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1934-1965, 평남 순천)
1950년대의 명동은 「구호물자와 순이가 에레나가 된 양갈보와 몇 개의 화랑훈장과 검은 상처의 블루스, 아아 바라크의 꿀꿀이죽」뿐이었던 시대, 폐허의 비극적 교회였다. 피란지에서 귀환한 문인들은 구호물자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명동으로 몰려나와 초저녁부터 「술 취한 실존주의로 절규하고 떠들고 왁자지껄해지는」 밤의 명동을 연출했다. 그리고 그들은 「명동의 무너진 건물 사이의 길을 끼고 노천 주점에서 무겁게 취해」갔다고 高銀(고은)의 「1950년대」는 증언한다. 그 명동에는 일본인 아내와 헤어진 충격으로 실어증을 앓던 화가 李仲燮(이중섭), 불교로 반쯤 탈속한 吳相淳(오상순), 독설로 유명한 청년 金冠植(김관식), 누추한 외모 속에 천재를 감추고 있던 千祥炳(천상병) 등이 함께 어울렸다.
환도 후 오갈 데 없던 문화예술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폐허의 거리로 몰려나왔다. 그곳에 가면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고, 쓰디쓴 소주나 막걸리를 얻어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은성이란 대폿집을 들르면 손님도 없는 이른 시각에 카운터 앞 지정석에 비품처럼 단정하게 앉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신사가 있었다. 그이가 바로 소설가 李鳳九(이봉구)이다. 명동입구에 자리잡고 있던 은성은 텔런트 최불암의 모친이 경영하던 대폿집으로 주로 문인, 화가, 연극인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50년대와 60년대를 걸쳐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의 사랑을 받던 명소 중의 하나였다. 독일에서 막 귀국한 전혜린이 대학강의를 끝내고 검은 머플러를 쓰고 들르던 집도 은성이다. 연합신문사의 문화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봉구와 전혜린은 오래 전부터 친교가 있었고,그 둘은 약속 없이도 그곳에서 자주 만났다. 전혜린이 다량의 수면제를 삼키고 세상을 떠나던 날 밤도 그들은 은성에서 만났고, 그곳에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러나, 그 자리가 영결의 자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 옛날 모나리자 다방으로 돌체 다방으로 혜린은 나를 찾아 나왔고 나를 따라 대폿집에서 술을 마시고 그 큰 눈동자를 굴려가며 이야기를 쉴새없이 계속했다. 무심코 나오는 말 한마디에도 센스가 빛났고 그의 말은 하나의 음악이요 한 편의 시였다』라고 이봉구는 나중에 전혜린에 대한 회고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전혜린. 그녀는 시인도 아니었다. 소설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평론가도 아니었다. 굳이 딱지를 붙이자면 `번역문학가'라고나 할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가 그 이름을 뒷받침하는 번역서 목록의 일부다. 번역이 아닌 그 자신의 글이라고는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하인리히 뵐의 소설 제목을 차용한 산문집, 그리고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라는 제목으로 묶인 일기가 전부인 여자.
그럼에도 '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 '희귀한 여류 법철학도요,독일문학가', '정신의 무국적자', '불꽃처럼 산 광기의 천재'…
전혜린을 두고 하는 말은 끝이 없다. 전혜린은 일제시대 중반 부유한 관리의 맏딸로 태어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아버지가 사다주는 책을 마음껏 읽으며 경기여중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워낙 여학생이 드문 데다 도통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거리낌없는 행동, 경탄스러울 만큼 예리한 두뇌 때문에 그녀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1955년 가을, 전혜린은 법학을 그만두고 문학공부를 위해 독일 유학을 떠난다. 뮌헨의 슈바벤, 내리깔리는 축축한 안개 사이로 오렌지색 가스등이 신비로운 빛을 발하는 그곳은 곧 전 혜린의 정신적 고향이 되었다. 그는 뮌헨대학에서 독일 리얼리즘의 선구자 그릴파르처의 문학을 연구하는 한편, 철학자 니체와 그의 연인이며 소설가였던 루 살로메에 열중했다. 도서관에서 루 살로메의 전기를 읽다가 그 사진을 몰래 오려냈을 정도로 전혜린은 루 살로메를 좋아했다.
“슈바빙은(…) 발전해가는 기계문명 속에 아직도 한 군데 남아 있는 낭만과 꿈과 자유의 여지가 있는 지대(…). 그 속에 한번 들어가서 그것을 숨쉬고 그것에 익고 나면 다른 풍토는 권태롭고 위선적이고 딱딱하고 숨막혀서 도저히 못 참게 되는 곳인 것 같다.(…)슈바빙은 한마디로 청춘의 축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희생도 적지 않게 바쳐지는, 그러나 젊은 목숨이 황금빛 술처럼 잔에 넘쳐 흐르고 있는 꿈의 마을, 이것이 슈바빙이 아닐까.”
전혜린에게 있어 4년간의 슈바빙 시절은 한국에서는 맛보지 못한 본질적 삶의 세례를 받은 시기였으며, 그는 귀국해서 죽기 전까지 `복음'의 전파에 주력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쉽게 인간의 의욕을 꺾는가”를 절감한 그가 언제나 그리워한 그의 도시는 뮌헨이요 슈바빙이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한국에 대한 혐오와 뮌헨을 향한 향수에 시달려야 했다.
귀국한 전혜린은 여자는 강단에 세우지 않는다는 완고한 전통을 깨뜨리고 스물 다섯 살의 나이로 서울대학에 출강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1세기에 한번쯤 나올 희귀한 천재’라는 격찬을 들으며, 그러나 그로부터 5년 뒤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일곱 살짜리 딸 정화를 남긴 채. 소설을 쓰겠다 는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서.
갑작스런 그녀의 죽음은 그녀의 삶을 어느 만큼 신비화시켰고 숱한 추측을 낳게 만들었다. 자살이냐 아니냐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어쩌면 자살이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그녀는 늘 죽음을 생각하며 되뇌었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계속 살았더라도 죽음에 대한 유혹을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자주 입에 올린 단어는 권태와 광기였다. 광기일 만큼 치열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 그러나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권태로운 일상. 전혜린은 그 둘의 충돌 한가운데서 한없이 절망하고 허무의 나락에 빠졌다. 맹렬하게 삶에 매달리는가 하면 다음 순간 허무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양 극단을 무수히 넘나들었다. 수면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고 하루에 커피 15잔을 마셔야 정상이 될 만큼 그의 심장은 약해져 있었다.
부유한 가정환경, 딸의 공부를 적극 지원한 아버지, 비상한 두뇌, 탁월한 감수성, 그 모든 천혜의 혜택을 받아 독일유학까지 마친 선택받은 여성, 전혜린. 그녀는 '정신의 무국적자'로 남아 철저히 '자기'만을 탐닉하다 돌아갔다.
검정 스커트에 검정 머플러를 즐겨 두르고 다니던 사람. 도저한 페시미스트이자 동시에 순간순간을 미칠 듯이 강렬하게 살고자 했던 생의 찬미자. 평범을 경멸한 귀족주의자인가 하면 무수한 콤플렉스에 시달린 삶의 패배자. 여자라는 옷을 거추장스러워했으면서도 출산과 육아의 경험에서 행복을 느낀 모순의 존재.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광휘처럼 감싸고 있는 것은 서른 둘 젊은 나이에 맞은 성급한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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