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조병화(1921-2003, 경기도 안성)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1:56

조병화(1921-2003, 경기도 안성)

 

  담배 파이프를 좋아했던 시인. 28세 때인 1949년 첫 시집을 낸 후 고교 물리교사에서 대학교수로 41년 동안 후학을 가르쳤고, 한국시인협회장과 문인협회 이사장, 한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했던 조병화 시인이 작고했다. 서울대 인문정보연구소가 1895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문학 100년을 CD롬으로 자료화한 결과, 조병화가 해방 이후 가장 많은 시집을 낸 것으로 조사됐다. 조병화는 조사기간에 시선집을 포함, 모두 88권의 시집을 냈다. 2위인 고 은 시인의 38권, 3위 김남조 시인의 34권을 월등히 앞선다.

 그의 이 같은 다산성(多産性)은 그의 시가 일상 속에서 말하듯, 편지 쓰듯 쉽고 편하게 쓰여진다는 데서 연유한다. 시인 스스로도 생전에 "내면의 소리가 날숨처럼 나왔다"면서 마치 숨쉬듯 시를 써왔다고 자주 밝혔다.

 조병화 시인의 고향은 경기도 안성이다. 그가 살았던 마을은 국내에 몇 안되는 문화마을 중의 하나다. 주민들에 의하면 이어령 문화부 장관 재직시에 지정되었다고 한다.

 "여덟 살이었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어. 나는 그때 난실에서 10리쯤 떨어져 있는 송전보통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안 되겠다며 고향의 논밭을 처분하시고 이듬해 서울로 이사를 하셨지. 서대문 밖에 있는 미동보통학교로 전학을 했는데 공부는 늘 1등을 했지.

 어머님은 낯선 서울에서 새 살림을 꾸리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는데 내가 「쉬어가면서 일 하세요」 하면 어머님은 그때마다 「살은 죽으면 썩는 것이니 아껴서 무엇하나」고 하셨어. 내 어머님은 내가 밤늦도록 공부를 하고 있으면 자신도 불을 켜놓고 바느질을 하셨는데 내가 「주무십시오」 하면 「네가 공부를 하는데 어미가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겠느냐」 하시며 일을 계속하는 것이었어. 하는 수 없어 내가 불을 끄고 잠든 척하면 그때서야 어머니 방에도 불이 꺼지곤 했지. 「사람의 살은 죽으면 썩는다」는 어머님의 이 말씀은 나에게 평생 어떻게 살아야 하나, 죽을 때까지 무엇을 하는 것이 최선인가를 결심하고 실천하게 했던 거야"

 미동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조병화는 교장선생의 권유로 국비로 다닐 수 있는 경성사범에 진학한다.  

 미동보통학교 시절 육상선수로 활약했던 조병화는 경성사범(서울대 사범대의 전신)에 진학한 뒤 달리기를 잘해 럭비부로 스카우트됐다. 이후 럭비는 그의 평생 친구였다.

 경성사범을 거쳐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로 유학을 떠났을 때도 럭비선수로 활약했고 41년에는 조선대표로 선발됐다. 경성사범시절 조병화는 낮에는 럭비를 하고 밤에는 기숙사에서 불을 밝히며 공부에 전념, 수석을 놓치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나는 인생을 럭비처럼, 스포츠처럼 살아왔어.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 갈거고. 스포츠가 요구하는 결단력, 페어플레이, 창조력, 이런 모든 것들이 삶에 반영되면 그 삶은 아름답고 멋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평소 ‘인생을 럭비처럼 살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가 생전에 지인들에게 남긴 말이다.

 이 같은 럭비와의 인연으로 조병화는 해방직후인 46년 대한럭비협회(당시 럭비축구협회) 창설을 주도했고 59년 경희대 국문과 교수로 부임한 뒤 럭비부 감독을 맡아 15년 동안 선수들을 지도했다.

 경성사범과 유학시절을 조병화는 이렇게 회상했다.

 "충무로에 있는 서점에 갔는데 거기서 나는 운명적인지 모르지만 로버트 번즈의 시집에 손이 갔어.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 책인데 나는 그걸 사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틈만 나면 읽었지. 이해되는 것만 줄을 치고 외우다시피 하고 말이야.

 경성사범엔 수석 입학한 선우휘라고, 소설가로 조선일보 주필 하던 선우 있잖아 그하고, 훗날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는 김영배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단짝이었어. 졸업 땐 내가 수석을 했지만 선우는 그때 민족사상이 강해서 학교 공부는 하지 않고 소설만 읽더니 나중에 소설도 쓰는 논객이 됐어. 김영배는 지금 미국에 있는데 노벨 물리학상 문턱까지 간 유명한 학자야.

 도쿄고등사범 다닐 땐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많이 읽었지. 헤세의 소설은 그 자체가 철학이야. 그때도 나는 매일 시집을 읽었어. 내 전공이 물리학인데도 문학관계 책만 계속 읽었던 거야."  

 귀국 후 조병화는 경성사범 물리교사로 취직이 되었다. "광복 직후엔 나라 전체가 좌우익으로 나누어져 싸움질이고, 학교에선 매일처럼 국대안(國立大學案) 찬·반 데모가 대치되고, 신탁통치 반대다 찬성이다 하며 삿대질의 수라장이 되어 있었어. 좌익을 소리 높여 외치는 무리들이나, 우익을 떠드는 무리나 나에게는 모두 우습게 보이더군. 그들에게 속하지 않은 우리와 같은 무리는 기회주의자니 희색분자니 하며 매도당하고 말야. 절망적인 사회였어.

 이런 속에서 쓸쓸한 나머지 나는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많은 애를 쓰고 있었어. 물리 선생으로 뉴턴이나 갈릴레오, 마담 퀴리를 가르칠 뿐, 내 인생의 흔적을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 거야. 시를 쓰기 시작했지. 「소라」라는 제목의 시인데, 썼다기보다 시가 절로 나온 것이야. 인천 월미도를 배회하던 중 바닷가에 있는 소라를 보고 꼭 내 자화상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적은 것이지.

 <바다엔/소라/저만이 외롭답니다//허무한 희망에/몹시도 쓸쓸해지면/소라는 슬며시 물 속이 그립답니다./해와 달이 지나갈수록/소라의 꿈도/바닷물에 굳어간답니다//큰 바다 기슭엔/온종일/소라/저만이 외롭답니다>

 내가 처음으로 쓴 이 시는 좌절감으로 방황하던 나를 구해준 셈인데, 그 후부터 시를 쓰며 서서히 정신의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었어"

 그가 경성사범에 있을 때 모더니즘 시론으로, 시인으로 위치를 굳히고 있던 김기림이 영어선생으로 왔다. 그는 「물리를 가르치는 조병화 선생이 시를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써둔 시를 보여달라고 했다. 부끄러웠지만 얼결에 책상 서랍 속에 둔 몇 편의 시를 보여 주었다. 김기림은 이런 시가 더 있는가 하고 물었고, 있다면서 더 보여 주었더니 다 읽고 난 그는 『책으로 냅시다』 했다. 그날 저녁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는 시인 장만영을 만나게 되고 출판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시집이 나오자마자 그는 자연스럽게 김기림을 둘러싸고 있던 문인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김광균 김경린 양병식 박인환, 소설가 이붕구 등 대부분 「모더니스트」 시인이었다. 이들은 그의 문단 생활 초기 울타리가 되었다.

 조병화의 직장은 서울이었지만 집과 부인의 병원은 인천에 있었다. 그는 통근을 했는데 수업이 끝나면 곧장 인천으로 가지 않고 명동의 「휘가로」 다방에 가서 이봉구, 장만영, 박인환 등과 어울려 문학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밤늦도록 선술집을 돌고, 그는 서울고교로 돌아와 도서실에서 「고독하게」 잠이 들곤 했다. 그 서울고교는 지금 경희궁으로 복원돼 있다.

  6·25 전쟁 때는 피난을 가지 못해 고생이 막심했다가 「1·4 후퇴」 때야 부산으로 피난을 간 그는 의사인 아내가 돈을 내 송도에 새 집을 짓는다. 겉으론 안정된 생활 같았지만 그의 내면은 만신창이였고 심지어 자살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불안한 戰時(전시) 상황에서 돈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다 일본이다 하다못해 제주도로 도망을 치는 어수선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런 어느 날 문인들 몇몇을 불러 집들이 겸 잔치를 벌였다. 모윤숙, 이헌구, 김환기 등이었는데 잘 먹고 간 그들은 소문을 흘리고 다녔다. 「조병화가 의사 마누라 덕에 호화판 피난살이를 하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집으로는 부르지 않았다. 「의사 마누라」를 뒀다는 것이 그만 그의 콤플렉스가 된 것이다.

  서울고교 학생들로부터 「술통」이란 별명을 얻고 있던 조병화 시인은 서울 수복 후엔 주로 박인환 김수영 등과 술을 마셨다. 특히 김수영은 조병화가 맥주집에 앉아 있으면 『야! 여편네 덕에 부르주아지로 잘 사는 놈아 너는 맥주 마시니? 프롤레타리아인 나는 소주나 겨우 몇 잔하고 왔다』며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것이었다.

 늘 불만에 차 막말을 하는 김수영은 일부러 조병화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기 좋아해 이것이 싸움의 발단이 되곤 했다. 아내 덕에 사는 것이 아닌데도 일부러 놀려대니 열불이 안 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박인환이 싸움을 뜯어말리기도 했지만 박인환 자신도 주정이 심해 분위기가 시들해지고, 이튿날엔 둘이 화해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 셋은 명동 일대에서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둘 다 일찌감치 저 세상으로 갔지만 말야. 니체 식으로 보면 박인환은 아폴로的이고, 김수영은 디오니소스的이라 할 만했지. 김수영은 어두웠고 박인환은 밝은 편이어서 무척 대조적이었어. 그 때문에 우린 잘 어울렸고, 그게 서로에게 우정은 물론이고 많은 시的 자극을 줬지 않나 싶어. 글쓰는 사람끼리는 선의의 라이벌 의식이랄까 이런 게 있어야 서로 발전이 있는 것 같아"

 1950년대 명동에서 시작한 조병화와 친구들의 술집 편력은 1960년대 들어서는 이한직, 조지훈, 전봉건, 김광림, 전광용 등과 함께 광화문 국제극장 뒷골목을 거쳐 무교동으로, 1970년대 초엔 다시 종로와 관철동의 「낭만」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 주위는 조금씩 쓸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서울고교에서만 10년을 근무했는데, 인기만점의 교사였다. 시를 쓰고 스포츠도 좋아하고, 물리선생이 시와 철학 이야기를 섞어가며 지루할 수 있는 수업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때, 그리고 항상 웃고 소탈하게 학생들을 대하고, 특히 훈육주임 앞에서 곤욕을 치르는 학생의 편을 드는 선생일 때, 당연히 그 사람은 오래 기억에 남는 교사가 되게 마련이다. 당시의 서울고교 출신 거의 전부가 조병화 선생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은 이런 그의 친근감에 근거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학교수 사회에서도 그는 부지런하고 시간 잘 지키고, 항상 일찌감치 출근해 틈만 나면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쓰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가끔 손수 라면을 끓여 들기도 했다. 하여간 쉬는 시간은 거의 볼 수 없이 작품생활에만 열중하는 것이었다」고 조동규 경희대 교수는 자신의 회고담에서 적었다.

  1955년 발표한 다섯번째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정음사刊)는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뒀다. 이 시집은 전쟁에 시달리고 피폐했던 젊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사랑의 노래로 달래 주던 책이었다. 4년에 걸쳐 중판을 거듭,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새로운 사건을 만들었다.

 그는 인간의 실존적 삶을 다룬 순수시만을 일관되게 써왔다. 이로 인해 격동기를 살아온 시인으로서 민족문제나 역사성을 지나치게 외면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의 이 같은 성향을 두고 시인 김수영은 "넌 부르주아, 난 프롤레타리아"라고 빈정거리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씨는 "말하듯, 편지하듯 씌어진 것이 조병화 시의 형태적 특징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나날의 삶 속에서 숱하게 겪는 극히 통상적인 정감 경험의 토로가 시의 내용을 이룬다"면서 "그의 시에 나타난 고독은 몸서리치도록 처절하거나 다스릴 수 없는 폭동과 같은 것이 아니라 순치와 애무가 가능하며, 적당히 귀엽기까지 하다"고 평했다.

 문학평론가 김재홍씨는 "그의 시가 한 때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수십년간 생명력을 이어온 것은 그의 시가 인생이라는 크고 어려운 주제를 탐구하면서도 그것을 평이한 비유와 소박한 어법으로 노래하기 때문"이라면서 "그의 시는 사랑, 이별과 애수, 긍정과 달관, 어머니와 고향, 갈망과 보헤미안, 인간애, 고독과 허무의 시 등으로 요약되며 인간주의, 낭만주의, 순응주의, 영원주의에 정신적 기반을 두고 있다"고 평했다.

 빈소를 찾은 이근배(시인협회 회장) 시인은 "우리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를 잃어 막막하다. 박인환 시인의 시 목마와 숙녀 처럼 누가 읽어도 이게 시구나라고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시인을 빼앗겼으니 이제 시는 점점 더 꼬이고 어려워지겠구나"하며 안타까워했다.

 조병화는 팔순을 맞아 펴낸 쉰번째 시집 「고요한 귀향」(시와시학사刊)에 실린 '꿈의 귀향'에서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라고 묘비명을 써놓았다.

  "잊어버리자고/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하루/이틀/사흘.//여름 가고/가을 가고/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잊어버리자고/바다 기슭을 걸어 가는 날이/하루/이틀/사흘."(추억전문) 학창 시절 누구나 한번 아련히 빠져들었을 위 시와 같이 조병화의 시는 쉬워 그대로 노래가 될 수 있다.

 시적 미학이나 현실성을 강조해 난해하거나 팍팍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가슴 가득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게 반세기 이상 그의 시의 한결같은 특징이었다.

 운명하기 전 그는 「시, 그 운명」이라는 글에서 팔십을 넘어 인생을 마감하려니 「시는 결국 나의 운명 바로 그것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시는 실로 현실적인 생활은 되지 못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불안한 것이지만, 그만큼 몽매한 것이지만, 나에겐 큰 위안이 되며, 정신의 빛이 되며, 스스로를 보는 철학의 밝은 눈이 되며, 살아가는 기쁨이 되며, 의지가 되며, 믿음이 되며, 자기 자신 혼자 살아가는 항로의 흔들리지 않는 그 고독한 등대가 되었다.

 그 시라는 고독한 등대 때문에 나는 흔들리지 않는 내 인생을 내 철학대로, 내 꿈대로 그렇게 맑게 밝게 훤하게 후회 없이 나대로 곧게 살아온 것이다. 존재의 고독을, 생존의 위기를 견디어 내면서 오히려 그 존재의 고독을 더 높이, 더 깊이, 더 넓게 키우며 그 키운 고독의 힘으로 생존의 위기를 이겨 나온 것이다.

 나의 작품들은 그러한 생존의 투쟁 속에서 고독을 키우며 고독과 더불어 살아 온 삶의 따뜻한 유적들이다. 그렇게 살아 온 흔적으로서, 내가 이러한 시가 없었더라면 이 긴 인생을 어떻게 살았을까, 하고 때때로 나를 뒤돌아볼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