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함민복(1962- ,충북 중원군)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2:29

함민복(1962- ,충북 중원군)

 

 다음은 이문재의 글을 요약한 것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 161번지라는 이상한 행정구역. 강화읍에서 가장 먼 강화도 남쪽 끝자락, 해안선에 게딱지처럼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이 그의 ‘토굴’이다.

 90년에 활판으로 찍은 함민복의 첫시집 『우울씨의 일일』(세계사)의 첫시는 「흙 속으로 떠나는 전지훈련」이다. 첫시에 시인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가 깃들어 있다. 흙에서 태어나 흙을 먹고 자란 어린 시인은, 타의에 의해 전액 국비로 운영되는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공고에 대해 어떤 사전 정보도 없었던 소년 시인의 학창 시절은 지옥의 한철이었다. 그 지옥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 지옥의 울타리는 완강했다. 그의 미래, 그러니까 그의 직업적 삶은 그 지옥에서 결정되어버렸다. 핵발전소 근무. 청년 시인이 핵발전소에서 삶과 꿈이라는 방사능에 노출되는(피폭) 동안, 힘없는 그의 집안은 빚더미만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빚더미가 아니었다면, 그는 원자로 옆에서, 중수(重水) 옆에서, 더 오래 무료했을 것이었다. 그 무료함은 우울증을 치명적으로 깊어지게 했을 터였다. 집안의 빚더미가 그의 퇴직금을 요구했던 것이니, 그는 약 4년을 핵발전소 직원으로 있다가 퇴직한다.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 출생. 3남 3녀의 막내. 할아버지까지는 귀족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19세기 후반, 강릉 지방의 토호였는데 어떤 변란에 연루돼 충주로 피난을 내려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농부였다. 어머니는 충주사람이어서, 함민복이 어렸을 때, 외가가 같은 마을에 바로 이웃해 있었다. 한때 가족들은 마을에서 가장 큰 집에 살았다. 그 마을은 금강 수운이 번성할 때 1천2백 호나 되는 큰 마을이었다. 그의 식구들이 살던 큰 집은 그 ‘잘나가던 시절’에 떵떵거리던 여인숙쯤 되었던 모양이었다.(함민복의 추측에 의하면, 신경림의 시에 등장하는 큰 집이 바로 자기가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함민복이 태어난 마을은, 시인의 마을이었다. 신경림을 비롯해, 이름을 알 수 없는 월북시인, 시운동 동인이었던 정한용 시인, 지순 시인, 문학 저널리스트 임순만 등이 바로 그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함민복은 신경림의 ‘아들’이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문학을 접한 계기가 신경림 시인과 인연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자주 찾아가던 친구네가 국수틀집이었는데 그 주인이 신경림과 문학공부를 같이 했던 친구였다. 또, 중학교에 다닐 때 매주 불렀던 교가는 신경림 시인이 작사한 노래였다.

 함민복의 시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름답게 등장할 때는, 그가 유년 시절의 고향을 떠올릴 때이다. 그는 수도전기공고에 입학하면서부터 내내 유년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전기공고에 입학할 때, 보증인을 두 명씩이나 세워, 함부로 그만둘 수도 없었다. 군대 같은 공고 생활을 마치고, 기능사 2급 자격증을 들고 월성 핵발전소에 취직할 때에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공고에서 결정된 그의 삶은 당분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빼도박도 할 수 없는’ 결정된 삶이, 머리 좋고 감수성이 예민한 공고생들을 괴롭혔다. 실제로 그들은 깊은 ‘내상’을 입었으니 “친구들 중 정신과를 출입하는 친구들 많고/자살한 친구, 후배”(「우울씨의 일일 1」)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그는 ‘머릿속에 흙 한 삽’을 집어넣고 싶어했다.

 핵발전소에서 그는 기계 혐오증을 앓았다. “기계에 대한 의심이 바로 발전소 직원으로서의 성실성의 척도”가 되어버렸을 때, 역시 그는 머릿속에 흙 한 삽을 넣고 싶어했다. 수도공고 시절, 방학 때면 『현대문학』 과월호 50권을 사들고 고향에 내려갔고, 군대보다 엄격했던 학창 시절을 벗어나고 싶어 최인호의 「견습환자」를 모작했으며, 오정희의 「불의 강」을 밤새워 필사했던 핵발전소 직원은, 무시로 발전소를 떠나고 싶어했다. 기계가 아닌 살아 있는 생명과 함께 하는 삶을 원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소방수처럼 격렬한 삶을 영위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자신의 삶의 주인이 아니었다.

 발전소를 그만두며 받은 퇴직금이 얼마간 남을 줄 알았다. 그 돈으로 꿈에 그리던 문예창작과에 들어갈 참이었는데, 그 동안 집안의 빚은 더 불어나 있었다. 퇴직금으로 겨우 빚잔치를 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삶의 주어가 되었으나, 그 주어가 거느리는 목적어나 보어는 보잘것없었다. 87년에 서울예전 문창과에 입학했으나, 4·19 기념행사가 없는 학교에 실망했고, 학교 강의실도 미지근한 것이었다.(그는 이미 너무 많이 읽었고, 너무 많이 써왔던 것이다.) 그는 6월항쟁의 한가운데로 달려들어갔고, 이듬해 여름 방학,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월성 핵발전소로 내려간다. 그러나 ‘발전소 친구들’은 돈을 염출해 시인 지망생에게 건네주며 ‘너는 시나 써라’며 서울로 돌려보냈다.

 88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데뷔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복학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이후 그의 삶은 좀더 신산스러웠을 터였다. 대학을 마쳤으나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백마역(현재 일산 신도시의 한가운데) 근처에 살며 ‘모델하우스’를 어슬렁거리다가, 금호동이나 창신동 같은 서울 달동네에서 자취를 하거나 친구 방에 기숙하곤 했다. 한때는 경기도 양평 산골로 들어가 작은형을 도와 돼지를 키우기도 했다. 이 정처없는 시절, 그는 늘 ‘머릿속에 흙 한 삽’을 집어넣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집안의 가장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86년에 세상을 떠났고, 큰형님은 일사병으로 돌아가셨고, 작은형님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누워계신 것이었다.

 '우울씨’를 앞세워 자본주의 서울의 천박성과 야만성, 매스 미디어의 반인간적 폭력성을 공격하면서, 우울씨는 우울증의 근원을 군대보다 더 엄격했던 고등학교 시절과, 기계의 노예가 되어 무료하게 보내야 했던 발전소 시절의 전망 없음이라고 밝혔지만, 그 우울증의 보다 깊은 근원은 어머니(가족사)와 가난에 대한 원체험으로 보인다.

 그의 시에서 어머니는 “고향집 떠날 때/이불 보따리에 챙겨온 왕겨베개/하나/베고 잠드신 어머니”로 처음 등장하는데, 아들과 함께 서울의 변두리를 전전하는 그 어머니는, 현실적 능력이 거의 없는 시인 아들이 보기에 안쓰러움 그 자체였다. 갓 시인으로 데뷔한 아들이 원고료를 털어 술을 마시면서 생각하는 어머니는 눈물겹다. 「취객어록」에 그 심경이 자세하다. ‘어머니 시 마수한 돈으로 보청기 건전지 하나 못 사드린 제가 효자지요, 답답한 세상 이야기 속 시원히 들어 무엇하겠어요, 친척집 지하창고 생활을 치욕이라 생각 마세요. 더이상 내려갈 곳도 없고 우린 민방위 훈련처럼 안전하게 대피해 살고 있잖아요”.

 두번째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에서 시인은 어머니 앞에서 어머니에 대한 적나라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어머니 고통만큼 나는 어머니가 되고/당신 눈동자 파먹으며 살아온 세월/당신 귀 때려막으며 살아온 세월/ 당신 척추 시큰 매달려 살아온 세월/당신 더 뜯어먹고 싶어 당신 살리고 싶은 밤/당신 죽으면 당신 속의 내가 죽고/외롭게 내 안의 당신만 살아”.(「위험한 수업」) 그러다가「눈물은 왜 짠가」에서 시의 화자는 어머니와 가난을 동시에 극복한다.

「눈물은 왜 짠가」는, 거처가 없어진 두 모자가 서울을 떠나기 직전, 버스 터미널 근처 설렁탕집에서 있었던 짧은 삽화이다. 그러나 그 삽화에는 어머니와 가난, 가난한 자의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 그리고 그 가난을 어쩌지 못하는 젊은 아들의 섬세한 마음의 풍경이 선연하다.

 그의 시는 「눈물은 왜 짠가」를 전후로, 자본주의에 대한 일방적 야유에서 벗어난다. 패배주의적 성격이 짙은 우울증도 털어버린다. 「눈물은 왜 짠가」에 이어 「만찬」을 읽어보면 그 변화의 정도가 확연하다.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반찬이 강을 건너왔네/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김치보다 먼저 익은/당신 마음/한 상//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만찬」의 전문이다. 함민복의 시는 ‘밥의 시’이다. 그는 밥이 하늘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밥에 관하여 말한다. 강을 건너온 ‘당신’을 굳이 ‘반찬’이라고 말하는 무의식. 그러나 이내 그 음식은 ‘당신 마음’이라는 그릇에 담긴다. 물론 이때의 ‘반찬’은 사랑의 소도구(핑계)일 테지만, 반찬은 벌써 익어 마음으로 하여금 마음을 먹게 한다.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이 함민복의 시가 다다른 하나의 절정이다. 그것은,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받아든 라면 박스(「박수소리 1」)에서 시작된 가난의 원체험(혹은 자의식)이 극복되어 도달한 경지이고, 어머니와 가족사를 너끈하게 감당해낸 마음의 경지이기도 하다.

 그 마음의 경지는 폭이 넓고 깊어서 세계와 타자를 그윽한 시선으로 포착하기 시작한다. 시가 놀랍도록 따뜻해진 것인데, 그 따뜻함이 생산되는 ‘발전소’가 ‘선천성 그리움’이다. 사람이 그리워서 당신을 품었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우리 선천성 그리움”을 발견해낸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함민복이 일으켜세운 따뜻함의 세계를, 이른바 ‘건강한 긍정’과 같은 표현으로 묶어두지 않으려 한다. 언제부터인가, 건강함과 대긍정이라는 이 새로운 망령이 90년대 문학을 짓누르고 있다. 문학이 왜 건강하고 또 긍정적이어야 하는가. 건강하고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는 어떤 음험함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세계가, 인간이, 생명이 이렇게 나자빠지고 있는데, 건강하고 긍정적이어야 한다고 발언하는 ‘교사(敎師)’는 도대체 누구인가. 시여, 보다 불온해져라, 보다 병들어라.]

 다음은 허문명 기자의 글이다.

 [강화도 남쪽 끝자락 인천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 시인 함민복은 이곳 버려진 농가를 개조한 집에 살고 있다. 녹슬고 빛바랜 대문을 여니, 부엌과 세면장을 함께 하는 듯 보이는 수돗가 큰 고무대야에 망둥이가 잔뜩 담겨 있다. 술안주로 얼려 놓았다가 녹이는 중이라 한다.

 책상 하나가 유일한 ‘서재’는 온갖 책들이 책꽂이도 없이 벽을 의지한 채 쌓여 있다. 1인용 침대 하나가 달랑 있는 ‘침실’에 들어서니 며칠 내린 비 때문에 방에 물이 샌다며 연방 걸레질을 해댔다.

 그의 집은 재활용품 시장 같다. 친구들이 결혼하면서 버린 물건들을 하나 둘씩 받아 온 것이라 한다.

 함민복은 가난하다. 아니, 가난에 이골이 난 사람이다.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단지 무료라는 이유로 공고(工高)에 들어갔고 졸업 후 경북 월성 원자력발전소에 입사했지만 기계와의 대면이 너무 힘들어 4년 만에 그만두고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2학년 때인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성선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는 시집 ‘우울氏의 一日’과 ‘자본주의의 약속’에서 삶의 갈피마다에 스민 가난과 슬픔의 기억들로 서울의 천박성과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이야기하면서도 따뜻함과 서정성을 잃지 않았다. 세 번째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에서는 고단한 삶의 체험을 관대한 즐거움으로 끌어 올렸다.

 그의 시는 그대로 그의 삶이다. 서울 달동네와 친구 방을 전전하며 떠돌다 96년, 우연히 놀러 왔던 마니산이 너무 좋아 보증금 없이 월세 10만원짜리 폐가를 빌려 둥지를 틀었다는 그는 “방 두 개에 거실도 있고 텃밭도 있으니 나는 중산층”이라며 어린아이처럼 깔깔거렸다.

 그는 없는 게 많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다. 그런데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여유와 편안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가난에 대해 열등감을 느낀 적은 없느냐”고 물었다. 부스스한 머리칼에 구부정한 어깨를 가진 그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하다는 게 결국은 부족하다는 거고, 부족하다는 건 뭔가 원한다는 건데, 난 사실 원하는 게 별로 없어요. 혼자 사니까 별 필요한 것도 없고. 이 집도 언제 비워줘야 할지 모르지만 빈집이 수두룩한데 뭐. 자본주의적 삶이란 돈만큼 확장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체험했지만 굳이, 확장 안 시켜도 된다고 생각해요. 늘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해요.”

 그는 오후 9시면 자고 다음날 오전 2∼3시경에 일어난다. 보통 9시 라디오 뉴스를 들으면서 잠을 청한다. 빨간 양철 지붕을 가진 안채는 쯔진청(紫禁城), 파란 양철 지붕 행랑채는 청와대, 흰 슬레이트를 얹은 화장실은 백악관이라며 자랑했다. 그의 농담은 가난과 삶을 깔보고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관조’로 느껴져 따뜻했다.

 새벽에 깨어 책도 뒤적이다 멍하니 날 밝는 것을 보기도 하다 일찍, 아침밥을 해 먹고 바닷가로 산책을 나간다. 일주일에 이틀 도심으로 시작(詩作) 강의를 하러 나가는 것 말고는 낚시하고 마을 가고 시 쓰고 손님들 맞고 하는 게 그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다.

 그는 이 자본과 욕망의 시대에 저만치 동떨어져 살아가는 빈자(貧者)였다. 이 세상 모두가, 중심을 향해 그저 앞으로만 나가고 있는 이때, 변두리 바닷가로 스스로를 자꾸 밀어내듯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중심(中心)을 부러워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계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삶에 대한 선한 마음을 가진 함민복 특유의 낙관이기도 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자기 혼자 걱정 없이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인 줄 뻔히 알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삶의 그물망을 넓혀 나가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야말로 성자(聖者)라고 말했다.

 소설가 김훈은 그를 “가난과 불우가 그의 생애를 마구 짓밟고 지나가도 몸을 다 내주면서 뒤통수를 긁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표현대로 함민복은 세상을 버리지 못하는 은자(隱者)이고 숨어서 내다보는 견자(見者)였다. 강화도 남쪽 끝자락에는, 가난하지만 마음은 부자인, 이 시대의 빈자, 함민복이 산다.]

 1998년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한 함민복 시인은 좀 섭섭했다. 상금도 없이 부상으로 준 커다랗고 무거운 기념품이 못마땅한 시인은 "차라리 쌀이나 한가마니 주지"하며 서운해 했다.

 함민복의 시와 산문을 한 편씩 감상해보자.

 

<선천성 그리움>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눈물은 왜 짠가>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국물을 그만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 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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