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1919-1975, 함경남도 함주)
한하운은 나병 선고를 받기 2년 전인 1934년부터 습작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15세 때였다. 그때는 시보다 소설을 쓰려고 했는데, 1936년 나병 선고를 받자 시 쪽으로 바꾸었다. 한하운은 김소월을 좋아했다. 구구절절 한이 서린 한마디 한마디가 한하운의 가슴에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한하운은 병 치료를 받으면서도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공부를 하다가, 결국 병이 악화되어 귀국했다. 그가 문둥병이라는 소문이 이웃에 나돌까봐 벽장에 숨어지내야만 했다. 금강산에 들어가서 두 달이고 세 달이고 치료를 받기도 했다. 1947년 뒤를 봐주던 어머니가 죽고 동생은 데모 사건으로 끌려갔다. 한하운은 그 길로 서울로 와 삼각지며 을지로, 동대문,청량리 등 길위에서 자고 하늘을 보고 일어나는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어디 하나 몸 붙일만한 장소가 없어 가마니를 덮고 겨울을 지냈다. 명동으로 왔다. 명동은 달랐다. 음식점이나 상점이 많고 사람들도 많았다. 구걸하기가 한결 쉬웠다. 그는 구걸로 목숨을 부지하면서도 시만은 잊지 않았다. 때로는 시를 팔아 구걸하기도 했다.
1949년 그의 사정을 알게 된 시인 이병철의 설득 끝에 그는 시집을 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로 시작되는 <전라도 길>이란 시가 한하운을 공산주의자로 만들었다. 1953년 전쟁이 끝난 직후의 일이었다. 당시 모 주간지에 한하운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기사가 나간 이후 다른 신문들도 연일 그를 허구의 인물로 만들었다. 그것이 부풀어 빨치산의 어느 누가 한하운이라는 이름으로 선전선동을 일삼는다고 소문이 나돌았다. 거기다가 1949년에 발표한 <전라도 길>이라는 시가 문제되기 시작했다. 황톳길의 이미지를 표현한 '붉은'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이렇게 부풀려진 나환자 시인 한하운 사건은 국회 안건으로 상정되었고, 결국 한하운은 공산주의자도 가상의 인물도 아닌 나병환자 한하운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한하운은 이후 두 달만에 <보리피리>를 출판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였다.
서울신문사의 오소백 기자는 한하운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어느 해 겨울인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그와 함께 무교동에서 막걸리를 실컷 마신 일이 있었다. 그날 밤 늦게 나를 정릉 집앞까지 데려다 주고는 그냥 뺑소니를 친 일이 있었다. 술이 취한 나를 하운은 집앞까지 바래다 줬던 것이다.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해도 결코 들어가는 법이 없었다.]라고.
한번은 괴짜시인들이 명동의 뒷골목 허름한 대폿집에서 숙명적인 해후를 하였다. 김관식, 천상병, 이현우, 한하운이 만났다. 한국문단의 2대 기인과 거지 시인, 나환자 시인이 만난 것이다. 그들은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왁자지껄 술을 퍼마셨다. 술이 오르자 김관식은 <변강쇠 타령>를 장단에 맞추어 잘도 부른다. 이현우는 장타령, 품바타령을 했다. 천상병은 음치 중에 음치였다. 그러면서도 천진난만한 그답게 동요를 유치원 원생처럼 유희를 곁들여 열심히 불러 좌중의 사람들을 웃겼다.
"야 문둥이, 니좀 해보라니께."
김관식이 하운에게 노래하라고 재촉했다. 하운은 <신라의 달밤>과 <솔베이 송>을 멋들어지게 열창하였다. 김관식 왈,
"와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더니, 문둥이 주제에 노래는 기맥히게 잘한다니께. 니가 문둥이 됐기가 다행이지 안 그러면 숱한 년들을 울렸을 것이여, 문둥이 된 게 잘됐다니께."
"야 이 문디자슥 고마 시끄럽다. 니는 뭐이 잘났노. 생긴 것이 꼭 소도둑놈처럼 생겨갖고 천둥에 도깨비 날뛰던 해쌌노."
"야 상병이 너 증말로 말 다한겨? 내사 얼굴은 관옥 같고 풍채는 두목지여. 늬들 메주덩이와는 달라도 한참 달라. 그런데 내 겉은 미남더러 뭐이 어쩌고 어째?"
"문디자슥 지랄하고 자빠졌네. 니까짓 게 미남이여? 삶은 개대가리가 웃겄다."
"상병이 니 내가 성님두 한창 성님인디 그게 뭔 말버릇이여, 당장 취소혀. 안 그러면 내가 당장 버릇을 갈쳐 놀 텡께…"
"이거 왜들 이러시오, 존 술 먹고…"
"야아, 문디 니는 가만 있거라."
"자꾸만 문둥이 문둥이 하고 입에 올리지 마쇼. 이거 서러워서 살겠나."
하운이 쀼루퉁한 소리를 내뱉자 이현우가 하운에게 말했다.
" 보라꼬 하운이, 우리 경상도에서는 문디라카는기 알고보모 욕이 아잉기라. 요즘 말로 옮기자면…"
"거지 주제에 아는 체하지 마."
"문둥아, 니 시 한 수 읊어봐라. 느네 큰 성님헌티."
김관식은 늘 자기의 나이를 십 년씩이나 올려 발하는 버릇이 있었다. 하운보다 나이가 5세나 아래였지만 그런데도 형님으로 자처하는 것이었다. 우리 웬수들끼리 그저 술이나 실컷 죽이자며 연거푸 잔을 비운다.
"관식이 니 돈은 있나?"
거지인 현우가 물었다.
"거지새낀 오나가나 티를 낸다니께. 술맛 떨어지게. 말이믄 돈이고, 돈이면 술이지…"
곤드레만드레 마시다가 먼저 천상병이 소변 본다고 들락거리더니 안 돌아왔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꽥꽥 소리를 지르던 관식도 밖으로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하운은 주머니를 몽땅 털었으나 술값이 모자랐다. 단골집이라서 외상을 했다. 이현우는 먹다가 남은 순대며 술병들을 주섬주섬 비닐 봉지에 싸서 넣더니 구렁이 담넘어가듯 어디론가 꼬리를 감추었다.
한하운은 1959년 나병 검진 결과 음성반응을 보이면서 정상인으로 돌아온다. 이후 한하운은 나병환자들을 위한 각종 회사를 설립하고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에 힘을 썼다. 한하운은 1975년 2월 간경화증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그의 시비는 한때 나병환자로 머물렀던 전남 고흥 소록도에 세워졌고, 거기엔 그의 대표작인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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