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용(1919-1988, 함경남도 북청)
전광용은 1919년 3월 1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육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자전 소설인 「목단강행 열차」에 따르면, 그의 집안은 경주 전씨로 불리는 문족(門族)들이 북청 고을에 큰 마을을 이루고 지방의 명문 거족의 행세를 한 것으로 보인다. 북청 공립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함흥금융조합에 취직해 들어갔다.
8ㆍ15 해방이 되자 전광용은 고향을 떠나 경성경제전문학교(현재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가, 1947년에는 다시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전광용은 다시는 고향을 찾아가지 못하고 북청에 있는 가족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이 무렵 전광용은 정한숙, 정한모 등과 함께 '주막'동인을 결성해 습작한 글을 서로 나눠 읽고 토론하는 합평회를 가지며 착실하게 문학수업을 쌓았다. 졸업후 휘문고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그가 얼마나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가에 대해서는 정한숙이 전광용을 대상으로 쓴 실명 소설 「야생마」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중 한 구절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광용은 한식과 추석날이면 배낭을 걺어지고 저 멀리 북청 땅을 바라보기 위해 험준한 능선 찾아 오르기를 삼십 년이나 되풀이 하고 있다."
전광용의 수필 <나의 고향>의 끝부분이다.
"어머니가 그립다. 나는 어릴 때,수양버들이 서 있는 우리집 앞 높직한 돌각담에 올라가 아득히 먼 수평선가를 스쳐 가는 기선을 바라보면서, 외국으로 유학간 아저씨들을 그려 보곤 했었다.이젠 80이 넘으셨을 어머니가 아직도 살아 계신다면, 지금쯤 그 돌각담 위에 홀로 서시어, 터널 속으로 사라지는 남행 열차의 기적소리를 들으시며, 흩어져 가는 기차 연기 저 너머로 안타깝게 아들의 모습을 그리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다."
193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별나라 공주와 토끼」가 당선되었고,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흑산도가 당선되어 정식으로 문단에 나왔다.
그는 「구슬이 서 말이라도」라는 글에서 학문과 창작을 병행하면서 겪게 된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흑산도」를 집필하게 된 때의 일이다. 1954년 9월 ''흑산도 학술 조사대''의 일원으로 서울을 떠났다. 나는 언어반에 속하여, 작품소재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이 학술 조사에만 목표를 두고 흑산도로 향했다. 조사를 마치고 섬을 떠나려는 전날 밤부터 갑자기 폭풍우가 휩쓸어, 태풍이 잦을 때까지 다시 섬에 체류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찰나적으로 나의 머리에 섬광을 일으킨 것이 있었다. 이 기회에 이 섬을 소재로 한 작품 자료를 수집해야겠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작품 테두리를 엮어 가면서 그에 필요한 지명, 물명, 방언, 민요 등을 채록하고, 특히 이 섬 특유의 방언, 어미 채집에 신경을 썼다."
이후 「사수」「충매화」「꺼삐딴 리」 그리고 장편 「태백산맥」「나신」 등을 발표하였다. 1962년에 「꺼삐딴 리」로 제7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작품 활동을 하면서 문학 동인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꺼삐딴 리는 격동의 현대사에 속에서 고비를 넘거나 모퉁이를 돌 때마다 힘으로 앞을 가로막는 외세의 요구와 필요성에 따라 정체성까지 바꿔가면서 필사적으로 개인의 안녕과 영달을 추구하는 한 인물의 노예근성을 까발려 보였다. 아울러 외세에 아첨하며 굴종의 삶을 견뎌온 우리 민족의 비극적 현대사를 씁쓸하게 되새기게 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창작과 학문 활동을 겸하였던 그는, 소설 작품 외에도 「이인직 연구」「이광수의 문학사적 위치」「상록수고」 등 삼십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신소설 연구』『한국 현대 문학 논고』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학자로서의 학문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창작과 학문을 병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학문과 창작」이라는 글에서 그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왕성한 정열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였으나 1970년대부터는 잡무에 몰리고, 거기에 태만이 겹쳐 작품 창작이 둔화되고 말았다." 이후 그의 삶은 대학 교수로서의 학문 활동에 바쳐지게 된다.
아래는 김여정이 밝힌 추억담이다.
"삼선교에 있던 '자매집'은 미인 자매가 경영하던 지하 술집이었는데 특히 돌아가신 작가 전광용 선생이 좋아하시던 술집이었다. 시인 정한모 선생, 소설가 정한숙 선생, 이렇게 성북동과 삼선교에 사시던 세 분 선생께서는 이 자매집에서 만나 술잔을 나누기를 즐겨하셨다.
때문에 많은 문인들이 이 집을 드나들게 되어 마치 문인들의 사교장처럼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잔을 기울이며 노래를 부르고 흥이 도도해지면 정한숙 선생은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하셨다. '이 빙신아'는 기분좋게 술 기운이 오르면 가까운 후배들에게 애칭으로 즐겨 부르는 정한숙 선생의 전유의 호칭이다. 이 호칭으로 불리우면 정 선생의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다고 일단은 믿어도 좋다.
정한모 선생은 최진희의 히트곡 '사랑과 미로'를 멋들어지게 부르고 전광용 선생의 북청 물장수식 목소리가 더 높아지던, 그래서 마냥 즐겁던 '자매집'도 전광용 선생이 돌아가신 후 신흥 마을 강동의 어딘가로 떠나고 지금은 없다.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인생도 흐르니 술집인들 한자리에 머물 수 있겠는가. 사람따라 인정따라 돈따라 흐르는 술집이니 흘러서 떠나는 것을 어이 탓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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