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조지훈 (趙芝薰, 1920~1968, 경북영양)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9:41

조지훈 (趙芝薰, 1920~1968, 경북영양)

 

 조지훈은 1920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서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이었던 조헌영과 유노미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조부 조인석은 천석꾼의  부호일 뿐 아니라 시문이 뛰어났다.

영양에는 조지훈을 길러낸 주실마을, 오일도가 자란 감천 , 이문열의 고향 석보(원리 마을)등 문향의 고장이다.

  지훈은 18세 때 가출을 해서 만해 한용운을 만난 후부터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한편, 시 습작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침내 지훈은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지에 데뷔한다. 그 때가 1939년 4월로 그의 나이 열 아홉 살 때였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승무(僧舞)'는 이 때 구상하여 이듬해, 즉 스무살 때 완성한 작품이다.

 지훈은 1948년 10월 고려대 문과대 교수로 부임하여 시론, 현대문학사, 문예사조사, 문학개론 등을 강의했다.  4·19 교수시위단이었던 그는 ‘큰 일 위해 죽음을 공부하라-4월의 학생들에게’라는 고대신문 논설을 직접 썼다. 또 ‘자유여 영원한 소망이여. 피 흘리지 않곤 거둘 수 없는 고귀한 열매여… 잊지 말자 사람들아. 뜨거운 손을 잡고 맹세하던 아 그날 4월 19일 을’이라는 광주직할시 광주공원의 4·19추모시 등에 잘 나타나듯, 고대를 4·19학생의거의 선봉에 서게 한 사람이다. 또한 고려대에 재직하면서 민족문화연구소를 창설, 한국학연구에 정열을 바쳐 <한국 민족운동사> <한국문화사서설> <멋의 연구> 등을 저술한 탁월한 국학자이기도 하다.

 고려대학교는 ‘막걸리 사발식’으로 유명하다. 이는 조지훈의 음주론 <주도유단(酒道有段)>의 정신을 되살린 ‘안암동 주도풍속’이다. 조 시인은 “술은 돈이 아까워 혼자서 몰래 마시거나(隱酒), 무슨 잇속(商酒)이나 목적 아래(色酒 따위) 마시는 게 아니라, 모름지기 세상을 배우는 자세로(學酒), 내가 비록 컨디션이 안 좋으나 남을 위해서 라면 마시는 데(嗜酒) 그 참멋이 있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아는 것이 많다고 해 ‘조지다’(知多)란 별호를 얻었다.

  대구 피난시절 말대가리집, 석류나무집에 예술인이 자주 모였다. 이 자리에서 조지훈의 호탕한 기개나 와이담이 늘상 빛났다. "우리나라에서 그것이 제일인 사내가 누군지 아시오. 조지 가득한 조진만도 괜찮고 조지 반드시 크다는 조필대 것도 쓸만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역시 일품은 조지 훈훈한 조지훈의 것이지." 일동이 떠나갈 듯이 웃어 댔다.

 동란 중 서울 수복 후(1953~4년 경), 명동 천주교 성당에서 당시 모 대주교의 초청으로 몇몇 저명 문인들과 주교·신부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칵테일 파티였다. 이 자리에서 「지식인의 의지」문제가 화제가 되어 설왕설래하게 되었다. 주교님이 말하길 "담배 불만 잠깐 스쳐도 그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인 인간의 의지"라고 하면서, 일반적으로 지식인의 의지 또한 이에서 별로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즉 한시대의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소위 '의지'라는 것을 신앙인의 입장에서 별로 대단치 않게 평가했다고 한다. 그러자 지훈은 지난 날 우리 역사상의 사육신의 실례를 들어 이를 반증하였다. 그래도 그 주교가 지훈의 반론에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자, "그럼 내가 이 자리에서 지식인의 의지를 한번 보여 주겠다!" 고 하면서 성냥개비 대여섯 개를 한꺼번에 움켜쥐고 불을 붙여 자기 손등에 올려놓았다. 주위 사람들은 갑자기 무슨 영문인 줄도 모르고 긴장된 채 이를 지켜보았다. 불타는 성냥개비와 함께 지훈의 손등이 지글지글 타들어 갔다. 주위가 숙연해지자 지훈은 태연자약하게 오른 손으로는 술컵을 들어 마시더란다. 한참만에 손등의 불이 제풀에 꺼지자 입으로 "훅~!" 불어서 재를 날려 보내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술을 한잔 더 마시고 밖으로 나갔다.

 1960년 지훈이 「새벽」 3월호에  [지조론]을 발표한다.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라고 쓴다.

 이 글은 당대에 엄청난 반향과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 글의 집필 동기는 멀게는 자유당의 적폐(積弊)에, 가깝게는 이승만대통령의 3선개헌에 정족수를 채워주기 위해 돈에 팔려간 야당 국회의원들의 변절에 있었다.

 그의 절개와 용기를 웅변으로 말해 주는 일화나 행적이 그에게는 적지 않지만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승만 박사가 두번째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였던가, 그는 정부당국으로부터 이대통령 송시(訟詩)를 쓰라는 교섭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言下에 거절하면서 한 말이 [나는 이박사든 누구든 살아 있는 사람의 訟詩는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일협정비준을 반대한 교수 및 문단인의 서명 운동과 그 운동이 야기한 사태에 있어서의 그의 행동도 주목된다. 지훈은 그때 서명 교수 중에서도 주동 인물로 간주되었음인지 이른바 정치교수 명단에 처음에는 끼게 되었다. 정치교수처리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절차를 밟았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당시 정치교수로 지목된 교수들은 각기 소속대학의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일단 해임 조치를 당하게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때 芝薰도 고려대학 당국으로부터 그러한 타율적인 조치로서 징계위원회에 회부된다는 통고에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 芝薰이 취한 태도는 의연(毅然)하고도 기품이 있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징계위원회 앞에 서야 하는가. 그런데도 징계위원회 앞에 서지 않을 수 없다면 차라리 사표를 내겠다."는 것이 그때의 그의 판단이었고, 그 판단은 즉시 사표 제출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다행히 그의 사표는 반려되었고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해임 조치도 면하게 되었다.

 세 사람(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이 함께 붙어 다닌 것은 해방 후부터의 일이다. 셋이 걸어갈 경우, 늘 두진은 한 발자국 뒤쳐졌다. 지훈과 목월이 무슨 화제로 열심히 이야기하다 두진의 동의를 구하려고 옆을 보면, 두진은 항상 한 발자국 뒤에서 전혀 우리 두사람의 화제에는 무관심한 얼굴로 혼자 중얼중얼거리며 따라오고 있는 것이다.

 " 두진, 뭣하고 있어! "

그가 따라오기를 걸음을 멈추고 서서 기다리면 두진은 온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다가와서

 " 두 사람은 콤파스가 길어서 그래! "

하며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하곤 했다. 그가 길거리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것은 바로 그가 시를 다듬는 방법이었다.

 목월이 걸음을 멈추고 두진을 기다려 함께 가자고 지훈을 찾으면 이미 그는 우리 두 사람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만큼 걸어가거나, 전혀 엉뚱한 방향의 가로수나 전신주 밑에서 먼 산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일쑤였다. 그의 그와 같은 점을 친구들은 그가 소탈하거나 대범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아주 우리를 놓쳐버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결국 지훈과 두진 사이를 왔다갔다 바둥거리는 것은 목월이었다.

 세 사람이 나란히 걷게 되면 항상 그 순서가 정해져 있었다. 중간에 지훈, 그 좌우 어느 한편에 두진과 목월이 서있었다. 어느 날, 이 순서에 대해 안국동에서 화신으로 나오며 지훈이 설명해 주기를,

 " 이 순서는 당연해. 두진과 목월이 가진 시세계의 양면을 다 가진 것이 나야. 두진의 의지적인 면과 목월의 정서적 감각적인 면을 나는 다 지니고 있거든."

 두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훈의 말을 인정하면서, 나직하고 엄숙한 말소리로,

 "지훈 말이 옳아, 그렇지만 다 가졌다는 것은 때로 어느 것이나 부족하다는 뜻도 되지."

그 소릴 듣자 지훈은 길거리임에도 큰 소리로 껄껄대며 웃었다. 두진도 쿡쿡 거리며 웃었다.

 1965년 만년의 지훈의 모습이다.

 '희고 준수한 얼굴에 훤칠한 키, 입은 항상 꼭 다물고, 길어서 약간 흐트러진 리젠트 머리엔 항상 검정 베레모를 멋지게 썼다. 옷은 대개 원색 줄무늬 와이셔츠에 소매는 두어번 걷어 올리고, 검은 굵은 테 안경을 쓴 시선은 항상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걷는다. 한 손엔 으레 스틱을 쥐고, 다른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지른 채, 흔히 저녁 놀 질 무렵이면 서울 성북동 골짜기를 한가롭게 산책하는 멋들어진 중년 신사''

 1968년 5월11일, 토요일 오후의 일이다. 평소에 좀처럼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이 없는 두진의 연락으로 지훈의 집에 모이게 되었다. 용건은 청록문학선집을 내자는 것이었다. 두 시간 정도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일어서려는 우리를 지훈은 극구 만류하며, 저녁 먹고 가라고 했다. 하지만, 앓는 사람이 있는 집에 손님까지 곁들이면 폐가 될까봐 염려하여 굳이 사양하였다. 밖으로 나와 구두끈을 매는 우리를 보고,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 그러지 않아도 한 번 모여 저녁이라도 함께 하려고 하였는데......"

지훈의 말이었다. 우리는 악수를 하였다. 그의 크고도 섬세한 손, 뜨겁지도 싸늘하지도 않은 손, 지훈은 웃는 얼굴로 우리를 보내 주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인간은 늙는 도중이 가장 추잡한 거야!"

  이것은 생전에 어느 술 좌석에서 그가 하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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