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정희성(1945-, 경남 창원)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1:52

정희성(1945-, 경남 창원)


  정희성 시인이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을 옮긴다.


1. 유년 시절엔 어떤 아이였는지

- 아버지가 기술직 공무원이었고, 전출이 잦았어. 중학교 입학 때까지 대전과 전북 이리, 전남 여수와 서울 등지로 자주 옮겨 다녔지. 전쟁 이후의 호전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국군과 빨갱이로 편을 갈라 총싸움 놀이도 자주 했어, 도둑 영화구경도 많이 했어. 신파극 <며느리 설움>과 우스꽝스런 변사의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에 선해. 백일장에 나가기도 했지만 상을 받거나 하진 못했고, 오히려 그림을 잘 그렸어. 다섯 자식들에게 보리밥도 양껏 먹이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어머니의 모습도 떠오르네.


2. 문학과 관련된 기억도 있을 텐데

- <새벗>이나 <명랑> 따위의 잡지 외에는 읽으려고 해도 읽을 책이 없던 시절이었어.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책읽기 좋아하는 장남을 위해 아버지가 서점 하나를 정해주더군. 내가 보고 싶은 건 다 보라는 거야. 책값은 월말에 한꺼번에 계산해준다고. 아버지의 그 배려가 나를 문인으로 만든 건지도 모르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신곡> 등을 열심히 읽었어. '읽는 게 이렇게 재밌는데 쓰면 얼마나 재밌을까'라는 생각도 그때 했지. 도스토예프스키를 흉내 내서 습작소설도 쓰고 그랬어.


3. 64학번이다. 어지러운 시대에 대학을 다녔는데

- 6.3세대라고 그러지. 굴욕적 한일외교 정상화 반대시위가 있었던 해잖아. 주동까지는 아니지만 시위에는 참여했어. 잡혀서 경찰버스에 실려 안양 어디쯤인가로 갔는데 거기서 강제로 하차시키더니 차는 떠나버리더군. 안내양에게 아무리 사정해도 공짜 버스는 태워주지 않아서 영등포까지 걸어왔는데, 경찰관을 하던 외삼촌이 엄마 걱정시키는 불효자라며 호되게 야단을 치더군.


4. 왜 시인이 되고 싶었는지

- 용산고를 다녔어. 해마다 문예반이 <청맥 문학발표회>라는 걸 하는데 여자 친구들 불러서 구경도 시키고, 폼 잡는 게 멋있어 보이더라고. 그래서 적을 두고 있던 서예반 활동은 뒤로 하고 교지에 시와 소설 따위를 썼지. 문학으로 상을 받은 최초의 경험은 대학 3학년 때야. <서울대문학상>이었고, 당선작은 '탁목조(啄木鳥)'였지.


5. 등단은 언제인가?

- 70년 동아일보야. <변신>이라는 시로 나왔지. 그걸 68년도에도 동아일보에 보냈는데 낙선한 거야. 그해 당선자는 마종하(시인)였어. 오기가 생겼어. 제대할 무렵에 대폭 개작해서 다시 응모했는데 당선됐더군. 68년 심사평이 '옥석이 섞여 있는 시'였어. 옥은 남기고 돌을 골라낸 게 적중했지(웃음).


6. 고등학교(숭문고) 국어교사로도 30년을 살았는데

-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이잖아. 그래서 학교에서 나오면 말을 아꼈던 것 같아. 70~80년대엔 사회현실을 직접 말하기가 어려워 그 시대를 일제시대에 비유해 학생들에게 설명하곤 했지. 그래도 알아듣는 영민한 아이들이 많아서 나 스스로도 감동하고 그랬지. 요새는 그런 아이가 드물어. 좋아진 시절 탓만은 아닐 텐데.


7.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는?

- 시 쓰는 고운기야. 고등학교 때 직접 시집을 만들어 나에게 보여줄 정도로 조숙했지. 요즘도 가끔 '건강하시냐'고 안부를 물어오지. '역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는 김범이란 제자도 아주 영특하고, 예의 바른 친구였지.


8. 청춘의 대부분을 군사독재 아래서 살았는데

- 농촌은 붕괴되고, 도시는 기이한 구조로 팽창하던 시대였지. 부모는 '저곡가 정책'에 자식들은 '저임금 정책'에 혹사당했어. 문학으로서 시대를 증언하고,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사회를 꿈꾸게 한다는 시인의 책무를 제대로 수행했나를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해. 참으로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살아왔어. <세계 시인대회>에 말 그대로 '쳐들어' 가, 김지하를 석방하라고 외치다가 연행도 됐고, 그 때문에 해직의 위험도 겪고 그랬지.


9. 등단 31년에 시집 4권만을 낼 정도로 과작(寡作)인데 이유가 있는지.

"재주가 없어서 그래(웃음).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이 활자화되면 못 견디겠어. 지나친 결벽증이지 뭐. 하지만 시인은 독자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고, 태작으로 독자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아.


10. 김지하, 신경림, 조태일 등과 당신을 묶어 '70년대 민중시인'이라 규정하는데

- 내가 보기에 완벽한 민중시인이란 <노동의 새벽>을 쓰던 시절의 박노해 정도라고 생각해. 우리야 그저 그 이전에 민중지향적 지식인문화를 만들어낸 것에 일조한 정도지.


11. 사숙한 작가와 주목하는 후배 시인은?

- 30년대 시인들이야. 이용악의 호방담대한 목소리, 백석의 빼어난 서정, 정지용의 담백한 아름다움을 동경했지. 후배 시인 중엔 박영근이 들려주는 민중성에 입각한 가난한 사랑노래가 바뀐 시대에도 여전히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아."


12. 완벽한 퇴고 없이는 새 청탁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 산문 청탁도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소문이 사실인가?

- 사실이야. 오자는 물론, 구두점(句讀點) 하나가 틀리는 것도 견딜 수 없이 싫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건 독자에 대한 책임 아니겠어?


13. 아직도 시가 사회변혁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 직접적 혁명이나 변혁의 수단은 될 수 없다고 해도 불의한 시대를 꾸짖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봐.


14. 무지한 질문이다. 시란 무엇이고,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끊임없는 의문이자, 답이 없는 질문이 시 아니겠어? 그런 의미에서 30년 넘게 시를 썼지만 겨우 시의 옷자락만을 잡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어. 시가 무언지 알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시를 쓰지 않겠지. 시? 짝사랑 같은 거야. 그러니 시인은 짝사랑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겠지.


15. 젊은 시인들이 '시적 치열성'을 잃어간다는 목소리가 높은데

- 문학이란 동시대와의 의사소통에 다름 아니야. 그런데 요즘 젊은 작가들의 시를 읽으면 우리말로 쓰여졌는데도 도대체가 우리말이 아닌 것 같아. 시인인 내가 그런 느낌인데 독자들은 어떻겠어? 암호 같은 시로는 독자를 감동시키거나 설득할 수 없어. 복잡한 시대일수록 단순하고 간결해지는 방법을 고민해야지.


16. '내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길을 나서겠다'라고 했다. 해방되었고, 길을 찾았는가?

- 시를 쓰지 않아야 완벽히 해방되는 것 아니겠어?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 유연성에 이르는 길을 찾고는 있지. 달라진 시대에 걸맞은 또 다른 목소리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어. 여전히 시란 시인의 아름다운 굴레이니 해방을 꿈꾸며 길을 찾으면서도 시는 놓치지 않겠지.


17.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고 그랬는데, 아직 저항할 대상이 남았는가?

- 지난 시대 '유신'이나 '군사독재'처럼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저항할 대상은 엄존한다고 생각해. '빈부격차'나 '성차별' '전염된 절망'같은 다양한 형태로 말이야.


  아래는 정희성 시인의 강연회 원고를 줄인 것이다.

[1970년 신춘문예에 당선되고부터 이 짓을 해왔으니 어언 30년 세월 동안 나는 ‘말 줄이기’훈련을 해온 셈이다. 묵언(黙言)으로써 말을 하는 경지를 넘본 것은 아니로되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피곤하다. 일상에서도 그러하고 시에서도 그러하다. 그렇게도 말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쩌자고 국어선생 노릇을 하고 시인이 되었는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팔자라면 팔자일 터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내가 그렇게 말수가 적은 사내는 아니었지 않나 싶다. 한때는 소설가를 꿈꾸기도 했으니 말이다. 시는 소설이 필요로 하는 만큼 많은 말을 요구하지는 않는 것이어서 거의 묵언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마음이 들어가 쉴 만한 작은 공간을 빚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온 터였다. 거듭되는 이러한 말 줄이기 훈련이 나를 왜소하고 빈곤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자신이 넉넉하고 걸출하고 헌걸찬 사람이 못된 것을 늘 불만으로 여겨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의 성품을 말할 때마다 ‘결곡하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 줄 알지만 나는 이 표현에 대해서도 못마땅하다. 이 말이 끝내는 저의 틀 속에 나를 가두려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훈장 노릇을 오래 해온 내가 어디서나 ‘선생님’ 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도 나는 싫다. 때때로 선생님 아닌 짓도 좀 하고 싶은데, 남 눈치 봐가며 슬그머니 벗어나려고 하면 어김없이 누군가가 와서 뒤통수에 대고 ‘선생님’하고 돌려세우고 만다.(중략)

  내가 현실주의자가 되어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맞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우리의 낭만적인 환상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지 현실주의 자체가 문학적 이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인은 불가피하게 현실주의자가 되기는 하여도 본질적으로는 천진한 낭만주의자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현실이야 어찌되든 나는 모르쇠 하던 이들이 현실주의자의 자기반성을 두고 그거 봐라 하는 식으로 고소해할 일은 아니다. 나의 시는 한 시대의 불의와 맞서서 싸우다 죽은 용감한 사람들의 영혼에 바쳐진 것이었다. 내 시 가운데 추모시의 형식으로 된 것이 유난히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내 자신이 정치권력과 정면으로 맞서서 싸울 만큼 용감하지는 못해서, 그 심리적 보상으로 이러한 시가 씌어졌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시를 통해서 싸울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터이기도 했다. 그러나 ‘싸움’을 생각하는 순간 나의 몸과 마음은 굳어지고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의 사고는 경직되고 언어는 메말라 갔다.


     증오에 대해서

     나도 알 만큼은 안다

     이곳에 살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싸우다 죽은 내 친구는 왜 눈을 감지 못하는가

―「이곳에 살기 위하여」부분


  이 불의의 시대에 맞서는 힘은 증오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한 나의 언어는 부드러움을 잃고 점차 공격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학생들은 돌은 던지고

     무장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대고

     옥신각신 밀리다가 관악에서도

     안암동에서도 신촌에서도 광주에서도

     수백명 학생들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피묻은 작업복으로 밤늦게

     술취해 돌아온 너를 보고 애비는

     말 못하고 문간에 서서 눈시울만 뜨겁구나

     반갑고 서럽구나


  이렇게 시작되는 「아버님 말씀」은 작품이 지닌 선동적인 성격 때문인지 곧잘 대학 시위의 현장에 대자보로 나붙고는 했다. 학생들은 이「아버님 말씀」에 상당히 고무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공격적인 언어의 화살이 적들의 가슴에 꽂히기 전에 먼저 선량한 독자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입히는 것을 목격하고는 괴로워했다. 어떤 이는 이에 고무되어 나가 싸우다 쓰러졌고 또 어떤 이는 나의 시를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다는 죄로 교단에서 내몰리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나는 이에 충격을 받았다. 정작 이 시를 쓴 나 자신은 멀쩡한데 다른 사람이 상처를 입다니 ……  나는 말이 애초에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도 잘 씌어지지 않았다. 내가 했던 모든 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기실 말은 다른 사람을 고무시키기도 했지만 나 자신을 옭아매기도 했던 것이다. 공격적인 나의 언어는 나 자신의 심성마저도 거칠게 변화시켰다. 부드러운 눈매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대신에 매서운 눈초리로 세상을 쏘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최근에 나는 「첫 고백」이라는 시를 쓰면서 나 자신을 돌이켜본 적이 있다.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


  정말로 내가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세상을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자신하기 어렵다.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미움의 언어에 길들어왔다. 분노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동안에만 시가 씌어졌고 증오의 대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나는 나의 말로부터 해방되고 싶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됐으면 싶다. 이제 길을 나서기는 했는데 나와 내 말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