의 단편뿐만 아니라 이 무렵에 발표된 대부분의 작품들이 비슷한 주인공의 비슷한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가의 관심이 전쟁을 전후로 한 청소년들의 삶에 집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쟁 자체가 그러한 것처럼 초기의 이 작가가 다루고 있는 세계는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러한 낭만적인 세계가 아니라 천형(天刑)을 받은 듯한, 인간의 삶에 값하지 못할 만한 비참하고 잔혹한 현실이다.

저자는 황순원의 회현동 시절을 추억하며 “선생의 문학이나 인품이 가생이로 밀려난 듯한 느낌이 든다”고 가슴 아파한다. 황순원의 회현동집은 그 당시 문학을 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부지불식간의 일종의 믿음 같은 것이었다. 젊은 작가들 몇몇이 명동쯤에서 술 마시면서 기염을 토하다가 통행금지 사이렌이라도 울리면 “회현동 가자”할 만큼 언제나 따뜻하게 그들을 맞이해 주었다고 이호철은 회상한다.

이호철은 자신의 수필에서,

“내 고향 함경남도 원산은 서울에서 불과 충북 영동(永同)까지 가기만한 거리인 220㎞. 요즘 우리네 감각으로는 자동차로 3시간이면 너끈히 가 닿을 거리임에도 지난 50년 동안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신 날짜도 모르고 지내 오다니, 세상 천지에 이런 나라가 우리 나라 말고 이 지구촌 또 어디에 있었다는 말인가. 이게 도대체 제대로 생긴 나라였더라는 말인가.


지난 50년간 고향 쪽 부모 형제 생사는 아예 마음속 깊이깊이 묻어 둔 채 체념하고 살아 왔지만, 이런 일이라는 게 체념하려고 한다고 해서 쉽사리 체념이 되는 일인가 말이다. 그나마 9·9절인 음력 9월9일이면 사망 날짜를 모르는 조상들 제사를 지내는 날이라고 해서, 30년 전부터 조촐하게 제상을 차려 조부모와 부모님 지방을 함께 가지런히 모셔 놓고 깊은 밤이면 심산유곡에서 제사를 치르듯이 식구들끼리만 제사를 모셔왔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봐 가만가만히 숨을 죽이고서, 몰래몰래 어쩐지 떳떳지 못하게… 그 무슨 죄 받을 일이라도 저지르듯이…. 아, 이렇게 인륜의 가장 기본을 가슴 깊이 묻고 살아온 우리 삶이 어찌 온전한 사람살이였더라는 말인가.” 라고 적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