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피천득(1910- 2007, 서울)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2:22

피천득(1910- 2007, 서울)

 

 피천득씨는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상해로 유학을 떠나 상해 호강대학 영문학과를 1937년에 졸업하였으며,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한 것은 <서정소곡>(신동아)이었다. 피천득 씨는 일제강점기 때 경성중앙산업학원 교사로 근무했고, 8·15광복 직후인 194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교수를 거쳐 1946~1974년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아래는 백혜선의 글을 줄인 것이다.

 [영문학자이자 시인, 수필가로 평생을 살아온 금아 피천득 선생. 17년째 저층 아파트에서 검박한 삶을 이어오고 있는 그가 구순을 맞았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없을 땐 쓰지 말아야 한다’는 고졸한 자존심을 지킨 그의 삶은 ‘청자 연적이고 난이고 학’인 수필 그대로다.

‘그리워 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 서른을 넘긴 사람이라면 교과서에 실렸던 이 글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한평생을 물 흐르듯이 맑고 조용하게 지내온 금아 피천득 선생이 지난 5월 구순잔치를 했다. 평소 생일 잔치마저 번잡하다고 피하던 선생은 1백50여명의 제자와 친지, 지인을 초대했다. 그 자리에는 평소 그를 따르던 조정래, 최인호 등 문단 후배들과 아끼던 제자들인 김우창 교수, 심명호 교수, 그리고 지인인 김재순 전국회의장 등이 참석했다. 그가 너무나 사랑하는 딸 ‘서영’만은 아들의 중학교 입학 관계로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었다. 선생은 그 자리에서 “정직하고 숨김없는 인간으로 인생의 끝을 맺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왔다. 오늘은 여러분을 뵙게 되는 사실상 페어웰(작별) 파티로 여기고 있다”고 인사말을 남겼다.

 선생이 몸담고 있는 아파트는 세간 없이 조촐하다. 옆집에서 시끄러워 할까봐 벽에 걸지 않고 기대놓은 액자 몇 점과 화분 여섯 개가 보인다. 흔한 소파 하나 두지 않은 거실에는 낡은 교자상과 손님을 반기는 방석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들고 간 소국 한다발을 전해드리니, “뭘 이런 걸 다…”라고 사양하면서도 낯선 손님을 대하느라 굳었던 표정이 환하게 풀린다.

“여성동아라고 했나? 옛날엔 신가정이라고 여성지가 아니라, 문예지였어요. 화동이라고 옛 경기중학교 자리에 사옥이 있었거든? 광화문 이사오기 전에 말이야. 기와집 모양의 사옥인데 기둥엔 전화기가 달려 있었다고. 그때만 해도 조선총독부 정무국 도서과에서 언론을 제약했었던 때였어. 삭제하고 정간하고 폐간하고 그랬었지….”

 왜소한 체구와 검버섯이 핀 얼굴, 하얗게 눈이 내린 머리카락…. 선생의 외모는 비록 노쇠했지만 동아일보와의 인연을 떠올리는 기억력만은 젊은 기자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또렷했다.

“춘원 이광수가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당시 경성고보 다니던 나를 집에 들였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데다가 문재(文才)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말이야. 전화가 내 방에 있었는데, 밤마다 기자들이 전화로 국장을 찾곤 했지. 검열에 걸려서 총독부가 윤전기를 세우라고 한다고 말이야.”

 이것저것 동아일보에 대해 물어보시던 선생은 기자가 아는 게 없어서 무안해하자 “하긴 요즘 젊은이들이 다 그렇지. 과거에 대해서 너무 몰라요”하고 부드럽게 짚고 넘어가주었다.

“가장 좋은 기억? 물론 해방되었을 때지.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을 만큼 그 감격은 말로 못하지. 가장 나빴던 건, 내겐 이게 한인데… 흠모하던 도산 선생이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국으로 압송되셨어. 결국 순국을 하셨는데, 내가 일경의 눈이 무서워 그 장례식에 못 가고 전봇대 뒤에 숨어서 그 분 마지막을 지켜본 거지. 부끄럽고 한이 돼.  그래도 오래 사니까 좋은 일도 많고…. 오래 사는 비결이랄 게 뭐 있나? 모든 것에 욕심 부리지 않고 조용히 사는 거 뿐이지. 아, 내가 소식을 하거든? 그게 오래 사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같아. 체질이 그런지 채식이 좋고….”

 선생은 새벽 6시면 일어나 신문을 보고 토스트 두어 조각으로 간단히 식사를 한 후 늘 산보를 한다. 하루 일과의 대부분은 음악을 듣는 데 쓰인다. 바흐부터 브람스까지 5시간 이상 듣는데, 베토벤을 제일 좋아하고 슈베르트와 브람스 같은 낭만주의 곡들을 특히 좋아한다고 한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곡들이 참 좋고 바이올린은 안네 소피 무터가 연주하는 걸 즐겨 듣는다고. 이렇게 음악 듣는 시간 외에는 책을 보는 것을 즐긴다.

“글도 조금 쓰지만 글 쓰는 것은 현역이 아니고 아직 글 읽는 것은 현역이야. 정확히 말하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들어요. 책을 읽자면 눈이 아프지만 듣는 건 괜찮거든. 주로 오디오북(책을 읽어 녹음한 테이프나 CD)으로 듣는데 외국에서 사온 셰익스피어나 예이츠, 바이런 등 명작들을 주로 듣지. 그 외에 본인 목소리로 녹음해서 보내주는 후배 문인들 시도 많이 들어.”

 선생이 좋아하는 시는 워즈워드, 키츠, 셸리, 바이런과 같은 낭만파 시인들의 것이 많다. 그가 펴낸 번역시선 <내가 사랑하는 시>에 실린 시들도 대부분 그들의 작품이다.

 선생의 딸 사랑은 잘 알려져 있다. 오죽하면 수필집의 한 장을 ‘서영이’라는 이름으로 붙여 딸에 대한 여러 글을 모아 꾸몄을까? ‘다른 사람이 없는 방안에서 내 귀에다 귓속말을 하는 서영이의 말소리를 좋아했고’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어했던’그 딸은 지금 미국 보스턴대의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어서 1년에 한 번, 그것도 이주일 정도 밖에 같이 있을 수 없다.

 대신 선생은 딸 서영씨가 유학을 떠나자 그가 하버드대 연구교수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딸을 위해 사온 서양인형에 ‘난영’이란 이름을 붙이고 45년간 친딸을 기르듯이 돌봐왔다.

 “우리 딸이 가지고 놀던 건데 다른 사람이 보면 좀 해괴하다 할지 모르지만 내겐 이런 면이 있지.”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앉혀놓고 주무시기 전엔 비단 이불 위에 뉘어주세요”라는 며느리의 귀띔대로 늘 씻어주고 머리 빗겨주고 일주일에 한 번 목욕시켜주고 철따라 옷을 갈아입힌다는 난영이는 세월의 때가 묻지 않은 ‘귀여운 아이의 모습’ 그대로 금아 선생을 따라 침실에서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난다.

 “내가 우리 자식들한테 미안한 게 있어. 우리 둘째 아들놈이 나한테 참 잘하는데 난 키우면서 딸만 이쁘다 하고 그랬거든? 어떻게 보면 후회 돼. 그래도 난 딸이 좋아.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손자가 다섯인데 전부 사내놈들이야.”

 피씨는 2남 1녀를 뒀다. 60~70년대 성우로 유명한 큰 아들 세영이 캐나다에서 치과기공소를 운영하고 있고, 둘째 아들 수영은 서울중앙병원 소아과 의사로 있고, 앞서 말했듯이 서영은 현재 미국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큰 아들 세영씨는 ‘아버지 험담’으로 구순을 회고해서 잔치를 웃음바다로 만들었었다. 세영씨는 “아버지는 부친으로서는 빵점이었다”고 말하면서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로 시작하는 아버지의 글 <수필>의 작가가 누구냐라는 시험에서 김소월이라고 적어 핀잔을 듣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부자지간을 회고했던 것.

 선생은 근 20여 년간 글을 쓰지 않았다. 스무 살 갓 넘어 <서정별곡> <파이프> 등을 쓰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니 ‘육신의 나이 아흔, 문학의 나이 칠순’이라는 말대로 70년에 이르는 문필사다. 왜 글을 쓰지 않으시냐고 여쭈었다.

 “나이를 먹으니까 더 좋은 작품이 써지지 않아. 글 쓰는 사람들을 보면 어느 시점에서는 그 레벨에서 멈춰요. 더 나은 글을 쓸 수 없으면 쓰지 말아야 해. 사일런스 앤드 살롱(silence and salon)이라는 영국 속담을 알아? 떠들거나 아예 침묵하라는 거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쏟아지는 상업적인 글에 대한 ‘대가’다운 일갈이면서 세월이 흘렀어도 무뎌지지 않는 오롯한 자존심이 느껴지는 금언이었다.

그의 수필 <장수>를 보면 아름다운 기억을 많이 가진 사람은 짧게 살았어도 행복하고, 그런 기억이 없는 사람은 80을 살아도 단명한다고 한다. 인간은 추억을 되새김질하면서 오늘을 다시 산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보물을 잊고 사는 듯해 안타깝다고. 그러면서 그는 아름다운 기억을 많이 간직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욕심버리기’를 말한다.

“유럽 여행만 해도 그래. 미술관을 간다고 쳐. 그림 몇 점이라도 찬찬히 보면서 그걸 내 기억속에 담아두고 싶은데 이리로 가자, 저리로 가라 너무 정신이 없잖아. 그렇게 해서는 느낌을 가질 수 없어요. 욕심을 버리고 사는 느릿느릿한 삶이 어쩌면 더 많은 소득을 얻는 것인지도 몰라요.”

 금아 선생은 남부 유럽은 많이 둘러봤는데 북유럽은 가지 못했다며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와 같은 나라를 시간이 되면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물론 사람들이 다 나같이 살 수는 없을 거예요. 난 소박하게 사는 게 좋았고 남에게 해 끼치지 않는 걸 바랐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이 불가피하기는 하겠지만 남을 누르고 일어서는 경쟁심은 자신을 편하게 하지 않아.”

남들이 경쟁적으로 미친 듯이 질주할 때도 선생은 ‘젖은 볏짚이 타는 듯’ 뭉근하게 세월을 보냈다. 제 할 일을 다하며 조용히 사는 청빈과 무욕으로 일관한 삶이었다. 선생의 수필 <플루트 연주자>의 자세가 떠오른다.

 ‘어렸을 때 나는 공책에 줄치는 작은 자로 교향악단을 지휘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지휘자가 되겠다고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토스카니니가 아니라도 어떤 존경받는 지휘자 밑에서 무명의 플루트 연주가가 되고 싶은 때는 가끔 있었다.’

선생이 일어서서 서가로 우리를 청하여 간다. 선생이 음악도 듣고 책을 읽는다는 서가는 한 평도 안되는 좁은 방이다. 유난히 사진이 많다. 예이츠, 워즈워드, 두보, 도연명과 같은 시인들의 얼굴이 손바닥 만한 액자에 들어 있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의 사진 두 장도 놓여 있다. 벽 아래에는 안네 소피 무터와 교향악단의 액자도 숨어있듯 세워져 있다.  

 “내가 이이를 퍽 좋아하지. 고상하고 매력이 있어요. 이 사진은 처녀적 건데, 이 사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퍽 드물 거야.” 잉그리드 버그만 사진을 두고 하는 선생의 자랑이 아이 같다.

 책상 위에는 대학 도서관에서 봄직한 낡은 장정본 서적과 손자들 사진, 연필통과 돋보기 안경 옆에 나무로 깎은 담배 파이프가 놓여 있다.

 “내 장난 같은 거야. 난 담배를 전혀 못 피우니까. 그래도 가끔 혼자 입에 물어보면서 놀지. 난 체질이 타고나기를 술 담배를 전혀 못해요. 한 잔만 마셔도 병원에 가야 할 정도니까. 난 술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하는데 참 아쉬워. 인생의 재미를 통 모르고 지냈는데 할 수 없지, 뭐.”

 선생에게는 팬이 참 많다. 문단 후배인 소설가 최인호씨는 “피천득 선생은 전생의 업도 없고 이승의 업도 없는,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하늘나라의 아이”라고 말하며, “그의 천진함이 여러 사람을 감화시켜왔다”고 전했다. 이해인 시인, ‘샘터’의 사장 김성구, 작가 박완서씨와 같은 이들은 다 선생의 인품에 감복한 이들.

 “멀리 독일에서 내 팬이라고 편지를 보내오는 이가 있어. 여잔데 마흔 쯤 됐을거야. 한 달에 한 통씩은 편지를 보내와요. 그런데 편지 봉투안에 자기 주소를 적은 봉투를 또 넣어서 보내는 거야. 나는 우표만 붙이면 되도록. 어때, 이게 다 그 편지들이야.”

서랍을 열어 편지 자랑을 하던 선생은 사진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고만 서랍을 탕 하고 닫아버린다. 선생의 밉지 않은 고집에 손녀 뻘인 기자는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선생에게 요즘 여성들에게 남기고픈 말을 부탁드렸다.

 “예부터 사회의 근간은 가정이랬지 않아요? 노력을 해서 어떻게든 가정만은 꼭 지켜야 해. 웬만한 건 서로 용서하고 그랬으면 좋겠어. 내가 마누라(임진호, 82·거동이 불편하시다)와 TV드라마 <불꽃>을 곧잘 봤는데 그 스토리가 그렇잖아. 두 커플이 다 일시적 실수는 했지만, 남편이나 그 아내가 서로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거든. 자식도 있었잖아. 나는 그래요. 나도 젊은 날을 생각해보면 잘못 한 거 많지만, 구순이 되도록 해로하고 살 수 있는 건, 서로가 잘 참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속에 있다 …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이 지금 가고 있다.’ (수필 <오월> 중에서)

 선생의 구순잔치 초대장에는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속에 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만년 소년’의 얼굴로 한평생을 살아온 피천득 선생의 얼굴이 문득 푸른 신록 속에 겹쳐진다].

 아래는 맹경환 기자의 기사 내용이다.

 [피천득 선생은 무엇보다 일본 도쿄에서 만난 문학 소녀 아사코와 수십년에 걸쳐 세 번 만난 인연을 소개한 수필 ‘인연’으로 기억된다.사회자 김영하씨가 아사코와의 세번째 만남이후 근황을 알고 있는지를 묻자 그는 “모른다”며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몇년전 KBS의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아사코를 찾아 피천득 선생을 출연시키려고 했었다는 것이다.그는 “찾으려고만 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텐데 데려다 만나면 서로에게 환멸을 느낄 것같아 만류시켰다”고 전했다.“아직도 아사코가 생각이 나느냐”는 질문에는 “뭐 연애한 건 아니니까”라면서도 “그래도 생각날 때도 아주 가끔은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사꼬와의 네 번째 만남이 준비되었다. 이수진 기자의 보도내용이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 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린 피천득(93)선생의 ‘인연…’을 기억하는 세대라면 ‘아사꼬’라는 이름에서 첫사랑의 설렘과 안타까움 을 떠올릴 법하다.

 29일 밤10시 방송되는 KBS1TV ‘책을 말하다’에서 피천득 선생 과 아사꼬의 네번째 만남이 공개된다. 제작진은 피천득 선생의 ‘인연’편을 준비하면서 일본에 건너가 아사꼬의 행방을 수소문 하다가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가 살고 있다는 소식만 전 해들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아사꼬의 성심여학원 초등학교, 중학교와 대학교 졸업사진을 입수했다. 이 사실을 모르던 피천득 선생은 녹화중에 아사꼬의 사진을 보고 “다시 보지 않겠다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지만 60년만에 젊은 아사꼬의 모습을 다시 보니 기쁘다”며 무척 반겼다.

구순의 나이에도 텔레비전을 보다 반한 배우들의 이름을 따로 수첩에 적어둔다는 피천득 선생은 월드컵 기간에는 내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지내 ‘늙은’제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날 방송에서 피천득 선생은 “일생을 한마디로 평해달라”는 제작진의 주문에 “그저 인생을 착하고 아름답게 살려고는 했는 데 과거 여러번 저항운동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한 걸음 나 가지 못하고 뒷골목으로 다니면서 한숨 쉰 것이 한이고 부끄럽다 ”고 말해 방청석을 숙연하게 하기도 했다.]

 “난 타고난 체질이 술 담배를 전혀 못해요. 이런 내 체질을 모르는 이가 언젠가 내가 마시는 오렌지쥬스에 술을 몰래 섞었어요. 그걸 마시고 병원에 실려갔지요. 난 술을 마시는 분위기를 참 좋아하는데, 너무 아쉬워요. 인생의 재미를 통 모르는거지요.”언젠가 피천득이 한 말이었다.

 아래는 피천득의 수필 <엄마> 중 일부분이다.

 [자다 가 눈을 떠보니 캄캄하였다. 나는 엄마를 부르면서 벽장문을 발길로 찼다. 엄마는 달려들어 나를 끌어안았다. 그때 엄마의 가슴이 왜 그렇게 뛰었는지 엄마의 팔이 왜 그렇게 떨렸는지 나는 몰랐었다.

 너를 잃은 줄 알고 엄마는 미친년 모양으로 돌아다녔다. 너는 왜 그리 엄마를 성화먹이니, 어쩌자고 너 혼자 온단 말이냐. 그리고 숨기까지 하니 너 하나 믿고 살아가는데 엄마는 아무래도 달아나야 되겠다. 나들이간 줄 알았던 엄마는 나를 찾으러 나갔던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그저 울었다.

 그 후 어떤 날 밤에 자다가 깨어보니 엄마는 아니자고 앉아 무엇을 하고 있었다. 나도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엄마 옆에 앉았다. 엄마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장롱에서 옷들을 꺼내더니 돌아가신 아빠 옷 한 벌에 엄마 옷 한 벌씩 짝을 맞춰 차곡차곡 집어넣고 내 옷은 따로 반닫이에 넣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슬퍼졌지만 엄마 품에 안겨서 잠이 들었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엄마는 아빠를 따라가고 말았다.

 엄마가 나의 엄마였다는 것은 내가 타고난 영광이었다. 엄마는 우아하고 청초한 여성이었다. 그는 서화에 능하고 거문고는 도(道)에 가까웠다고 한다. 내 기억으로는 그는 나에게나 남에게나 거짓말한 일이 없고, 거만하거나 비겁하거나 몰인정한 적이 없었다. 내게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서 받은 것이요. 내가 많은 결점을 지닌 것은 엄마를 일찍이 잃어 버려 그의 사랑 속에서 자라나지 못한 때문이다.(략)

 엄마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내 이름을 부른 것이었다. 나는 그 후 외지로 돌아다니느라고 엄마의 무덤까지 잃어버렸다. 다행히 그의 사진이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삼십 시대에 세상을 떠난 그는 언제나 젊고 아름답다. 내가 새 한 마리 죽이지 않고 살아온 것은 엄마의 자애로운 마음이요, 햇빛 속에 웃는 나의 미소는 엄마한테서 배운 웃음이다. 나는 엄마 아들답지 않은 때가 많으나 그래도 엄마의 아들이다.

 나는 엄마 같은 애인이 갖고 싶었다. 엄마 같은 아내를 얻고 싶었다. 이제 와서는 서영이나 아빠의 엄마 같은 여성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의 간절한 희망은 엄마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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