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최인훈(1936-, 함경북도 회령)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2:07

최인훈(1936-, 함경북도 회령)

 

 최인훈은 193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목재 상인의 4남 2년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회령북초등학교 입학했고 아홉 살 때 이곳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최인훈의 가족은 얼마 후 함경남도 원산으로 이주하였다. 그가 원산고등학교 이학년이던 해에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원산항에서 해군 함정을 타고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부산과 목포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목포고를 거쳐 피난 수도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에 입학하였지만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그만두고 말았다. 이 무렵 그는 아버지가 지어준 '바라크'에서 혼자 살며 멀리 두고 온 고향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 <두만강>의 초고를 쓰기도 했다. 1957년에 대학을 그만두자마나 곧 군대에 입대한 그는 전방과 후방에서 통역 장교, 정훈 장교, 보도 장교로서 무려 칠 년 동안 군에서 복무하였다.

 그는 나의 군대 생활을 돌이켜보면, 어떤 의미에서 참다운 의미의 '나의 대학'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통역이나 정훈 또는 보도 등의 업무를 주로 맡는 바람에 그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에 비교적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1959년에 <그레이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이 <자유문학>지에 추천되어 그가 문단에 정식 데뷔한 것도 군대 생활을 하고 있을 때이었다는 사실로 보아 군대 생활을 통하여 삶의 경험을 쌓았던 것 같다. 그리고 군에 몸담고 있는 동안 그는 4·19 학생 혁명과 5·16 군사 혁명을 겪었다. 더욱이 민간 생활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군대라는 조직 생활에서 최인훈은 갖가지 사람들을 만나고 상황에 부딪히기도 하였다.  한 대담에서 그는 1960년까지 남한에서 상당히 극적인 생활 경험을 가졌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최인훈은 격동과 시련의 역사적 전환기에 살면서 현대사를 몸소 체험하였다. 그는 일본 식민지 시대의 군국주의 사회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소년 시절에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보냈으며,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청년기 이후를 보냈던 것이다. 특히 북한과 남한에서 살면서 최인훈은 남쪽과 북쪽의 이념적 실체를 잇달아 체험하였다.

 그의 체험은 남한과 북한의 이념을 단순히 책을 통하여 관념적으로 경험하거나 간접적으로 경험한 작가들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북한에서의 경험이 <광장>이라는 소설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4·19가 일어난 지 6개월 뒤인 1960년 10월에 발표된 <광장>은 4월혁명의 문학적 적자라 이를 만했다. 이 점에 대하여 최인훈은 한 대담에서 "내가 해방 후에 이북에서 넘어왔기 때문에 이북의 정치 체제를 그나마 경험했고, 또 1960년까지 남한에서 상당히 극적인 생활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압축해서 작품을 하나 써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다가 내놓은 것이 그 작품이지요." 하고 말한 적이 있다.

동리 류의 무시간적 토속성이 아니면 장용학의 관념과잉, 또는 손창섭의 자연주의적 현실비판의 지배 아래 있던 당시 소설 풍토에서 지적 깊이와 세련된 감각을 아울러 갖춘 <광장>의 출현은 문학에서의 4월혁명과도 같았다. 무엇보다도 북진통일론만을 인정하던 지배 이데올로기의 틀을 벗어나 남과 북의 체제를 비교적 공정하고도 객관적으로 평가한 대목은 `혁명'이 열어놓은 자유의 숨구멍으로 해서 가능했었다. 물론, 작가가 밀실과 광장이라는 개념을 먼저 상정한 다음 남과 북의 현실을 그에 꿰어맞추었다는 식의 비판으로부터 무한정 자유롭지는 않지만, <광장>이 거둔 성과는 그같은 비판의 날을 한결 무디게 한다.

 작가로 확고한 위치를 굳힌 다음 1973년에 미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 아이오아 대학의 '세계 작가 프로그램'에 참가하였다. 미국에 사는 동안 작가는 무엇보다도 모국어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느겼던 것 같다고 한다.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 가진 대담에서 그는 "우리말의 성(城)에 아름다운 돌 하나라도 더 보내는 것, 이것이 내 삶의 공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그는 첫 번째 희곡 작품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어이>를 집필하는 일 말고도 <광장>을 고쳐쓰는 일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실제로 <광장>은 다섯 번 이상 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l

미국에서 사 년 가까이 머물다가 1976년에서야 귀국하여 곧 서울예술전문대학의 문예창작과 교수로 부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원산에서 해군 함정을 타고 남쪽으로 월남한 경험은 최인훈에게 큰 영향을 끼친 듯하다. 이 경험은 그에게 가히 '정신적 외상'이라고 할 만큼 무척 큰 충격을 안겨주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배를 타고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왔다는 것 이상의 큰 뜻을 지니고 있다. 해군 함정 한 척에 조그마한 읍내 전체를 옮겨다놓은 것만큼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굉장한 정신적 부담을 안겨준 것이 사실"이었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이렇듯 해군 함정을 타고 탈출하다시피 북한을 빠져나온 최인훈은 남한에 살면서도 끝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남한에 사는 동안 줄곧 그는 피난민이라는 의식 때문에 그는 정신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부모를 비롯한 집안 식구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 가고 남한에 혼자 남아 있는 최인훈은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1994년 작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자전적인 장편소설 <화두>를 작가가 발표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