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최남선(1890-1957, 서울)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2:20

최남선(1890-1957, 서울)


 최남선은 1890년 4월 26일 당시 지명으로 경성부 삼각정 21번지(현재의 중구 을지로 2가 22번지)에서 출생했다. 육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최헌규는 조선 중기부터 중인계급에 속한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로 10세때부터 한약방에서 한의학을 익힌 사람이다. 최헌규는 을지로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며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세간에서는 그의 집이 조선 왕실보다 더 많은 현금을 굴릴 수 있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최헌규는 일찍부터 상투를 자르고 실크모자에 흰장갑을 낀 손으로 상아단장을 휘두르며 거리를 활보했던 개화인물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여유로 최남선은 어릴 때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어린 최남선의 놀이터가 선교사 애비슨이 경영하는 제중원(후일의 세브란스 병원) 옆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서양책을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며 한성순보나 독립신문 등도 늘 접할 수 있었다. 개화사상의 한복판에서 성장하였던 그는 12살 때 관례에 따라 결혼을 하였으며, 이 무렵 이미 문장가로서 신문에 논설을 투고하기 시작하였다. 1902년 열세살 되던 해에는 서당 공부를 중단하고 일본인이 서울에 세운 일어학교 경성학당에 입학하였다

 춘원이 10세 때부터 고아가 되어 고학을 하며 타고난 비상한 머리 하나로 세파를 헤치며 고단한 삶을 살았던 데 반해 육당은 풍족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며 어린시절부터 그 천재성을 발휘했다.

 조선 3대 천재로 일컬어졌던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는 일찍이 10대 때부터 교유했다. 춘원 이광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하루는 홍명희군이 오라고 하기에 가 보니 검은 청년 하나를 내게 소개하는데 그가 최남선이었습니다. 그는 와세다대학 예과를 버리고 文章報國(문장보국)을 목적으로 경성에 돌아가 「소년」이란 잡지를 발행하기로 하였으니 나더러도 집필하라고 하였습니다』

 1906년 3월 와세다대학을 중퇴하고 한국 최초의 근대잡지인 「소년」지를 내기 위해 귀국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최남선은 홍명희의 소개로 이광수와 만난다. 그때 홍명희가 가장 연장자로 19세였고, 최남선은 17세, 이광수는 15세로 대성중학에 재학중이었다.

 최남선은 1904년 고관 자제들을 중심으로 50명을 뽑는 국비일본유학생 시험에 응시생중 최연소이면서도 최고점으로 합격하여 일본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최남선은 석달만에 모친이 위독하다는 핑계를 대고 서울로 돌아와버렸다.

 17세때 「황성신문」에 투고한 반일 성격의 글이 문제가 되어 잠시 구속되었다가 풀려나온 최남선은 재유학을 결심하고 1906년 4월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 지리역사과에 입학했다. 최남선은 재유학 온 지 석달만에 또다시 학업을 중단하고, 이후로 어떤 정규교육도 받지 않았다. 그의 다방면에 걸친 방대하고 해박한 지식은 거의 독학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유학에서 돌아올 때, 최남선은 도쿄에서 제일 큰 인쇄소인 秀英社(수영사)에서 인쇄기 주조기 자모를 구입하고 2명의 인쇄공을 대동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906년 겨울이다. 옷보시곶이(현재의 을지로 2가)에 이층집을 세내 아래층은 공장을, 이층에는 편집실을 차리고 新文館(신문관)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1908년 11월에 한국 최초의 현대시로 평가되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실린 한국 근대잡지의 효시인 「소년」창간호가 여기서 만들어진다. 불과 17세이던 최남선은 잡지명을 의도적으로 「소년」으로 택하여, 조국의 희망과 새 시대의 상징으로서 소년이 나아가야 할 지표를 설정하였다.

 「소년」지는 발간되자마자 큰 인기를 얻었다. 매호 2천부에서 2천5백부를 찍었는데 자주 매진되었고, 여러 학교에서는 교과서 대용으로 쓰기도 했다.

 키가 크고 골격이 장대하며 몸집도 비대한 편이었던 최남선은 「소년」지의 원고를 도맡아 쓸 뿐만 아니라 캡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종이 흥정, 인쇄기계 부속구입, 소설삽화 독촉, 잡지대 수금을 혼자 도맡아 처리했다.

 『그는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먹고 연애생활은 물론이거니와 노는 계집을 희롱한 일도 없었고, 무슨 운동경기나 유희나 연극 활동사진 바둑 장기화투 같은 오락물에 취했던 일도 없고, 몸을 단장하거나 맛나는 음식을 구한 일도 없고, 심지어 문학이나 미술에 미친 일도 없이 20년간의 세월을 잡지와 고서간행과 조선역사 연구, 일언이폐지하면 조선주의를 위하여 희생한 것이다』라고 춘원은 최남선에 대해 평가하고 있다. 최남선의 유일한 취미라면 고서수집이었다. 효제동에서 우이동 으로 이사할 때 소달구지로 장서를 옮기는 데 사흘이나 걸렸다고 하며, 그 장서가 무려 17여만권에 달했다. 그중 상당수가 6.25때 불타고 일부는 고려대학교에 기증되었다.

 양주동이 소개한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어느날 최남선의 집을 방문했더니 그 서재의 어마어마함에 우선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더랍니다. 호방한 최남선이 그때 양주동에게 화장실에 다녀올 동안 갖고 싶은 책 한 권만 골라 가지라고 말했답니다. 급히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이 사람이 혹시 그 책을 가져가면 곤란할텐데” 하면서 와보니 최남선이 가장 아끼던 바로 그 향가책 한권 달랑 들고 벌써 없어졌더랍니다.


 최남선이 보여준 대표적인 민족적 면모는 그가 3.1의거 때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사실이다. 그는 이 일로 31개월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받은 건국훈장을 받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친일 행적 때문이다.

 최남선이 친일대열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것은 1928년 10월 총독부의 역사왜곡기관인 조선사편수회의 편수위원직을 수락하면서부터다. 조선사편수회는 1911년 총독부가 구습(舊習)제도의 조사와 조선사 편찬계획을 목표로 발족한  단체이지만, 본래 목적은 조선을 영구히 강점하기 위해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개조한다는 동화주의(同化主義)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 편찬하려는 조선사는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사 왜곡이 주목적이었다. 최남선은 편수위원으로 위원회 활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실무자로 직접 편찬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총독부가 위촉하는 여러가지 위원직을 수락하면사 일제에 협조했는데 이 공로로 그는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최남선의 대표적인 친일행적중의 하나는 만주에서 있었다. 중추원 참의를 물러난 직후인 1938년 4월 그는 만주행에 올랐다. 처음 맡은 직책은 만주의 친일지 만몽일보(滿蒙日報)의 고문자리였다. 1년 뒤 그는 다시 만주국의 엘리트 양성기관인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로 부임하였다.

 사학자로 육당과는 절친한 친구였던 위당(爲堂) 정인보 선생이 그의 집 대문 앞에  술을 부어놓고 이제 우리 육당이 죽고야 말았다며 대성통곡을  한 것은 그가 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한 것을 두고 한 것이었다. 육당은 이 대학예과에서 만몽(滿蒙)문화사를 강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건국대학 교수 재직중 그는 1940년 10월에 조직된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본부의 고문직을 맡기도 했다. 이 단체는 일본 관동군을 지원한 친일단체로 독립군과 항일빨치산을 상대로 한 귀순공작이 주임무였다.

 최남선 친일은 일제 말기까지 계속됐다. 4년 7개월간의 만주생활을 청산하고 1942년 11월 귀국한 그는 칩거하면서 집필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이듬해말 총독부의 부탁으로 이광수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유학생들을 상대로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일제의 필승을 장담하면서 대일본제국의 성전(聖戰)을 위해 조선청년들이 전쟁터로 나가 죽어야 한다고 공언했다.

 49년 1월 초부터 반민족행위자 검거에 나선 반민특위는 2월 들어 문화계 인사를 손대기 시작했다. 2월 7일 마침내 최남선의 우이동 집에 특위 조사관들이 들이닥쳤다. 자택에서 조선역사사전의 원고를 집필중이던 그는 시대적 현실을 역행할 수 없다며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같은 날 세검정에서는 춘원 이광수가 체포됐다. 일제하 문화계의 양대 거물이었던 두 사람이 역사법정에 끌려나온 것이다.

 말년에 당뇨병과 중풍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육당은 1957년 10월 10일 오후 5시 종로구 묘동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육당 최남선은 춘원 이광수와 함께 개화․계몽시대에 「2인문단시대」를 이루며, 한국 근대문학의 서장을 연 문학가이자 국내 최초의 근대잡지와 신체시를 제작한 선구자이다. 또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문화운동을 펼쳤던 계몽운동가이자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의 빛나는 업적 뒤에는 일제 강점기의 친일 행각이라는 치부가 숨어 있다. 그의 업적들이 뿜어내는 광채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하며 학병입대를 권유하는 등의 지울 수 없는 오욕의 행로로 말미암아 친일 문학가, 혹은 맹목적 근대지상주의자라는 폄하 속에 그 빛이 반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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