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 1945-, 서울)
서울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해서 1958년 서울중학과 1961년 서울고교를 거쳐 1964년 연세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1972년에 졸업했다.
최인호는 서울고 2학년 재학중이던 열여덟살 때(1963)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벽구멍으로」로 당선작 없는 가작입선을 했다. 수상식장에 나타난 교복 차림의 최인호를 보고서야
그가 고등학생임을 알게 된 신문사 측은 그의 이름만 내고 작품은 게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한국일보 화재 때 작품이 소실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후 주요 문예지에 글을 게재하던 최인호는 스물 일곱 되던 1972년 『별들의 고향』을 조선일보에 연재함으로써 최연소 신문연재 소설가로 기록되었다. 원래 제목은 `별들의 무덤`이었으나 신문사측에서 `조간신문에 아침부터 무슨 무덤이냐`며 일방적으로 `고향'으로 바꿔 버렸다고 한다. 이 글이 나오자 당시 전국의 술집 아가씨들이 너도 나도 가명을 `경아'로 고쳤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73년 예문관에서 상하권으로 나온 『별들의 고향』은 출판되자마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00만부가 팔려 나갔으며, 작가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책 뒤표지 전체를 최인호의 얼굴사진으로 채웠다. 책 표지에 작가 사진이 게재된 최초의 사례였다.
최인호는 영화화된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작가이기도 하다. 『적도의 꽃』, 『고래사냥』, 『별들의 고향』, 『깊고 푸른 밤』, 『겨울여자』 등 흥행에 성공한 작품만도 20여편이나 된다. 드라마『해신』, 『상도』 등도 드라마화 되어 인기를 끌었다.
한국 최초의 본격 대중작가로 기록된 최인호는 한 달이면 천여장씩 쓰는 다작을 기록하다가, 때로는 쉼표 삼아 몇 년씩 쉬기도 하면서숱한 베스트셀러를 양산해 왔다.
소설이라는 숭고한 문학양식을 상업거리로 삼는다는 악평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깊고 넓은 편이다. 무엇에 미치기를 잘 하는 타고난 `재능` 덕분에 다양한 소재의 글들을 잘 소화해 냈다. 80년대 말엔 법륭사 벽화를 보고 충격을 받아 백제에 푹 빠져 『왕도의 비밀』을 창작했고, 조선시대 실존인물인 한국 불교 선맥의 거봉 경허를 주인공으로 『길 없는 길』을 써냈다. 90년대 중반엔 고구려에 미쳐 광개토대왕을 주인공으로 한 5부작 『잃어버린 왕국』을 발간하기도 했다.
열애 끝에 결혼한 부인과 딸 다혜, 아들 도단이 사랑하는 그의 가족이다. 『겨울 나그네』에서는 딸과 같은 이름의 여 주인공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1987년 가톨릭에 귀의했으며, 1994년 교통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아래는 임철순의 글을 줄인 것이다.
[소설가 최인호 씨가 최근 <가족 앞모습>과 <가족 뒷모습>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가족>은 그가 1975년 9월부터 34년간 월간 <샘터>에 연재해온 연작소설의 제목입니다. 2009년 8월호로 400회를 맞는데, 320회까지의 연재분을 7권의 단행본으로 낸 데 이어 이번에 8, 9권째를 냈습니다. 고교 2학년이던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벽 구멍으로>가 당선작 없는 가작 입선함으로써 작가로 데뷔한 그의 작품 중 가장 긴 대하소설이 <가족>입니다. 이미 원고지 8,000장 분량으로 국내 잡지 최장 연재 기록을 세운 이 소설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가족이 있는 한 쓸 이야기는 많습니다. 아마도 최씨 자신의 말처럼 작가가 죽는 날까지 소설은 계속될 것입니다.
단행본의 머리말에는 “400회의 인생행로를 통해서 만나고 스쳐갔던 사람들, 함께 걷고 있는 수많은 이웃들, 앞으로도 만나게 될 나그네들 모두가 한 가족임을 깨달은 요즘 나는 그 모든 소중한 인연들과 삼라와 만상을 향해 고맙다는 사랑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씌어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침샘암에 걸린 최씨는 수술과 투병으로 2008년 8월부터 2009년 2월까지 7개월 동안 연재를 중단한 바 있습니다. 지난해 7월, 두 번째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김수환 추기경이 같은 병동에 누워 있는 것을 알고 많은 용기와 위안을 얻었다고 합니다. 올해 2월 김 추기경 선종 소식을 들었을 때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1주일 내내 울었다고 합니다. 새로 생을 얻은 사람의 눈에 이 세상과 가족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1994년에도 교통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일이 있지만, 49세에 마주친 죽음과 환갑도 지나 마주친 죽음은 그 깊이와 의미가 많이 다를 것입니다.
최씨는 1987년 가톨릭에 귀의해 베드로를 본명으로 받았으나 스스로 불교적 가톨릭 신자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가족> 397회 ‘나의 게쎄마니 동산’이라는 글에서 “80년대 후반 가톨릭에 입교해 영세 받고 한 2년간 붓을 놓은 적이 있는데 鏡虛(경허)의 선시 중 ‘일 없음이 오히려 내가 할 일(無事猶成事)’이라는 구절에서 한 방망이 후려 맞고 불교에 심취하게 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상록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 구도소설 <길 없는 길> 등을 쓴 것도 불교의 영향입니다. “내 정신의 아버지가 가톨릭이라면 내 영혼의 어머니는 불교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불교적 가톨릭 신자’라고 자신을 부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를 만나서 안 것은 15년쯤 됩니다. 만날 때마다 유쾌했고, 그가 귀엽다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귀엽다는 느낌은 나이가 많고 적음과 관계없는 감정이니 그렇게 말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실수나 방황에 대해 화제가 미치면 “전생의 일은 이야기하지 맙시다. 하하하” 하고 웃는 것도 좋아 보였고, 키가 작은 사람이 굵은 시가를 입에 물고 폼을 잡는 것도 그럴 듯했습니다. 특히 40여년 간 글을 쓰면서 문단이나 문단의 일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는 세상이 다 알아주는 악필입니다. 신문에 소설을 연재할 때는 교열부에 먼저 찾아가 폐를 끼치겠다는 인사를 할 만큼 그의 글씨는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몇 번 책을 받은 일이 있는데, 그가 책에 써 준 글씨는 아무리 뜯어 봐도 ‘임철순님’이 아니라 ‘임철순놈’입니다. 그것도 재미있습니다. 이 컴퓨터와 인터넷시대에도 여전히 육필을 고집하는 것은 남들에게 불편한 일이지만, 컴퓨터로 자판을 두드려 써낸 원고는 왠지 독창적이지 않고 성형수술을 한 느낌이 들어서 싫다니 그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앞으로 자신의 죽음까지도 잘 기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글을 쓰면서 어느 정도까지 솔직하고 정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죽음을 냉정하게 쓸 수 있다면, 바꿔 말해 자기 삶의 완성을 냉철하게 기록해 남길 수 있다면 무엇보다 더 행복한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원로 평론가는 최인호와 유명작가 L씨를 비교하면서 “최인호는 본 라이터(born writer)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L씨가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작가인 것과 달리 최인호는 본 라이터, 타고난 작가라는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타고난 작가의 건필을, 문자 그대로 건필(健筆)을 기원합니다. 그의 글의 향기가 저절로 사람들의 옷깃에 스며 너울너울 나비처럼 따라가게 만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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