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최치원(857-?, 경주)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2:19

최치원(857-?, 경주)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시조로 유학과 불교에 두루 해박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평가받는다.

  최치원의 어머니는 그를 밴지 4개월만에 금 돼지에 납치되었다가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나서야 그를 낳게 된다. 최치원의 아버지가 갓난아기를 무인도에 버렸으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에 의해서 길러졌으며 그 후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설화가 있다.

 최치원은 신동(神童)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나, 신라에서는 골품제도의 굴레에 매여 뜻을 펼칠 수가 없었다. 결국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탔다. 그리고 만 6년의 세월이 흘러 18세의 젊은 나이에 드디어 과거(빈공과)에 급제하는 영광을 안으니 신라 경문왕 14년, (A.D.874)의 일이다.

 그 후 당에서 벼슬길에 올라 직책에 따라 여기 저기 옮기다가 마침 황소의 난을 당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고변(高騈)을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에 임명하여 전국의 병마를 총지휘하게 했다. 평소에 최치원의 학문이 뛰어난 것을 알고 있던 고변은 최치원을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서기의 책임을 맡겼다. 이때, 최치원이 황소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전국의 장수들에게 궐기를 촉구하는〈토황소격 討黃巢檄>을 썼는데 격문의 대표적 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과 저서는 당서예문지(唐書藝文志)에도 실렸는데 당나라 학자 아닌 사람의 이름이 당서예문지에 실렸다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다. 당에서 그의 문학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인으로부터 대단한 기림도 받았다고는 하지만, 만당(晩唐)이 갖는 시대적 상황은 외국인으로서 그가 느낀 소외감을 상쇄시켜 주지 못했고, 그가 만족할 만한 관직도 주지 못했다. 그래서 신라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화려하게 귀국했으나 신라는 최치원과 같은 육두품의 학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어 있지 못했다. 그는 결국 신라왕실과 진골 세력사이에 일어난 권력 투쟁의 틈바구니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직책들도 남을 대신하여 문서를 찬술하는 한림(翰林)이나 지방태수와 같은 것에 국한되었다. 그는 자신의 경륜을 펴고자 했으나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질시와 견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지방의 수령으로 전전하던 최치원은 진성여왕 8년에 시무책(時務策) 10여조를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10여년 동안 중앙의 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하였던 것이다.

 결국, 최치원은 관직을 버리고 산수를 벗삼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의 발자취는 전국의 명산에 미쳤으며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유적이 전하고 있는 곳만 해도 경주의 상서장(上書莊), 독서당(讀書堂)을 비롯해서 가야산의 여러 유적, 동래의 해운대, 협주(陜州)의 청량사, 마산의 월영대(月影台), 함양의 학사루, 의성의 고운사(孤雲寺), 지리산의 쌍계사(雙溪寺) 등이 있다. 마지막엔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후인은 "때와 더불어 맞지 아니하고 운명이 재주와 더불어 합하지 못했다"고 그를 평가하였다.

최치원의 이같은 삶의 궤적을 김부식은 <최치원전>에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치원은 스스로 중국에 유학하여 얻은 것이 많았는데 고국에 돌아와서 장차 자기의 포부를 펴려 하였으나 말세라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능히 용납되지 못하고 외직에 나가 대산구(太山郡) 태수가 되었다. <중략> 치원이 서쪽으로 가서 당을 섬기고 동으로 고국에 돌아옴에 매번 난세를 만나 가는 길이 평탄치 못하였고, 움직이면 허물만 생기므로 불우한 신세를 슬퍼한 나머지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산림과 강해에 스스로 방랑하고 소요하며 집을 지어 송죽을 심고 서사에 파묻혀 풍월을 노래하였다. 이를테면 경주의 남산, 강주의 빙산, 합주의 청량사, 지리산의 쌍계사, 합포현의 별장과 같은 곳이 다 그가 놀던 곳이다. 최후에는 집안 권속을 대동하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동복 형인 승려 현준(賢俊), 승려 정현(定玄)과 더불어 도우를 맺고 자유로운 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위의 예문에서 보듯이 최치원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많은 괴리를 느꼈을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누구에게서나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최치원처럼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진 인물이 현실에서 소외될 때 이런 갈등의 폭은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라말기의 왕실과 정치체제는 최치원을 포용하기에는 너무나 경직되어 있었고, 그 자신도 자기에게 쏟아진 비난과 내면적 갈등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서 최치원은 유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한계를 절감하고 입산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사찰은 이상적인 공간이었고 동경의 장소였지만, 현실에서 추방되고 꿈이 좌절된 상태에서 할 수 없이 숨어든 자연은 이상적인 공간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등하는 시적 자아가 <題伽倻山讀書堂 가야산 독서당을 노래하다>이란 시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狂奔疊石吼重巒 미친 듯 바위 사이를 내달아 산을 울리니

人語難分咫尺間 가까이에서도 사람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구나

常恐是非聲到耳 항상 시비하는 소리가 귀에 이를까 두려워하여

故敎流水盡籠山 흘러가는 물로 하여금 온 산을 감싸버렸네

<동문선 19권, 題伽倻山讀書堂 가야산 독서당을 노래하다>

 

세상 사람들이 시비하는 소리를 듣다못해 자신의 귀를 막다가, 아예 폭포수로 온산을 감싸게 했다는 표현은 신라 사회에 동화되지 못한 비운의 지식인이 토해내는 피맺힌 절규였고, 신라에 대한 애끊는 애정의 역설적 표현이었다. 등선시로 불리는 이 시는 한 시대를 선도해 갈 사람이 역사의 뒷자락으로 사라지는 아픔과 과정을 보여준 작품이며, 사회에 대한 극단적인 불평을 예술로 승화시킨 걸작이다.

 <최치원전>에 의하면 최치원은 급기야 고려 왕건(王建)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실제 왕건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그가 송악(松岳)지방에서 새로 대두하고 있던 왕건세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최치원은 신라와 고려, 그 어느 편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사회적인 전환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은거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또한 당시 신라사회의 모순에 고민했지만 농민봉기를 강하게 부정하였다. 어진 임금을 기대하였지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력봉기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어쨌든 역사적 현실에 대한 최치원의 고민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문인(門人)들이 대거 고려정권에 참가하여 신흥고려의 새로운 정치질서·사회질서의 수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의 현종(顯宗)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하고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문묘에 향사케 했다.

 오늘날 전하는 최치원의 저서에는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정도 뿐이고, 문집 외에 소위 사산비명(四山碑銘)으로 불려지는 쌍계사 진감대사비명, 성주사 양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 봉암사 지증대사숙조탑비명, 그리고 경주 숭복사비명 등이 있다. 이들 비명은 불교와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최치원은 조선시대에만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 함양(咸陽)의 백연서원(栢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청도의 최고운 영정각(崔孤雲 影幀閣)등에 제향되는 유명세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